봉준호 감독은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 소감에서 거장 ‘마틴 스코시지’의 말을 인용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The most personal is the most creative.) 마틴 스코시지가 전 세계 시네아스트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이유는 그의 말처럼 장르적인 틀 안에서 한 인간의 지극히 사적인 실존을 풀어내는 솜씨 덕분이다. 마틴 스코시지의 페르소나는 총으로 사람을 쏘고 마약을 밀수하고 배신과 암투를 벌이면서도, 그 이면에는 한 여자를 사랑하고 가족을 목숨처럼 챙기며 놀랍게도 최소한의 직업윤리를 지켜내려는 한 개인의 위엄을 간직한다. 스펙터클을 연출함과 동시에 늦은 밤 집에 들어와 외투를 벗고 침대맡의 백열등을 켜는 남자의 근심 어린 얼굴도 놓치지 않는 셈이다. 그래서 스콜세지의 수많은 갱스터 무비는 세월이 흘러도 낡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오늘은 최근 20년간 나온 갱스터 무비 중에 스콜시지 못지않은 공력을 자랑하는 갱스터 영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국내에는 덜 알려졌지만, 장르 형식에 갇히지 않고 포스트 모던한 태도로 전형성을 벗어난 작품 위주로 골랐다. 제목은 오늘은 우리가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르는 갱스터 영화 세 편이다.

 

<아메리칸 갱스터>(2007)

리들리 스콧의 갱스터 영화의 핵심은 직업의식이다. 그것이 마피아 두목이든 형사든 다르게 없다. 각기 맡은 배역을 완벽하게 소화하는 메서드 배우처럼 한치의 느슨함도 없이 자신을 스스로 몰아붙인다. 영화를 보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선인과 악인을 구분하기가 어렵다. 오직 자기 일을 철저하게 수행해가는 두 주인공의 프로의식에 집중하게 된다.

영화의 배경인 1970년대 뉴욕은 베트남 전이 한창이다. 국내외로 혼란한 틈을 타 갱단의 출현이 경찰의 골머리를 썩이기 시작한다. 갱들은 밖으로는 고급스러운 모직 코트를 휘날리며 자선사업가 행세를 하지만, 정작 들락거리는 곳은 마약이 그득한 뒷골목이다. 그런데 어느 날 뉴욕을 주름잡던 갱단의 두목이 돌연 사망하면서 권력에 빈틈이 생긴다. 이때 위기에 빠진 조직을 수습하는 건 두목의 수족으로 신뢰받던 ‘루카스’다. 덴젤 워싱턴이 연기하는 루카스는 굳건한 표정과 재치 있는 말투 그리고 날렵한 일 처리로 조직을 장악해 나간다. 순식간에 세력 다툼을 종식한 루카스는 할렘가의 대표주자로 우뚝 선다. 루카스는 조직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베트남의 마약 밀수입 경로를 개척한다. 이후 탄탄한 자금줄을 쥔 루카스는 뉴욕 경찰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기 시작한다.

한편, 강력계 형사 ‘로버츠’(러셀 크로)는 뉴욕 경찰국에 속하며 도시의 마약 소탕을 위해 루카스의 근접거리에 다가선다. 당시 뉴욕 경찰은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기강이 해이해, 한때 마약 밀매에 동참하고 갱단의 뒤까지 봐줄 만큼 썩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로버츠는 흔들리지 않는 형사의 패기로 혈혈단신 거대 조직의 마약 소통 작전을 진두지휘한다. 로버츠는 루카스가 아내 몰래 변호사와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까지 알아내고, 이를 통해 루카스를 압박하기로 한다.

실존 인물 프랭크 루카스는 한때 할렘 뒷골목을 장악한 마약 딜러였다. 시대의 거장 리들리 스콧은 제가 맡은 일에 관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상당한 약점을 지닌 인물 간의 다툼을 통해 입체적인 캐릭터 조형술을 보여준다. 두 사람은 어느 하나 물러서지 않고 맞서지만, 어느 순간 자신과 동종의 인간을 상대하고 있음을 깨닫고 복잡한 감정을 품는 과정이 흥미롭다. 삶의 허점을 숨기기 위해 오직 일에 투신해야만 했던 두 프로페셔널한 직업인의 속내를 엿볼 수 있다.

 

<킬러들의 도시>(2008)

마틴 맥도나는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가, <쓰리 빌보드>가 소리 소문 없이 히트하면서 단단한 팬층을 확보한 감독이다. 마틴 맥도나의 작품을 다시 보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면서, OTT에서 단연 관심을 받은 작품은 완성도와 재미를 동시에 취한 갱스터 영화 <킬러들의 도시>다. 마틴 맥도나의 데뷔작이기도 한 <킬러들의 도시>가 지닌 괴상함은 우선 우울증에 걸린 킬러라는 설정에 있다. 임무에 실패하고 외딴 도시 벨기에 브리주에서 동분서주하는 두 킬러는 서로에게 총구를 들이밀지만,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서로의 처지에 연민을 품는다. 누군가를 죽여야 하지만 그냥 다 때려치우고 자살하고 싶은 마음마저 비슷한 두 사람은 좀처럼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다. 그들은 누군가를 죽여야 하지만 죽인 후에 혼자 남게 될 자신의 처지를 끔찍이도 두려워한다. 이처럼 <킬러들의 도시>는 작고 아름다운 도시 벨기에 브리주를 배경으로 그들의 아이러니한 처지를 아기자기한 개그로 승화시키며 블랙코미디의 진수를 보여준다.

영화의 주인공 '레이'역을 맡은 콜린 패럴은 최근 수많은 예술 영화에 출연하면서 주목받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잘생긴 타블로이드지를 수놓는 할리우드 스타와 보기보다 선 굵은 연기력을 지닌 배우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던 애매한 위치였다. 흥미롭게도 영화는 영화 밖 배우라는 정체성에 힘들어하던 콜린의 실제 처지를 적극적으로 극 속으로 끌어들이며 이도 저도 못 하는 어설픈 킬러의 성격과 맞물리게끔 유도한다. 음울한 연기를 소화하는 콜린은 이 작품을 통해 미워할 수 없는 킬러의 불안을 제대로 소화해내며 연기파 배우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레이를 죽이라는 지시를 받은 동료 킬러 ‘캔’(조나단 글리스)은 삶의 의미를 상실한 채 하루하루 연명하는 연기를 하는데, 죄의식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못 하는 레이를 보며 동질감을 느끼고 의기투합한다. 영화는 마틴 맥도나가 단순히 재밌는 이야기를 풀어 넣는 이야기꾼을 넘어, 장면마다 정념과 유머를 배치하여 장력을 조절할 줄 아는 기교파임을 보여준다.

 

<이스턴 프라미스>(2007)

<이스턴 프라미스>는 폭력은 어떻게 전수되고 다시 재창조되는가를 탐구하는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프로젝트가 정점에 이룬 작품이다. 흔히 조직을 패밀리라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같은 입을 가진 식구라는 표현을 흔히 쓴다. 이처럼 조직의 결속은 같은 대의명분을 공유하며 고통과 영광을 함께 나누며 더 견고해지기 마련이다. 일종의 공동운명체로서 살아도 죽어도 같이 간다는 것을 강조하며 충성 맹세를 받아내는 것이다. 그래서 흔히 나오는 갱스터 영화의 클리셰에 조직에 막내가 들어오면 총을 쥐여주고 약자를 해치게끔 유도하는 장면이 있다. 같은 악을 행하는 것만큼 결속을 다지는데 좋은 방법도 없기 때문이다.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폭력의 역사>를 통해 폭력이 계승되는 이치는 가족화에 따른 역할 배분에 있고, 그들의 공모로 탄생한 아기가 자신들의 악행을 대물림하는 방식을 통해 폭력의 역사를 영속화하는 이치를 보여준다.

조직에서 아들 역할을 맡은 ‘키릴’(뱅상 카셀)은 아버지를 극진하게 모시지만, 사사건건 키릴의 오른팔 ‘니콜라이’(비고 모텐슨)와 부딪친다. 혈연으로 맺어진 적자가 외부에서 들어온 양자와 대립하니 상대가 될 리 없지만, 워낙 꼼꼼한 일 처리로 유명한 니콜라이는 묘한 긴장 관계를 형성한다. 그러던 어느 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야 만 간호사 ‘안나’(나오미 왓츠)가 그들 앞에 나타나면서, 조직의 결속은 점차 흔들리기 시작한다. 뛰어난 실력에도 늘 이인자에 머물러야 하는 태생적 조건을 뛰어넘을 기회와 자신이 속한 조직의 체제가 흔들리는 상황 앞에서 고뇌하는 비고 모텐슨의 연기가 섬뜩하다. 역성혁명의 기회 앞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처지는 흔한 것이지만, 크로넨버그 감독은 연기파 배우들의 열연을 끌어내며 서스펜스를 극단으로 가져간다.

<이스턴 프라미스>는 비고 모텐슨의 연기가 장면 장면을 사로잡는 작품이다. 어둡고 습한 항구 뒷골목과 표정 하나 없는 냉혹한 표정을 한 니콜라이의 속내는 항시 오리무중이다. 고뇌하는 마음을 숨기고 최대한 말을 아껴가면서 관객의 마음을 들쑤신다. 배신하기에는 잃을 것이 너무 크고, 사랑에 투신하기에는 자신의 마음을 확신하지 못하는 자의 딜레마다. 영화의 말미에 목욕탕 격투신은 그 잔혹함과 핏기 없는 연출로 극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한다. 영화 내내 응축했던 기운을 터뜨리고, 폭력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이성뿐이라는 믿음까지 난도질하는 감독의 선연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메인 이미지 <이스턴 프라미스>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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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런히 보고 영화 리뷰와 서평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