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를 거치며 자기계발서 판매량이 급증했다. 국제유가 급등을 비롯한 전체적인 물가 상승이 사회 불안을 증대하면서 한시바삐 미래를 대비하려는 심리가 커진 탓이다. 자기계발서도 유행을 타는데 과거에는 삶의 해법을 제시하는 코치형 자기 개발이 도드라졌다면, 최근에는 답을 찾기보다는 현 상황도 크게 나쁠 거 없다며 위로하고 다독이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이처럼 예나 지금이나 자기계발서는 긍정주의를 전도하는 역할을 맡아왔다. 긍정이라는 말을 종교적인 수사처럼 쓰면서 삶은 틀림없이 더 나아질 거라고 낙관한다. 그래서인지 긍정이라는 말을 지나치게 남용하는 세태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속속 들려온다. 서점에 가면 긍정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책들이 자기계발서와 함께 놓여있다. 다음 소개하는 세 권의 인문서는 무조건적인 낙관을 찬양하는 책들에 찬물을 끼얹는 책들이다.

 

한병철 <피로사회>

독일에 거주하는 철학자 한병철은 <피로사회>라는 책으로 명성을 얻었다. 성과를 중시하는 시대의 불안에 관해 서술은 이 책은 현대사회를 억지 긍정을 강요하는 착취의 시대로 명명했다. 그리고 그 근간에는 집단주의 문화가 있음을 지적한다. 우린 내가 누구인지 제대로 정의하지 못한 상태에서 집단적인 가치를 우선시하는 교육을 받고 자라왔다. 개개인은 반발감은 최대한 누르고 찍소리 없이 조직의 지시에 순응해왔다. 밝고 낙천적인 태도로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식으로 웃겨 넘겼다.

한병철은 착취의 원인으로 우선 한국의 성과주의 시스템을 비판한다. 수치화와 통계를 중시하는 사회에서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뺏긴 피로한 인간들이 출몰한다. 고도화된 사회 시스템과 압축성장의 흔적이 역력한 한국사회에서 뒤처진 인간들은 기준치를 넘기기 위해 달려야 한다. 성과가 모든 정체성이 되면 결국엔 다른 이와 별다른 구분점이 사라진다. 저나는 청춘의 피로감이 대량 생산공정의 천편일률적인 공산품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한다.

<피로사회>는 과거 사회가 규율 사회이고, 현 사회는 이미 규율이 내재되어 있는 성과사회라고 정의한다. 과잉 긍정과 신자유주의가 남들보다 더 나은 성과를 강요하고, 자기 착취를 권장한다는 것이다. 날 착취하는 가해자가 타인이나 조직이 아니라 나 스스로라는 점에서 긍정을 강조하는 자기계발서는 눈속임에 가깝다. 저자는 긍정주의를 오용하는 현 상황에 대한 해법으로 깊은 심심함에 관해 말한다.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는 정신적 이완의 정점을 발견해야만 한다. 성과를 지향하지 않는 놀이처럼 깊은 사색을 이끌어내는 활동이 초래하는 ‘피로’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인간이 본질을 발견할 수 있고, 자아의 밖으로 나아갈 수 있는 통로가 필수적이다.

 

바버라 에런라이크 <긍정의 배신>

작가는 희망과 낙천성의 다른 점을 제시하며 책을 시작한다. “희망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감정 상태이자 갈망이다. 반면 낙천주의는 인지 상태이며 의식적인 기대이므로 누구든 수련을 통해 개발할 수 있다.” 즉,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도 낙천적인 마음을 의식적으로 불러올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낙천성이기에, 이를 이용하는 장사치들은 긍정주의를 하나의 심리학으로 둔갑시켜서 성과를 올리고 있다.

이런 폭력적인 긍정주의가 판을 치는 이유로 저자는 긍정성의 이면에 자리한 돈 냄새나는 배금주의를 지적한다. 기업에 파고드는 동기유발 산업은 물론이고 미디어에 등장하는 멘토(코치), 출판계의 자기 계발서의 유행이 대표적인 배금주의 사례다. 이른바 긍정주의 산업이 규모를 키워가면서 가짜 희망을 파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확실한 과학적 근거가 없음에도 긍정심리학이라는 학위가 생겨나고, 긍정을 복음처럼 전파하는 코치들이 고가의 강연료를 받고 청중을 상대한다. 뭐라도 붙들어야 하는 사람들은 나락의 끝에서 긍정주의에 모든 것을 쏟아붓고 자신의 고통을 피하기에 급급하다. 비관을 마치 병으로 치부하고 더 나아지려면 긍정을 주입해야 한다는 식이다. 그리고 그 주입의 목적이 불평을 잠재우는 기업 이기주의와 맞물리면 자기계발서와 거대 기업은 완벽한 앙상블을 이룬다.

실제 저자는 암 선고를 받은 후 주변에서 하도 암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을 해대서 불편함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불행이 삶의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말은 절망에 빠진 이에게 얼마나 폭력적인가? 고통을 호소하는 말을 삼켜야 하고, 불행을 느끼는 자신을 자책해야 마땅하다. 이런 긍정주의의 압력은 슬퍼할 여력을 앗아간다. 속사정을 숨기고 늘 웃는 얼굴로 상대를 마주하고, 모든 것이 다 나아질 것이라고 주문을 걸어야 한다. 불행을 제대로 마주하지 않는 것이 허울뿐인 긍정주의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마지막으로 긍정주의가 전 세계적인 금융 위기의 시작이었다고 지적한다. 무너져가는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눈을 가린 탓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럴 때일수록 이성적으로 현실을 진단하는 눈을 기르라고 제안한다. 반지성주의가 전 세계에 판을 치는 요즘 생각을 제대로 벼리지 않는다면 위기에 빠지고 말 것이다.

 

엄기호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마지막 책은 국내 저자의 인문학 책이다. 이 책은 제목처럼 청년의 처지를 우선 살피는 책이다. 저자는 2010년 고려대 캠퍼스에 붙은 한 벽보로 책의 포문을 연다. 이른바 김예슬 선언이라고 불렸던 한 학생의 자퇴에 관한 내용이다. 대학의 기업화와 학문의 실종을 지적한 그의 당찬 자퇴이유서는 큰 호응을 자아냈다. 저자는 이 사태를 바라보는 지방 대학생들의 착찹한 심경에 관해 얘기하며, 오직 인서울과 SKY라 불리는 주류만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상황에서, 그 중심으로 진입하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지방 대학생들을 배제한 소란에 허탈함을 느낀다. '요즘 애들'이라는 말 속에 묶인 비난의 핵심이 게으름이라면, 청년들의 항변에 섞인 요체는 차별적인 사회의 잣대에 있다.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는 2010년대 스무 살 학생들의 삶을 바탕으로 쓴 책이다. 이들이 겪은 고민은 십년이 훌쩍 지난 지금 현재의 당신의 삶과 어떠한 관련을 맺고 있는가? 여전한 학벌사회, 여전한 경제적인 계급, 강남과 타워펠리스로 대표하는 한국식 빈부격차의 아파르헤이트. 과연 10년 전에 비해서 달라진게 있을까?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넘어서서 더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기는 한 건지 생각해볼 문제다.

변하지 않는 현실의 비관을 몸에 익힌 청년들은 더는 긍정의 말에 속지 않는다. 탈정치화라는 말이 청년을 수식하는 용어로 쓰이고, 현실에 무감각하니 더 나은 미래를 생각하지 않게끔 한다. 정치와 사회를 향한 열광적인 무관심이 위악과 체념을 부추긴다. 저자는 이런 반긍정주의의 원인으로 도덕이 된 민주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민주주의를 세상을 위한 도구가 아닌 생존에 대한 도덕의 문제로 치부하니, 옳고 그름에 관한 얘기 대신 도덕적 우월성과 명분 쌓기에 열을 올린다는 것이다. 정치가 세상을 향해 기능하는 행정이 아니라 오직 말싸움을 위한 술수가 될 때 정치는 더욱 먼 가치가 될 것이다.

엄기호 작가는 이런 사태의 원인을 근저부터 파고들어서 학교가 학생들에게 말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음을 상기시킨다. 말을 꺼내는 데 두려움을 겪으니 비판에 취약하고 토론을 꺼리는 문화가 만들어졌다. 언어가 단순해짐에 따라 사고까지 단선적으로 흐르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저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청년들에게 제대로 말할 기회를 부여해야 마땅하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 마나 한 소리일지 모르지만 독서와 서술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 제 목소리를 정제하여 표출할 수 있는 능력을 단련하는 것이 어쩌면 이 사회가 요하는 인문학의 실체가 아닐까?

 

Writer

영화와 책, 그리고 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쓴다. 지은 책으로는 <우리 각자 1인분의 시간>, <보내지 않을 편지>가 있다. 염세주의자가 되고 싶으나 하루 세끼 먹을 때마다 행복하다.
박민진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