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을 들고 다니며 실시간으로 얘기를 주고받는 일상이지만, 가끔 편지를 주고받는 경우도 있다. 특히 연인 사이에서 편지의 존재감은 더 두드러진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시대의 중간에 끼인 요즘 우리는 아직도 편지가 주는 물성에 애틋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쉬운 길이 있음에도 손으로 꾹꾹 눌러쓴 편지를 건넬 때 메시지 이상의 뭔가가 전달됨을 느낀다. 그래서인지 요즘도 가끔 손으로 쓴 쪽지를 건네거나 장문의 글을 우체국 소인까지 찍어서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시간을 들여 편지지를 고르고 얇고 단단한 펜으로 인용구까지 곁들여서 정성을 과시한다. 마음을 전하는 형식을 부러 더디게 해서 진심이라는 레테르를 붙이는 과정이다. 느리고 답답한 것을 혐오하는 도시에서 기꺼이 사랑이라는 단어에 눌러앉은 먼지를 털어내는 광경이다. 오늘은 편지글로 여전히 스테디셀러에 올라 사람들의 마음을 적시는 서한문학을 소개하고자 한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소설은 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난 직후 영국의 한 섬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지도를 펴보면 건지 섬은 영국과 프랑스의 딱 중간 지점에 있어 전쟁을 거치는 동안 독일군의 점령을 받았다. 소통 수단이 오직 편지뿐인 작은 마을에서 주민들은 심심한 섬 생활을 타개하기 위해 북클럽을 만들어서 활동한다. 독일군에게 발각되지 않으려고 은밀하게 책을 공수해 늦은 밤까지 대화를 나누는 그들의 클럽명은 '건지 감자껍질파이'다. 먹을 게 너무 없어서 감지 껍질로라도 파이를 만들어서 먹어야 하는 곤궁한 처지지만, 독서를 통한 마음의 양식만큼은 빼앗기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인 줄리엣은 우연한 기회에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의 존재를 알게 되고 취재차 건지 섬에 도착한다. 소설은 그들이 주고받는 편지로 이뤄지는데 여러 인물을 오가면서 건지 섬의 실상과 개개인의 사연, 문학을 향한 애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은 편지밖에 쓸 수 없는 시공간이라는 점에서 재기 발랄한 편지글이 자주 등장한다. 떡하니 공문서를 붙여 넣기도 하고, 단순히 정보 전달하기도 하며, 편지를 쓰다가 시시콜콜한 얘기를 물어보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다양한 인물과 다양한 목적의 편지들이 수시로 출몰하는데 그 사이사이 이어진 시간과 맥락을 틈을 추측하는 것도 큰 재미다. 편지 속에는 조심스럽게 피어나는 사랑이 있고, 전쟁으로 세상을 뜬 이들과 남겨진 가족들이 있으며, 다시 삶을 시작하려는 유럽 대륙의 희망찬 목소리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멤버들이 대화를 나누는 공간은 빛이 미약하고 공간은 협소하지만, 상상의 나래는 저 먼 유럽 대륙을 가로지른다. 비극이 삶에 침입하는 세계의 조건인 것처럼 느껴질 때, 문학은 어쩌면 그에 대응하는 인간의 태도이자 무기일지도 모른다. 문학은 억압받고 팍팍한 일상일수록 그 위력을 더해가기에 폐허가 된 그들의 삶이 소설과 편지로 촉촉하게 젖어가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더 나은 삶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A가 X에게>

미술평론가이자 소설가인 존 버거는 이렇게 적었다. "이렇듯 편지에는 여러 ‘나’와 ‘너’가 존재한다. 너를 알고 싶어 하는 내가 너에게 묻고, 네가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며 너에게 나를 전하던 시간." 이처럼 편지는 모든 것을 초월해서 너와 나만 남겨지는 자그마한 방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폭압적인 현실에 분리된 이들에게는 사유를 통해 서로를 느끼는 은밀한 시간을 선사한다.

소설에서 편지를 쓰는 두 주인공은 ‘사비에르’와 ‘아이다’다. 두 사람은 어려운 현실에 휩쓸려 서로를 보지 못하는 상황이지만, 편지로 저항의 정신을 공유하며 버텨나간다. 아이다는 약사로서 상처받은 사람을 돌보고, 사비에르는 감옥 안에 갇혀서도 사회 현안에 대한 통찰을 거듭한다. 사비에르는 마치 아이다에게 호소하듯 자신이 처한 상황과 불평등한 세계의 현실을 잊지 않겠다는 투쟁심을 기록으로 남긴다. 더 나아가서 연인을 향한 한결같은 마음이 세상을 향한 자유의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밝힌다. 프란츠 파농, 마르코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우고 차베스, 에보 모랄레스 등 세상을 위해 투쟁하는 이들을 편지 귀퉁이에 메모하듯 남긴 걸 보는 것도 그의 사랑과 자유를 향한 의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수단이다. 그에 반해 아이다는 공감과 소통 그리고 치유의 중요성을 상기하는 에피소드를 꺼내 들며 인간성과 애정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문장마다 주저함과 안타까움, 더딘 호흡과 두근거리는 가슴이 고스란히 담긴다. 이처럼 는 서한문의 매력을 십분 활용해서 독자가 두 사람의 사이에서 마음의 진자운동을 할 수 있도록 이끈다.

아이다와 사비에르의 편지는 절제된 문장이지만 침묵의 아우성이 들리는 듯하다. 그들이 서로를 그리워하는 마음, 치열한 투쟁, 두려움, 불안, 낙관 등이 고요한 편지지 안에 포개어져 있다. 사랑하는 이를 만날 수 없고 현실이 참혹할 때 편지 한 장이 주는 위로는 얼마만큼일까. 서한문학은 낭독의 텍스트라고 한다. 구어체로 쓰인 이 소설만큼 낭독에 잘 어울리는 작품도 없을 것이다.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쓰인 글이 지닌 힘이다. 응답이 없을까 봐 조바심 내기도 하며, 마음을 숨긴 채 펜에 힘을 주기도 한다. 어느 순간 침묵이 찾아오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절실히 쓴다.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는 편지글이라면 왠지 남의 속내를 엿보는 불편함과 낯간지러운 유치함을 지닌 장르라는 오해를 풀어주는 책이다. 편지가 가질 수 있는 형식적인 자유로움과 구어체의 날렵함을 활용해 낡은 매체라는 선입관도 깨어낸다. 서한문이 지닌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채팅 용어와 신조어를 간간이 섞어서 동시대성을 살리는데 뛰어난 감각을 발휘한다. 거기에다 서로를 들었다가 놨다 하면서 진지함과 유머를 오가는 솜씨 좋은 두 작가 덕분에 다채로운 이야기가 우러나온다.

남궁인과 이슬아는 같은 점이라고는 글을 쓴다는 것 외에는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다. 그만큼 서로에게 씌워진 편견과 오해가 팽배해서 보는 재미가 있다. 예의 바르게 상대를 추켜세우고 고분고분 응하는 것보다는 과감히 의례를 생략하고 본론에 뛰어든다. 다소 신변잡기로 흐르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사회생활의 고충과 세상의 편견, 인간관계의 힘겨움에 다다르면 이야기는 우리의 보편적인 주제로 흐른다. 세상 힙해보이는 이슬아 작가와 고루한 이미지의 의사처럼 보이는 남궁인이 사실 비슷한 고민 속에서 서로의 다름을 이해할 때 빚어지는 묘한 감동이 있다. 계급과 성별, 나이와 경력에 따라 서로의 차이를 의식하기 바쁜 세상에서 어떻게든 합의점을 찾아가려는 노력은 우리가 삶을 살아갈 때 느끼는 고충과 크게 멀지 않기 때문이다.

젊고 기운찬 편지라서 그런지 상대를 향한 궁금증보다는 제 생각을 표출하는 걸 우선시하는 편지라는 점이 새롭다. 내 의견을 제시하면 상대는 질문을 듣지 않아도 그에 해당하는 관련 의견을 보충하거나 반론을 제시하면서 마치 토론하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홍보 문구로 쓰인 “닷새 안에 답장이 없으면 절교하자는 뜻인 줄로 알겠습니다.”라는 문장이 곁들여지면서 유쾌한 공격성과 긴장감을 자아낸다. 각자 주관이 무척이나 뚜렷한 두 작가는 편지를 통한 일종의 팽팽한 기싸움을 벌이는데, 간혹 가다 타협에 이르러서 힘을 보태기도 한다. 이처럼 밀고 당기기로 리듬을 만들어내는 와중에도 두 사람의 사상이 고스란히 드러나서 자신의 얘기를 통해 상대에게 애정을 드러내는 방식에 관해 생각하게끔 한다. 그것은 어쩌면 내 모든 말을 상대가 기꺼이 들어줄 것이라는 믿음에 기반한 자기중심주의일지도 모르겠다.

 

 

Writer

영화와 책, 그리고 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쓴다. 지은 책으로는 <우리 각자 1인분의 시간>, <보내지 않을 편지>가 있다. 염세주의자가 되고 싶으나 하루 세끼 먹을 때마다 행복하다.
박민진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