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폰다,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제이미 리 커티스, 나스타샤 킨스키, 로라 던.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하나는 이들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다 알만한 배우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들의 배우의 딸이라는 거다. 헨리 폰다, 마이클 레드그레이브, 토니 커티스, 클라우스 킨스키, 브루스 던 등 배우로 명성을 알린 부모로 인해 이들 모두 등장 당시에는 ‘어떤 배우의 딸’로 더 알려졌다. 그러나 지금은 이들 모두 어떤 배우의 딸이 아닌 배우로 기억되고 있다.

스크린이나 촬영장에서 연기 중인 부모의 모습을 보는 것만큼 연기를 시작하기에 좋은 조건도 없을 거다. 부모가 배우이기에 자연스럽게 연기를 시작한 이들이 있지만, 그중에는 부모의 후광에 상관없이 자신의 길을 걷는데 성공한 배우들이 존재한다. ‘어떤 배우의 딸’이 아닌 ‘배우’로 기억된 이들의 작품을 살펴보자.

 

안젤리나 졸리, <처음 만나는 자유>

안젤리나 졸리는 전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배우 중 한 명이다. 안젤리나 졸리의 아버지는 존 보이트로, <귀향>(1978)으로 칸 영화제와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고, <미드나잇 카우보이>(1969), <서바이벌 게임>(1972), <레인 메이커>(1997), <알리>(2001) 등에 출연한 배우다. 안젤리나 졸리가 어렸을 때 존 보이트가 이혼을 하면서 두 사람의 사이는 가깝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둘은 <툼 레이더>(2001)에서 아버지와 딸로 출연하기도 했다. 안젤리나 졸리 하면 화려한 스타 혹은 액션 배우의 이미지가 강할 수 있지만,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데뷔 이후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며 차근차근 자신의 연기력을 증명했음을 알 수 있다. <처음 만나는 자유>(1999)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안젤리나 졸리에게 여우조연상을 안겨준 작품으로, 안젤리나 졸리가 스타이기 이전에 얼마나 좋은 배우인지 보여주는 영화다.

‘수잔나 케이슨’(위노나 라이더)은 자살 시도를 하다 응급실에 실려 가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의 의지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수잔나는 왜 자신이 병원에 있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가운데, 병원을 탈출했다가 돌아온 ‘리사’(안젤리나 졸리)와 가까워진다. 수잔나와 리사는 점점 가까워지고 둘은 병원에서 여러 일탈을 시도하다가 결국 함께 탈출을 시도한다.

<처음 만나는 자유>에서 안젤리나 졸리가 연기한 리사는 여러 번 병원을 탈출하지만 결국 병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진짜 자신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영화 밖에서 안젤리나 졸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 안에서 최선을 선택하며 흥미로운 행보를 보여왔다. 데뷔 후에는 <처음 만나는 자유> 등 개성 강한 작품들을 통해 자신의 연기력을 보여줬고, 후에는 <툼 레이더>, <원티드>(2008), <솔트>(2010) 등에 출연하며 액션으로 큰 임팩트를 남겼다. 올리버 스톤의 <알렉산더>(2004), 마이클 윈터바텀의 <마이티 하트>(2007),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체인질링>(2008)까지 명감독들의 작품에 출연하고, <말레피센트>(2014)는 후속편까지 나왔으며, <이터널스>(2021)로 마블의 일원이 되었다. 현재는 <피와 꿀의 땅에서>(2011), <언브로큰>(2014), <바이 더 씨>(2015) 등 감독으로서도 활발히 활동 중이다. 안젤리나 졸리는 데뷔 때나 지금이나 명성의 차이는 있어도, 여전히 자신의 소신에 따른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어떤 단면으로만 판단하기에는, 안젤리나 졸리가 가진 영화인으로서의 모습은 무궁무진해 보인다.

 

케이트 허드슨, <올모스트 페이머스>

케이트 허드슨의 이름을 들으면, <10일 안에 남자 친구에게 차이는 법>(2003), <사랑보다 황금>(2008) 등 로맨틱 코미디부터 떠올리는 관객들이 많을 거다. 케이트 허드슨의 어머니는 골디 혼으로, <선인장 꽃>(1969)으로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받고, <슈가랜드 특급>(1974), <벤자민 일등병>(1980), <환상의 커플>(1987), <죽어야 사는 여자>(1992) 등에 출연한 배우다. 케이트 허드슨의 로맨틱 코미디 작품들도 매력적이지만, 오직 하나의 작품을 소개해야 한다면, 단연 <올모스트 페이머스>(2000)다.

고등학생 ‘윌리엄 밀러’(패트릭 후짓)는 학교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지만, 대신 로큰롤 음악을 듣고 감상을 글로 풀어내며 시간을 보낸다. 윌리엄은 음악 평론가 ‘레스터 뱅스’(필립 셰이모어 호프만)의 권유로 공연장을 찾았다가 밴드 ‘스틸워터’와 가까워진다. 윌리엄은 자신이 그동안 써 온 글 덕분에 유명 음악잡지 ‘롤링스톤즈’로부터 기고 요청을 받고, 스틸워터의 투어에 동행한다. 스틸워터의 팬인 ‘페니 레인’(케이트 허드슨)도 투어를 함께 하는 가운데, 페니 레인은 스틸워터의 기타리스트 ‘러셀’(빌리 크루덥)과 가까워지고, 윌리엄은 페니 레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점점 커지는 걸 느낀다.

케이트 허드슨은 <올모스트 페이머스>를 통해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받고,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다. 케이트 허드슨이 연기한 페니 레인은 뮤지션 러셀의 열렬한 팬이고 곁에 가까이 머물지만, 정작 자신이 뮤지션의 진짜 연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혼란을 느낀다. 화려해 보이지만 나 자신을 잃어가는 세계와 화려함은 없지만 온전히 내가 꾸려가는 세계는 완전히 다르다. 전자를 겪은 이들이라면 후자의 소중함을 더 크게 느낄 수밖에 없다. <올모스트 페이머스>라는 제목은 스틸워터의 투어 이름이다. 굳이 뮤지션의 투어가 아니어도 그 누구도 자신의 삶에 ‘올모스트 페이머스’라는 수식어를 붙일 자격이 있다. 굳이 화려해 보이는 이들의 삶을 동경하고 쫓지 않아도, 자신의 방식으로 충분히 멋진 삶이 될 수 있으니까. <올모스트 페이머스> 속 페니 레인을 보며, 멋진 삶의 기준에 대해 생각해본다.

 

샤를로뜨 갱스부르, <님포매니악>

샤를로뜨 갱스부르는 영화와 음악 모두에서 인상적인 행보를 보이는 예술가로,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에서 국민가수로 불리던 세르쥬 갱스부르이고, 어머니는 영국의 모델이자 배우, 가수로도 활동한 제인 버킨이다. 제인 버킨은 에르메스의 ‘버킨백’으로 가장 유명하지만, 아녜스 바르다의 <아무도 모르게>(1987), 자크 리베르의 <누드 모델>(1991) 등에서 주연을 맡은 배우이기도 하다. 샤를로뜨 갱스부르는 <귀여운 반항아>(1985)로 성인이 되기도 전에 주연을 맡으며 세자르영화제에서 신인영화상을 받았고, <시멘트 가든>(1993), <크리스마스 트리>(1999) 등에 출연했다. 미국에서도 <21그램>(2003), <수면의 과학>(2006) 등 기획된 상업 영화보다 독특한 개성의 작품들에 주로 출연했다.

샤를로뜨 갱스부르의 커리어에서 돋보이는 건 역시나 라스 폰 트리에 감독과 호흡을 맞춘 작품으로, <안티크라이스트>로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기도 했다. <님포매니악>(2013)은 1부와 2부로 나뉘어 공개된 작품으로, 샤를로뜨 갱스부르가 라스 폰 트리에 감독과 호흡을 맞춘 세 번째 작품이다.

‘셀리그먼’(스텔란 스카스가드)은 길에 쓰러져 있는 ‘조’(샤를로뜨 갱스부르)를 구해 집으로 데려온다. 조는 침대에 누워서 셀리그먼에게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신이 처음으로 성에 눈을 뜬 이후로,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샤를로뜨 갱스부르는 유명한 예술가를 부모로 두고 태어났고,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주목을 받아왔다. 배우가 작품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했는지는 본인만 알 수 있고, 결국 작품이 모든 걸 설명한다. 샤를로뜨 갱스부르의 출연작을 보면, 안전한 선택과는 거리가 멀고 도전 의식과 독특함이 주를 이룬다. 배우이자 뮤지션으로 계속해서 활동을 이어 가는 가운데, 최근에는 <제인 바이 샬롯>(2021)을 통해 감독으로 데뷔했고,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제인 버킨도 출연하는 다큐멘터리다. 이제 감독으로서도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는 샤를로뜨 갱스부르의 다음 행보를 추측하는 건 쉽지 않지만, 관객들의 기대를 뛰어넘는 과감한 시도로 등장하게 되지 않을까?

 

다코타 존슨, <로스트 도터>

다코타 존슨은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2015)를 통해 전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관객과 평단에게 혹평을 받은 작품이지만, 관객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확실히 각인시켰다. 다코타 존슨의 아버지는 드라마 <마이애미 바이스>(1984)와 영화 <소년과 개>(1975), <나이브스 아웃>(2019) 등에 출연한 배우 돈 존슨이고, 어머니는 <침실의 표적>(1984), <썸씽 와일드>(1986), <워킹 걸>(1988) 등에 출연한 배우 멜라니 그리피스이며, 외할머니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새>(1963)와 찰리 채플린의 <홍콩에서 온 백작>에 출연한 배우 티피 헤드런이다. 배우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다코타 존슨은 단역부터 연기를 시작해왔고, 출연작 중 최근에 국내에 개봉한 작품으로는 <로스트 도터>(2021)가 있다. <로스트 도터>는 배우 매기 질렌할의 감독 데뷔작으로, 엘레나 페란테의 소설 <잃어버린 사랑>을 원작으로 한다.

대학 교수 ‘레다’(올리비아 콜맨)는 그리스의 섬으로 휴가를 떠난다. 해변에서 가족들과 여행을 온 일행들을 보고, 그중 딸을 데리고 다니는 ‘니나’(다코타 존슨)에게 자꾸 시선이 간다. 니나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과거(제시 버클리)를 떠올리는 가운데, 둘은 점점 더 가까워진다.

다코타 존슨은 루카 구아다니노의 <비거 스플래쉬>(2015), <서스페리아>(2018)에 출연하며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의 혹평이 무색할 만큼 좋은 연기를 보여줬고, <로스트 도터>에서는 출연 분량이 그리 많지 않은 배역임에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로스트 도터>는 ‘엄마’라는 이유로 부여되는 모성과 관련된 각종 사회적 편견을 비판하는 작품이다. 세상이 나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든, 결국 감당은 나의 몫이다. 타인에 대해 말하는 건 쉽지만 그게 자신의 문제가 되었을 때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된다. 다코타 존슨은 두 부모가 배우라는 배경부터, 명성을 안겨준 동시에 혹평에 시달린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시리즈까지 많은 편견 속에 배우로 성장했다. 어차피 보고 싶은 대로 보는 세상에서 택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다.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나의 행동으로 증명해내는 것. 어떤 부모의 딸이라는 편견을 넘어, 결국에는 배우로서 본인을 증명해낸 이들처럼.

 

Writer

에세이 <나만 이러고 사는 건 아니겠지>, <달리다 보면> 저자. 좋아하는 건 영화, 여행, 음악, 문학, 음식. 특기는 편식. 꾸준한 편식의 결과물을 취향이라고 부르는 중. 취향을 바탕으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김승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