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현대문학을 다루는 저명한 문예지 <그랜타>는 10년에 한 번 영국을 책임질 20인의 신진 작가를 꼽는 것으로 유명하다. 놀랍게도 1983년 리스트에는 가즈오 이시구로, 줄리언 반스, 이언 매큐언이 모두 들어가 있었다. 잡지의 선견지명에 부응하듯 이들은 현재까지도 영국 문학하면 떠오르는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들이 쓴 수많은 히트작이 전 세계의 문학상을 휩쓸고 스테디셀러 리스트를 차지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세 작가를 일컬어 영국 현대 문학의 황금세대라 칭한다. 이들은 공통으로 지성과 유머를 겸비했으며 시대의 고민거리를 날카롭게 추궁하는 솜씨로 정평이 나 있다. 무엇보다 셰익스피어와 디킨스를 배출한 영국 시민들이 자부심을 가질만한 높은 수준의 지적 사유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오늘은 영국 문학의 대표 작가로 불리는 세 작가의 대표작을 소개하려고 한다.

 

줄리언 반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지적인 사유로 가득 찬 소설을 써내는 작가 줄리언 반스의 작품 중 가장 쉽고 재미있게 읽히는 소설이다. 소설의 재미와 깊이를 동시에 느끼고 싶을 때 읽기를 자신 있게 권하는 책이다. 소설은 묘비명에 "끝까지 감을 못 잡고 떠난다"라고 적어야 할 만큼 둔한, 아니 그만큼 평범한 '토니'를 화자로 한다.

토니의 고등학교 시절, 새로 전학하러 온 '에이드리언'은 역사 수업 시간에 헨리 8세의 치적에 관한 내용에 답을 하며 라그랑주라는 학자를 인용한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입니다. 선생님." 그를 넋 놓고 바라보던 토니는 경애하는 마음을 가득 품고 에이드리언과 친구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토니는 대학 시절 막 사귄 여자 친구 '베로니카'의 부모님 댁을 일주일간 방문하는데, 거기서 꽤 기묘한 경험을 한다. 딸에게 너무 헌신하지 말라고 종용하는 어머니, 상스럽게 토니를 업신여기는 아버지, 시답잖은 농담을 던지면서 토니를 놀리는 오빠 잭까지. 거기다 점입가경으로 도통 영문을 알 수 없는 말로 토니를 헷갈리게 하는 베로니카도 영 이상하다. 이후로 사사건건 잘 맞지 않던 두 사람은 얼마 못 가 헤어지기로 한다. 토니의 친구 에이드리언이 베로니카와 사귀면서 친구와 연인을 모두 잃는 경험을 한다. 순간적으로 화가 난 토니는 악담을 퍼붓는 편지를 보내고 자기 삶에서 두 사람을 지워버린다. 그리고 사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건 이제 환갑이 훌쩍 넘은 토니에게 잊고 지내던 학창 시절을 소환하는 편지가 당도하고부터다. 베로니카의 엄마가 에이드리언의 일기장과 소정의 유산을 토니에게 남긴 것이다. 그리고 베로니카는 어머니의 유산인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토니에게 주지 않고 태워버렸다고 통보한다. 오기가 생긴 토니는 베로니카에게서 감춰진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연락을 취하기 시작한다. 첫사랑과 다시 조우한 노년의 토니는 긴 시간 잊고 지냈던 베로니카에게서 회한이라고 불러야 마땅한 애처로움을 느낀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학창 시절의 우정과 연애가 뒤늦은 깨달음과 후회 그리고 끝내 무력한 기운으로 다가오는 작품이다. 평균치의 인생을 살았던 토니의 삶은 과연 온전했을까. 사람의 자기기만은 얼마나 한 사람의 기억을 뒤트는가. 토니는 사건이 벌어지고 까마득히 긴 시간이 지나서야 자신이 베로니카의 불행과 에이드리언의 자살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음을 깨닫는다. 나무랄 데 없다고 자평하던 평범했던 제 삶에도 죄의식의 축적이 있었음을 회한에 젖어 되돌아본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보이>에는 "모래알이든 바윗덩어리든 물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라는 대사가 있다. 섣부르고 경솔한 말 한마디가 미치는 파급력은 그것이 비록 모래알이라도 간과할 수 없다. 소설은 묻는다. 무지도 죄일까. 둔한 것도 용서받을 수 있을까. 당신이라고 토니의 입장이라면 다른 수가 있었을까. 우연이 정확히 과녁을 관통했을 때 활시위를 놓은 이에게 모든 책임을 돌릴 수 있을까. 토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그에겐 구제가 불능한 비루한 여생이 있을 뿐이다.

 

이언 매큐언 <칠드런 액트>

작가 이언 매큐언은 911 테러 사건이 발생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 <가디언>에 이런 논평을 남겼다. “비행기 납치범들이 상상력을 발휘하여 승객들의 생각과 느낌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면, 이런 일을 계획했더라도 끝까지 진행하진 못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할까, 어떻게 느낄까 상상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이며, 동정과 연민의 핵심이고, 도덕성의 시작이다.” 난 요즘도 이언 매큐언의 소설을 읽을 때 이 말을 떠올리곤 한다. 다른 사람이 되어 본다는 것이 어쩌면 그의 문학이 가진 요체가 아닌지 늘 생각하는 것이다. 그의 소설에는 이해할 수 없는 짓을 벌이는 인간이 있지만, 소설을 다 덮고 나서는 그가 지녔을 시공간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마치 모든 이에게 일류 변호사를 붙여주려는 것처럼 고단한 이해의 과정을 거쳐낸다. 말의 미묘한 뉘앙스에 섞인 진심과 창밖 공기의 무거움까지 다 담아내려는 집요한 문장이 인상적이다. 머리와 가슴을 동시에 지닌 작가라는 찬사가 퍽 어울린다.

“자신이 잃은 것은 사랑이라기보다는 현대식의 체면은 아닌지. 두려워하는 것은 플로베르와 톨스토이의 소설에 나오는 경멸이나 배척이 아니라 그저 동정은 아닌지. 모두가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사회적 죽음과 다를 바 없다.”<칠드런 액트>라는 위 문장처럼 남편의 의도에 절망한 '피오나'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사랑했던 짝과 이별하는 것 외에도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의식하며 고통을 받는 피오나의 속내는 복잡하다. 타인의 경멸과 배척보다 동정과 연민을 두려워하는 판사라는 사회적 지위도 피오나에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섹스와 소통이 부재한 결혼 생활을 남들 앞에서는 감춰야 하고, 누구에게도 쉽게 고충을 터놓을 수도 없는 피오나는 고독하다.

결혼은 사랑하면 지속하고 사랑이 식으면 갈라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오직 두 사람의 문제가 아니기에 무거운 책임의 사슬이 피오나를 압박한다. 타인의 고통스러운 가정사를 판결해야만 하는 판사의 역량도 자신의 문제에서만큼은 냉정해질 수 없다. 그래서 피오나는 외도를 끝내고 돌아온 남편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남편 잭이 없을 때 홀가분함을 느꼈던 자신을 돌이켜보며 고민한다. “자신이 잭의 귀환에서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깨달았다. 정말 단순했다. 그건 실망이었다. 남편이 조금만 더 오래 나가 있었으면 했던 마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단지 실망.” 피오나는 남편이 집을 나가서 돌아오기 전까지 온전히 혼자가 되었던 자신을 돌아본다. 물론 속이 상했지만, 과거에 자신이 뭘 꿈꾸던 사람이었는지, 어떤 가능성을 남기고 커리어에 투신했는지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에 잭이 돌아오자, 지난 30년의 결혼 생활의 지리멸렬한 패턴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데 실망감을 느낀 것이다. 새로운 삶의 가능성은 다시 닫혀버렸다. 지역의 지식인이자 유지로서 타인에게 모범이 되어야만 하는 판사 피오나로 복귀했다.

이때 피오나의 결정과 삶의 방향을 흐트러뜨려 놓은 사건이 발생한다.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단체에 소속된 소년 '애덤'은 종교적인 이유로 치료에 꼭 필요한 수혈을 거부한다. 영국의 소년법은 18세 이전의 아이는 저 스스로 치료 여부를 결정할 수 없도록 한다. 담당 판사인 피오나는 이 답 없는 문제에 논리적인 무결함은 물론 대중의 감정까지 고려한 답을 내놓아야 한다. 피오나는 고심 끝에 이례적으로 소년이 머무는 병원으로 가서 그를 인터뷰하기로 한다. 자신이 직접 소년의 말을 들어보고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피오나는 소년을 방문한 후에 수혈을 강제 집행한다. 개인의 종교적 신념을 존중하는 것이 법리지만 아직 소년의 나이이기 때문에 아무리 총명한 아이라 할지라도 판사의 권한을 발휘하여 생명을 부여하기로 한 것이다. 피오나의 판결로 죽다 살아난 애덤은 피오나에게 여러 번에 걸쳐 편지를 보낸다. 하지만 피오나는 애덤이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는 짤막한 보고에 안심하고 답을 하지 않는다. 결국 애덤은 피오나를 보기 위해서 피오나의 출장지인 뉴캐슬까지 따라붙는다. 어느 비 오는 날 지역 인사들과 식사하던 피오나는 소년이 찾아왔다는 말을 듣는다. 비에 흠뻑 젖은 소년에게 피오나는 묻는다. "내게 원하는 게 뭐니." 소년은 되묻는다. "그럼 판사님은 제게 뭘 원하셔서 병원에 오셨는데요." 피오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서둘러 그를 집으로 돌려보낸다.

<칠드런 액트>는 누구 보더라도 성공적인 삶을 산 지식인이 윤리적 딜레마에 부딪히는 장면을 응시하는 소설이다. 누구에게나 옳은 삶의 방식이 있다고 믿어야 하는 판사라는 존재는 법이라는 잣대로 생과 사를 갈라내야만 한다. 하지만 판결에 복종해야 하는 소년은 성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누군가가 자기 삶을 좌지우지하는 것에 큰 혼란을 느낀다. 그렇다면 한 개인은 개인에게 얼마만큼의 책임이 있을까. 삶이라는 것이 누구에게나 지속하기를 권한만큼 가치가 있는 것일까. 피오나의 결혼 생활은 과연 지속할만한 것인가. 피오나는 흘러나오는 울음을 멈추지 못하고 소년과의 지난날을 회상한다.

 

나를 보내지 마, 가즈오 이시구로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몰라도 영화 <네버 렛 미 고>와 <남아있는 나날>을 아는 분들은 꽤 많을 것이다. 두 영화 모두 뛰어난 작품성으로 두터운 팬을 보유한 작품이다.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이 작품들의 원작자로 왕성한 집필 공로를 인정받아 89년 부커상과 1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세월이 꽤 흐른 지금도 인터넷 서점 스테디셀러 목록 상단에는 두 작품이 끈질기게 버티고 서 있다. 그건 아마도 뛰어난 작품성과 시대성을 잃지 않은 이야기꾼으로서의 그의 능력 때문일 것이다. <나를 보내지 마>는 그가 쓴 작품 중에서도 SF에서나 다룰 법한 소재를 통해 인간의 본성을 파헤친 작품으로 남다른 인기를 자랑한다.

<나를 보내지 마>는 인간의 의료적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클론들이 성인이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여느 시골 학교와도 같이 평온해 보이지만 외부와의 접촉이 일절 차단된 가상의 섬 ‘헤일셤’에서 클론들을 양성한다. 어느 날 클론들의 담임인 '루스' 선생은 학생들에게, 그들의 운명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알린다. 클론들 입장에서는 병든 인간의 장기 이식을 위해 자신이 복제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순간이다. 루스 선생의 충격 발언으로 아이들은 자신들의 존재적 박탈감에 시달린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소설의 중반까지 읽다 보면 성인이 되어 헤일셤을 떠나는 클론들을 따라나서게 된다.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낯선 섬에 정착한 클론들은 기증을 위한 지난한 기다림을 견뎌야 한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위해 멀쩡한 신체를 떼줘야 할 판이니, 신이 날 리 없다. 여생을 다른 도시로 이동할 수도 없고, 오직 생식 없는 섹스를 하며 여러 해를 보내야 할 처지다. 그중 누구는 몰래 술을 찾아 마시고, 누구는 여행에 목을 맨다. 그리고 어김없이 소설의 주인공 '캐시'는 문학에 빠져든다. 캐시는 시한부의 인생을 받아 들고도 문학을 통해 상상의 나래를 펼쳐나간다. 잡지를 보며 자신을 탄생시킨 '원본'을 상상하길 즐긴다. 채광 좋은 사무실에 앉아 클론이 아닌 진짜 삶을 사는 자신을 글로 적어본다. 정원을 아름답게 꾸민 영국식 저택에 사는 삶은 어떨까. 창문 밖으로 도시락통을 들고 가는 여인의 삶은 나와 비슷할까.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면 캐시는 클론에도 영혼이 있다는 걸 증명하려고 나선다. 비록 복제된 신세지만 자신들도 여타 인간과 다를 게 없는 존엄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예술로 보여주고자 한다. 그가 쓴 글 친구 토미가 그린 그림이 증거로 쓰인다. 과학을 맹신하고 우러르는 것이 시대의 주류가 된 요즘이다. 과학이 삶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나설 때, 과거부터 우리가 지켜온 인간성을 지켜낼 수 있을까. 작가의 시선은 회의적이지만 그가 그려낸 디스토피아의 세계는 황량함 속에 아름다움이 있다. 여전히 예술의 힘을 믿는 인간이 존재하고, 현재 우리가 구축한 문명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 자문하는 작가가 존립하여 끝없이 의문을 제시할 것이기 때문이다.

 

커버사진 영화 <네버 렛 미 고> 스틸

 

Writer

영화와 책, 그리고 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쓴다. 지은 책으로는 <우리 각자 1인분의 시간>, <보내지 않을 편지>가 있다. 염세주의자가 되고 싶으나 하루 세끼 먹을 때마다 행복하다.
박민진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