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이 심사위원장을 맡은 2021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작품은 <레벤느망>(2021)이다. <레벤느망>의 감독 오드리 디완은 각본가 출신으로 <레벤느망>이 두 번째 연출작이다. 각본가는 글을 쓰는 사람이지만, 결국 영화가 될 글을 쓰기에 그들의 방점은 ‘글’보다 ‘영화’에 더 크게 찍혀 있다. 각본과 연출은 다른 영역이기에, 좋은 각본가가 좋은 감독이 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영화의 시작에 각본이 있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기에 각본가의 감독 데뷔는 늘 기대를 품게 만든다. 각본가로 영화계에 이름을 알린 후, 현재는 감독으로서 많은 관객과 교감 중인 이들의 작품을 살펴보자. 

 

폴 슈레이더 <퍼스트 리폼드>

퍼스트 리폼드 교회의 목사 ‘톨러’(에단 호크)는 시간이 흐른 뒤에 없앨 생각으로 일기에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적는다. 찾아오는 신도들도 많지 않고 관광지에 가깝게 변한 교회에 어느 날 ‘메리’(아만다 사이프리드)와 ‘마이클’(필립 에팅거) 부부가 찾아온다. 메리는 환경보호단체에서 활동한 마이클이 캐나다에서 돌아온 후로 일을 하지 않아 걱정이라면서, 톨러에게 마이클과 상담을 해달라고 요청한다. 마이클은 인간으로 인해 지구가 위기라고 말하면서, 메리가 임신 중이지만 이런 세상에 아이가 태어나는 게 맞는지 고민이라고 말한다. 톨러는 일기에 자신의 감정을 적어 나가며 마이클과의 상담을 이어 나간다.

마틴 스콜세지의 팬이라면 폴 슈레이더의 이름을 들어 본 적 있을 거다. <택시 드라이버>(1976), <분노의 주먹>(1980),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1988), <비상 근무>(1999) 등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에 각본으로 참여했고, 시드니 폴락의 <암흑가의 결투>(1975), 브라이언 드 팔마의 <강박관념>(1976) 등 여러 감독들의 각본가로 활약해왔다. 다만 그를 각본가로 기억하는 이들만큼이나 감독으로 기억하는 이도 많다. 그는 <블루 칼라>(1978)로 감독 데뷔 이후 <아메리칸 지골로>(1980), <캣 피플>(1982), <어플릭션>(1997) 등 20편도 넘는 작품을 연출한 감독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감독 생활을 한 그의 작품 중 정점에 오른 연출력을 보여준 영화가 있으니, 바로 <퍼스트 리폼드>(2017)다.

폴 슈레이더는 각본가 데뷔 전에 영화평론가로서 <영화의 초월적 스타일: 오즈, 브레송, 드레이어>라는 책을 출간한 바 있다. <퍼스트 리폼드>는 로베르 브레송의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1950)와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의 <오데트>(1954)에서 받은 영향을, 자신이 각본을 쓴 마틴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1976)의 방식으로 풀어낸 것만 같은 작품이다. <퍼스트 리폼드>의 톨러를 보며 누군가는 어차피 버릴 일기를 왜 쓰냐고 물을지도 모르지만, 결국 죽을 것을 알고도 매 순간 살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의 본능과 비슷한 이치일 거다. 사회에 섞이기 위해서는 자신을 숨겨야 하는 순간이 존재하고, 일기가 아니면 솔직해질 수 없는 이도 존재한다. 톨러가 일기에 드러낸 솔직함을 일기장 대신 세상에 던졌다면 그의 삶은 <퍼스트 리폼드>의 엔딩과는 달라졌을까. 솔직함이 자신을 지키는 무기가 되기도 하지만 타인을 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매 순간 인간을 시험에 들게 만든다.

 

찰리 카우프만 <이제 그만 끝낼까 해>

‘제이크’(제시 플레먼스)는 여자친구(제시 버클리)와 함께 자신의 부모님을 만나러 간다. 제이크의 아버지(데이빗 듈리스)와 어머니(토니 콜렛)는 제이크와 여자친구를 반기지만, 제이크의 표정을 그리 밝지 않다. 여자친구는 밤에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지만, 제이크는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눈은 점점 더 많이 내린다.

세상에는 다양한 각본가가 존재하고 각자의 창의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이야기꾼이 있으니 바로 찰리 카우프만이다. 스파이크 존즈가 연출을 맡은 <존 말코비치 되기>(1999)와 <어댑테이션>(2002)에 참여해 압도적인 상상력으로 주목을 받고, 미셸 공드리가 연출을 맡은 <이터널 선샤인>(2004)은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많은 관객들의 인생 영화가 되었다. 이후 감독으로서 보여준 <시네도키, 뉴욕>(2007)과 <아노말리사>(2015)의 독특한 스타일은 <이제 그만 끝낼까 해>(2020)에서 더욱 극대화된다.

<이제 그만 끝낼까 해>는 이언 리드가 쓴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이터널 선샤인>의 각본으로 찰리 카우프만을 기억하는 관객들이라면, 그의 각본이 낭만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사실 그의 이야기는 주로 분열에 대한 이야기이다. 각본을 쓴 <이터널 선샤인>에서는 사랑의 기억을 지우는 병원이 나오고,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는 다른 배우의 머리 속으로 들어가는 이들이 등장한다. 특히나 연출작에서는 이러한 성향이 도드라지는데, 데뷔작 <시네도키, 뉴욕> 속 연극 연출가가 자신의 삶을 연극으로 올리는 과정에서 자신을 연기하는 배우가 마치 자신인 것처럼 굴면서 삶에 개입한다. <이제 그만 끝낼까 해>는 여러 인물이 등장하지만 대부분은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이제 그만 끝낼까 해>는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작품인데, 살면서 언제 ‘이제 그만 끝낼까 해’라고 말해 본 적 있는가에 따라 감상이 많이 달라질 영화다. 돌아보면 찰리 카우프만의 각본 속 모든 인물들은 늘 말해왔다. 의문을 품으면서도 결국 지속하게 되는 일 앞에서 ‘이제 그만 끝낼까 해’라고.

 

아론 소킨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

1968년의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반전시위는 경찰과 대치하면서 폭력시위로 이어지고, 시위를 주도한 이들은 기소된다. 민주사회학생회의 ‘톰 헤이든’(에디 레드메인), 청년국제당의 ‘애비 호프만’(사샤 바론 코헨) 등 7명과 흑표당의 ‘바비 실’(야히아 압둘 마틴 2세)이 법정에 서고, 변호사 ‘윌리엄 컨슬러’(마크 라이런스)가 이들을 변호한다. 사건 담당 검사 ‘리처드 슐츠’(조셉 고든 레빗)은 재판 승리를 위해 증인을 불리는 가운데 전국적으로 재판에 대한 관심이 커진다.

관객들이 감독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경우는 흔하지만, 각본가의 이름을 기억하는 일은 흔치 않다. 아론 소킨은 각본가로 활동했을 당시부터 이미 감독 이상의 주목을 받아왔다. 롭 라이너 감독의 <어 퓨 굿 맨>(1992)으로 각본가 데뷔와 동시에 흥행에도 성공하며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데이빗 핀처 감독의 <소셜 네트워크>(2010)로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색상을 받았다.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건 드라마 <웨스트 윙>(1999)과 <뉴스룸>(2012)의 각본 집필이었지만, 영화 <머니볼>(2011), <스티브 잡스>(2015) 등의 각본을 쓴 이후 <몰리스 게임>(2017)으로 감독 데뷔를 하며 무게 중심을 각본에서 연출로 옮기고 있다. 각본가의 인상이 강한 그가 연출력으로 인정받은 작품이 바로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2020)이다.

아론 소킨은 인물들의 대화만으로 긴장감을 만드는 데 있어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다. 데뷔작 <어 퓨 굿맨>을 비롯해 그가 각본으로 참여한 작품에 법정을 무대로 한 장면이 많은 것도 이러한 특징을 반영한 거라고 볼 수 있다.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은 굳이 인물에 대해 설명하지 않아도 대사를 나누는 장면에서 인물의 특징이 드러나고, 이는 많은 각본가들이 원하지만 쉽게 달성하기 어려운 경지다. 아론 소킨의 각본을 찾게 되는 건 결국 그가 그려낸 인물들과 그들의 대사를 보기 위해서인데, 영화에서 인물 구축과 대사가 얼마나 큰 비중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명백하다. 좋은 이야기꾼은 좋은 영화감독이 될 수 있는가? 아론 소킨은 이 질문에 대한 가장 훌륭한 예시 답변이 되어가는 중이다.

 

오드리 디완 <레벤느망>

‘안’(아나마리아 바토로메이)은 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으로, 공부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학교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생리가 멈춘 후로 혹시 임신한 게 아닐까 걱정하게 되고, 병원에 다녀온 뒤로 임신 사실을 알게 된다. 1963년의 프랑스는 낙태가 불법이기에, 안은 고민한다. 출산을 할 것인가 아이를 낳지 않을 방법을 찾을 것인가? 고민하던 안은 선택을 위해 여러 방법을 시도한다.

오드리 디완은 <해커스>(2012), <프렌치 커넥션: 마약수사>(2014), <철의 심장을 가진 남자>(2017), <아미-아미>(2017)의 각본을 쓴 각본가로, <루징 잇>(2019)로 감독 데뷔 후 두 번째 연출작인 <레벤느망>을 통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는다. <레벤느망>은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 에세이를 원작으로 한 영화로, 실제로 오드리 디완은 각색 작업을 하는 동안 원작자인 아니 에르노와 각본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알려졌다.

<레벤느망>는 관객으로 하여금 사유하기에 앞서 육체적으로 먼저 느끼게 만든다. 핸드헬드 촬영을 통해 임신 기간이 길어질수록 불안해지는 안의 움직임을 보여주고, 클로즈업을 통해 온전히 혼자서 모든 걸 짊어질 수밖에 없는 안의 표정을 보여준다. 3주 차부터 시작해서 중간중간 임신 기간을 알려주는 자막은 선택을 앞두고 더욱 무섭게 다가오는 시간을 체험하게 만든다. <레벤느망>이란 제목은 프랑스어로 ‘사건’을 뜻한다. <레벤느망>은 원작자 아니 에르노가 실제로 겪었던 일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에겐 안이 겪은 일은 영화가 아니라 실제 사건이다. 베니스국제영화제가 <레벤느망>에게 황금사자상을 준 건, 영화를 통해 우리가 반드시 직면해야 할 ‘사건’이 등장하기 때문이 아닐까.

 

Writer

에세이 <나만 이러고 사는 건 아니겠지>, <달리다 보면> 저자. 좋아하는 건 영화, 여행, 음악, 문학, 음식. 특기는 편식. 꾸준한 편식의 결과물을 취향이라고 부르는 중. 취향을 바탕으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김승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