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어인 에세이(essay)는 '시도' 또는 '시험'의 뜻하는 '에세'(essai)에서 파생한 단어다. 더 나아가 에세는 '계량하다' '음미하다'의 뜻을 가진 라틴어 '엑시게(exigere)'가 어원이다. 그러므로 에세이는 작가가 세상을 유심히 관찰하고 가늠하여 자신의 인간성을 정교한 글로 녹여낸 것임을 알 수 있다. '에세'라는 말을 처음 쓴 사람은 프랑스의 몽테뉴다. 그의 대표 저서 <수상록>이 불어로 'Les Essais'였다. 그는 수상록을 통해 '나 자신을 연구'하는 일에 몰두했다. 죽음, 우정, 동물, 전쟁, 여행, 섹스, 취향 등등 여러 가지 주제를 자기 자신이 보고 느낀 걸 기준으로 탐구했다. 보통 수필이 따를 수에 붓 필자를 써, 손이 가는 대로 쓴 글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에세이는 태생부터 좀 더 무거운 내용을 다룬 산문이었다. 내가 평소에 즐겨 읽는 에세이 역시 사유가 제법 두터운 글이 대부분이다. 작가의 전문 분야를 바탕으로 몇 가지 전제를 세운 후 심층적으로 파고든 책들이다. 오늘은 수필보다는 에세이가 어울리는 이름난 작가들의 에세이 책을 소개한다.

 

폴 칼라니티 <숨결이 바람 될 때>

십 년이 넘는 신경외과 과정을 힘겹게 거쳐 이제 곧 레지던트를 마치고 전문의가 될 예정이었던 폴 칼라니티는 폐암 4기 판정을 받고 낙담한다. 매일 중증 뇌 손상 환자들을 돌보느라 잠도 잘 못 자던 그가 이제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신세가 된 것이다. 하루아침에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폴은 죽기 전 마지막 2년간 제 삶을 회고한 책을 펴냈다. <숨결이 바람 될 때>는 폴 칼라니티의 인생 전반과 한 사회의 지성인으로서 삶의 철학을 서술한 책이다. 책의 서문을 보면 폴은 의과대학에 진학하기 전까지 작가를 꿈꿔왔을 만큼 다독가였음을 알 수 있다. 과연 <숨결이 바람이 될 때>를 읽다 보면 폴은 의학뿐 아니라 세상 다방면에 관심이 많은 지성인의 면모를 선보인다. 그래서 이 책은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젊은 영혼의 슬픔보다는 세상을 바라보는 한 인간의 참신한 시각을 느껴볼 수 있다.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재밌게 읽은 대목은 폴의 대학 생활 파트다. 늘 작가이길 바랐던 폴이 어떻게 투철한 직업윤리를 지닌 의사가 되었는지 목도할 수 있다. 폴은 예일 의과대학 졸업식 선서에서 일부 학생들이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들어가는 내용을 문제시했던 일화를 소개한다. 내용인즉슨, 의사의 이익보다 환자의 이익을 중시한다는 취지의 조항이 현실적으로 부적절하다며 동료 학생들이 불만을 제기한 것이다. 폴은 작금의 사태에 관해 의사는 직업인이라기보다는 소명 의식을 지닌 별도의 존재로 규정한다. 보통 사람들이 직업을 택할 때 연봉, 근무 환경, 노동 시간을 고려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누군가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라면 환자를 향한 투철한 의식 없이는 버텨내기 힘들다고 단언한다. 한국의 경우에 의과대학이란 성적이 뛰어난 소수의 학생이 줄지어 들어가는 곳임을 떠올려보면 그의 말이 지나치게 순진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소명이라니, 그런 낭만적인 단어를 아직도 믿는 사람이 있다는 놀라움이 앞선다. 폴은 나의 냉소를 비웃는 것처럼 시한부 선고를 받고도 평소처럼 환자를 돌보며 고된 외과 수술을 이어 나간다. 투병 중에도 틈틈이 시간을 쪼개서 책을 집필하고 무엇보다 아내와 고심한 끝에 2세를 낳기로 한다. 삶의 끄트머리에서 그는 소중한 하루하루를 바삐 보냈고, 의사와 작가 외에도 남편과 아버지라는 정체성을 갖고 세상을 떠나기로 한다. 그 모든 것이 충동적인 선택이 아닌, 철저한 계획에 따라 이뤄졌다는 점에서 놀라운 데가 있다.

학자로서 폴의 관점은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그는 영문학 학위를 따고 대다수의 관련 분야 학자들이 과학을 접할 때, 불을 피해 달아나는 유인원처럼 극심한 공포를 느낀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세상이 마치 과학과 문학으로 양분된 것처럼 한쪽에 치우쳐서 공부하는 학계 풍토에 의구심을 느낀다. 그는 진로를 택함에 있어 의사라는 직업이야말로 머리와 가슴이 모두 필요한 직업이라는 점에 끌린다. 의료계는 첨단과학과 멀지 않지만, 인간의 통증과는 더 가까워서 환자에 공명하지 못하면 제대로 된 치료가 어렵다. 폴 칼라니티는 그래서 문학이 오히려 과학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생사의 갈림길을 환자와 함께 헤쳐 나가야 하는 의사야말로 문학의 토대 위에 있음을 이해시킨다. 환자의 고통을 헤아리는 것이 픽션의 영역이라면, 누군가의 고통을 해소해주는 의학이야말로 허구를 실재하게끔 이뤄내는 도구이다.

폴은 생전에 죽음의 갈림길에 선 환자를 치료했다. 하지만 막상 자신이 죽을 위기에 처하자 진짜 죽음을 볼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삶과 죽음의 복판에서 매스를 들고 분투했지만, 정작 단 한 번도 진짜 죽음에 관해서는 생각해 본 적 없음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진짜 죽음은 무엇일까. 메멘토 모리라고 했던가.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그 말이 지닌 울림을 늘 상기하며 사는 것이다. 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생각하며 투쟁하는 삶이다. 그는 끝까지 의사로 살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죽음이 과연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는 여남은 시간도 놓치지 않았다.

 

캐럴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

캐럴라인 냅은 마흔둘이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뜬 비운의 작가다. 놀랍게도 세상을 뜬 지 20년 만에 한국에서 그의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이유가 뭘까. 냅은 평생 끔찍한 중독에 시달렸는데, 그 과정을 고스란히 녹여낸 책을 다수 출간했다. 알코올 중독, 다이어트 강박증과 섭식장애를 솔직하게 푼 냅의 에세이는 다소 파격적이고 병적인 구석이 있지만, 뭔가에 몰두하지 않고는 좀처럼 버텨내질 못하는 요즘 우리의 삶과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소구하는 바가 있다.

현대인의 병리 현상은 무엇이 있을까. 삶을 향한 불가사의한 두려움에 자기 자신을 스스로 몰아세우고, 뭔가에 몰두하지 않고서는 불안한 밤을 견뎌내질 못한다. 캐럴라인 냅은 과거에는 부끄러워 말도 꺼내지 못했던 중독 증세를 함께 아파할 수 있는 보편적인 정서로 풀어냈다. 누구나 감추고 싶어 하는 내밀하고 혹독한 시간을 솔직하고 가감 없이 고백해서 독자의 관심을 끌어낸다. 아무리 누추한 기억이라도 우아한 글로 풀어내면 품위를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이 불행을 명랑하게 바꿔낸다.

<명랑한 은둔자>는 그런 의미에서 캐럴라인 냅의 삶 전반을 엿볼 수 있는 에세이 책이다. 연애에 아파하고 넓은 집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고, 옆집 친구와의 관계에 지나치게 의지하며 개가 사람보다 낫다는 것을 주문처럼 외운다. 평생 강아지와 단둘이 살았던 캐럴라인은 "결혼이라는 극단적인 헌신은 우리가 달리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서 선택하게 되는 일"이라고 손사래 친다. 사람이 어딘가에 정착하는 것도 자기도 모르게 일어나는 일이라며, 내 의지대로 되는 일은 거의 없으니 잘 풀려가던 삶도 어느 순간 고꾸라질 수 있다고 잘라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뭘 할 수 있을까. 그런 무력한 것이 삶이라면 어떻게 살지 애매하지 않나. 캐럴라인 냅은 시큰둥한 말투로 산책하라고 제의한다. 마음이 잘 맞는 친구와 공원을 걷고, 소파에 널브러져서 킬링타임용 드라마에 빠져보라고 권한다. 그는 과장을 싫어하고 지나친 의미 부여에 진력이 난다며, 실패를 인정하고 인생은 별건 아니지만 즐거운 것들로 채워 넣을 때 한결 수월하다고 확신한다.

독신이었던 캐럴라인은 아이에 관한 생각도 피력한다. "자기 자신을 별 이유 없이 그냥 아이를 갖지 않기로 결정한 여성으로 바라보는 것이 더없이 심란한 일일 수도 있다." 우리는 타인의 고정관념에 의해서 관습과 편견에 길들며 살아왔다. 타인이 날 '어떤 사람'으로 분류하는가를 늘 의식하고,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특히 나이를 먹고 남편과 아이가 없는 마흔 살 여성을 향한 사회적 시선은 음습하고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남 눈치를 안 보고 잘 살고자 해도 안 되는 것이 인간의 삶 아닌가. 캐럴라인 냅은 남의 말만큼 성가시고 무용한 것이 없다는 걸 깨닫고, 그들의 시야 밖으로 벗어나기 위해서 불필요한 관계를 차단했다. 특히 잘 알지도 못하면서 충고하려고 하는 작자들을 멀리했다. 가족은 더 위험할 수 있으며, 내 목소리를 찾는데 강아지와 함께하는 시간만 한 것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고 조건 없이 아껴주는 사람을 그냥 떠나보내지 않았다. 미루지 않고 찾아가서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초인종을 누른 후에 고마움을 전했다. 부끄러워도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편지를 부쳤다. 명랑한 은둔자였던 캐럴라인 냅은 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결코 때를 놓치는 법이 없었다.

 

데이비드 실즈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우리의 일상은 기대와 달리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가족과 종교는 상시 문제를 일으키고, 권태로운 일과 부지불식간에 소멸하는 사랑은 지독하다. 난 그럴 때일수록 유머러스한 글을 찾는다. 데이비드 실즈는 그런 의미에서 염세적인 농담으로 암담한 삶에 빛을 드리우는 작가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아등바등하며 살기보다는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믿는 책이다. 턱을 괴고 심각한 표정을 짓기보다는 인생 뭐 별거 있냐며 낙관하는 쪽에 가까운 책이다. 그렇다고 작가의 야심이 농담에만 그치진 않는다. 데이비드 실즈는 인간의 노화와 죽음과 관련한 무수한 경구(aphorism)를 책에 가져온다. 지금은 다 죽었지만, 한때 죽음에 관해 아는 척했던 유명한 이들의 유언을 망라해서 죽음의 보잘것없음을 밝혀낸다. 그들도 우리처럼 두려워했지만, 숨이 멎을 때까지 말하기를 멈추지 않았기에 여태 말로 살아남았다. 그건 마치 부스러진 연탄처럼 무력하고 활활 타오르는 장작더미처럼 애처로운 이미지지만, 어쩌겠는가 우린 죽음에서 벗어날 다른 방도가 없다.

데이비드 실즈는 평생 건강하게 지내다 죽은 아버지와 이제 본격적인 늙어가는 자기 삶을 비교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요통과 식욕감퇴, 근육의 축소, 급격한 권태감에 괴로워하는 자신과 달리 늘 노화에 저항하며 활력 넘치게 살았던 아버지는 얼마나 다른 존재인가? 하지만 그런데도 데이비드 실즈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한다. 그래 봤자 다 죽었다고. 그게 누군가에겐 무섭겠지만, 저자에게는 그만큼 위로가 되는 말도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누구나 다 죽게 마련이다.

책을 읽다 보면 내 인생의 좌표는 지금 어디쯤 있으며, 이제 곧 어떤 일들이 발생해 날 노화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지 불안해진다. 몸은 날 늘 실망하게 하고 집착하게 하니까. 몸만큼 직접적으로 날 보여주는 것도 없기에, 늘 기대에 어긋나는 몸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 팔자다. LA 다저스의 스타팅 라인업으로 글자를 배울 만큼 야구광인 데이비드 실즈는 평생 책을 읽으며 커서는 글을 쓰는 학자로 먹고살았지만, 육체적으로 나약했다. 그는 늘 스포츠를 관람하여 육체의 매혹에 탐닉했다. 다저스의 수위타자 탐 굿윈이 쳐낸 공이 유려한 구도로 펜스에 처박히듯 야구와 인생엔 비슷한 착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뜬 공을 받으려는 외야수의 위태로운 자맥질엔 죽음에 항거하는 우리의 모습이 담겨있다. 아무리 버둥거려도 결국 실책을 범하고야 마는 삶의 아이러니가 우습다. 포스트 플레이 이후에 링을 튕겨 나가는 공을 바라보는 NBA 농구선수 케빈 가넷의 큰 눈처럼, 내야안타를 치고 전력 질주로 달리다가 아웃되는 야시엘 푸이그의 무모함처럼 인생은 안타까운 패배로 가득 차 있다. 마치 모든 것이 거기에 다 있다는 듯 매사 온 힘을 다하지만, 영문을 모르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눈만 끔뻑거리다가 늙음에 습격당한다.

97세까지 활력 넘치는 삶을 살다가 죽은 아버지는 평생 아들이 못마땅해했다. 일종의 행동주의자인 아버지는 아들의 지적인 면모를 남자답지 못한 증거로 여기며 타박했다. 좌파 지식인이며 오랜 기자 생활했던 아버지는 야구심판을 병행할 정도로 정력적인 남자였다. 그는 자기 아들만큼은 온전히 육체적인 인간이 되길 바랐다. 그것은 어쩌면 죽음에 대한 항거를 멈추지 말라는 대물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데이비드 실즈는 고질적인 허리 부상에 평생 시달렸고, 책을 펼치면 몇 시간 내내 앉아서 다 읽어내야 직성이 풀리는 학자형 인간이었다. 어느샌가 침대에서 집어먹는 언어와 사랑에 빠졌고, 작가라 불렸을 때 행복을 느꼈다. 이러니 부자 관계는 결코 화목할 수 없었다. 일종의 애증이라 볼 수 있었던 이 상반된 부자 관계의 결합은 오직 야구뿐이었다.

기록, 통계의 스포츠인 야구는 수치화된 결론으로 평가하는 일종의 사이버 매트릭스의 놀음과 같다. 지적인 사유와 육체적 폭발력의 결합. 데이비드 실즈와 아버지는 그 지점에서 서로 통했다. 수치와 통계를 등한시하는 아버지는 홈런과 승리에 집착했지만, 아들은 타자가 삼진을 당할 확률을 소수점 셋째 자리까지 구할 수 있었기에 텔레비전 앞에서 떠나질 않았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에 있는 영국의 의학자 윌리엄 오슬러의 말을 소개한다. ‘세상의 모든 쓸모 있고, 감동적이고, 고무적인 업적은 25세에서 40세 사이의 사람들이 이룬 것이다.’ 돌연 무릎이 꺾여 엎어질 것 같은 기분인가.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우리의 삶이 여전히 살만한 건 고무적인 업적 때문이 아니라, 아무도 없는 일요일 오후 소파에 누워 야구 중계를 보는 시간에 있는걸. 우리는 언젠가 죽겠지만 프로야구는 9회가 끝나고도 다음 날이면 계속될 것이다.

 

메인 이미지 책 명랑한 은둔자 표지 © Karen Offutt

 

Writer

영화와 책, 그리고 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쓴다. 지은 책으로는 <우리 각자 1인분의 시간>, <보내지 않을 편지>가 있다. 염세주의자가 되고 싶으나 하루 세끼 먹을 때마다 행복하다.
박민진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