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에 디즈니 스튜디오에서 각본 일로 경력을 시작한 맨골드는, '밀로스 포먼' 감독 영화에 스텝으로 참여하면서 영화 연출을 접했다. 국내 관객에게 무엇보다 그의 이름을 각인시킨 작품은 위노라 라이더의 청순한 매력이 돋보인 <처음 만나는 자유>다. 그 이후로 맨골드는 흥미로운 필모그래피를 쌓아나갔다. 액션, 히어로물, 서부극, 공포, 추리, 블록버스터, 통속극, 레이싱, 뮤지컬,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까지 못 하는 게 없는 만능 재주꾼임을 보여줬다. 무엇보다 어느 나라보다 휴머니즘을 중요시하는 국내 관객에게 감동과 스릴를 동시에 선사하는 대작 영화로 큰 사랑을 받아왔다. 오늘은 다채로운 매력을 가진 제임스 맨골드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보자.

 

<포드 앤 페라리>(2019)

<포드 v 페라리>는 제목처럼 미국의 포드사와 이탈리아의 페라리사가 맞붙은 프랑스의 르망 24시 레이스 대회를 배경으로 한다. 이미지상으로는 무조건 스포츠카의 명가인 페라리가 고작 컨베이어 벨트에서 서민용 차를 만드는 포드를 압도했을 것 같지만, 의외로 몇 차례 승부가 뒤집힌 적도 있었다. <포드 v 페라리>는 바로 포드사가 페라리를 뒤집은 기적과 같은 사건을 따라나선다.

미국 스포츠카 전문가인 '캐럴 셸비'는 '르망24'에서 승리할 수 있는 차를 만들어달라는 포드사의 의뢰를 받는다. 그는 최신 트렌드에 입각한 레이싱카 디자인을 추진함과 동시에 신차를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전문 드라이버를 수소문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찾아낸 자가 '켄 마일스'다. 실력은 최고지만 늘 돌발적인 행동으로 모두를 곤란하게 하는 작자다. 그를 만난 고고한 포드사의 중역들은 대놓고 켄을 무시해 버리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며 프로젝트를 망치려고 든다. 양측 사이에서 중재하던 캐럴은 점차 켄과 우정을 쌓아가면서 오직 승리만을 위해 힘을 모으기 시작한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레이싱의 쾌감에 집중하기보다는 완고한 대기업인 포드사를 설득하고 바꿔서 성공적인 대회를 치러낸 두 남자의 앙상블에 기대고 있다. 대회를 목전에 두고 의견 차이를 보이면 대판 싸우다가도 틀을 깨는 혁신적인 결단에서는 힘을 합치는 둘의 우정과 도전이 영화의 큰 매력이다. 관료주의의 벽을 뚫어내는 영웅적인 캐릭터들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히어로물이자 버디무비로 볼 수 있다. 영화는 후반부에 카체이스 액션의 진수를 보여주는 하이라이트 시퀀스가 있지만 두 배우의 현란한 연기력만큼 화려하진 않다. 관객과 오랜 세월 신뢰를 쌓은 맷 데이먼과 크리스천 베일이라는 두 거물 배우의 힘이 돋보인다.

 

<아이덴티티>(2003)

어두컴컴한 데다가 인적도 없는 무서운 네바다주의 외딴 마을에 딱 봐도 으스스한 모텔이 있다. 폭풍우가 치는 험한 날씨라서 그런지 머물 곳을 찾던 열 명의 손님이 모텔에 들이닥친다. 나이 든 부부와 딱 봐도 까탈스러운 여배우와 매니저, 지역 경관과 그가 잡은 살인범, 깨가 쏟아지는 신혼부부는 물론이고 매춘부까지 등장한다. 본격적인 사건은 여배우가 살해당하면서 시작한다. 이어서 수갑을 찼던 살인범이 도주한 게 밝혀지고 나머지 인원들은 패닉에 빠진다. 희생자가 점점 더 늘어나고 사체의 옷가지에서는 방 번호가 적힌 열쇠가 나와서 본격 추리물의 서막을 알린다.

영화는 대놓고 관객을 속이려고 달려든다. 마치 퀴즈를 내듯 단서를 하나씩 던져주면서 흥미를 유도하는 방식이다. 고전적인 연출이지만 누구나 마음 놓고 빠져들 수 있는 긴장감 넘치는 환경을 제공한다. 영화 도입부에 나오는 시구를 보자. “내가 계단을 올라갔을 때 그 남자를 만났다.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이는 영화가 논리적인 귀결로 끝나지만은 않을 것을 보여주는 선언과 같은 문장이다. 관객은 머리를 짜내서 사태를 파악하려고 할 테지만, 비 오는 날의 어둠은 쉽사리 관객을 혼돈에서 구해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

영화는 모텔에 있는 모든 인물에게 저마다의 알리바이와 혐의점을 부여하면서 의심을 유도한다. 인물 간의 갈등이 팽배해지고 서로를 공격하는 상황을 만들어놓고 관객을 옥죄어 온다. 모텔이라는 공간이 지닌 작은 방들과 계단과 복도의 구석이 숨 막힐듯한 폐소 공포증을 불러오다가 거실 공간을 활용해서 인물들이 모두 모일 수 있는 무대로 쓰기도 한다. 대사는 다분히 연극적이고 마지막의 극적인 반전은 확실하게 기존의 정보들을 뒤엎는다. 공포와 추리라는 장르의 재미를 확실하게 보장하는 영화다.

<아이덴티티> 역시 <포드 v 페라리>처럼 배우들의 호연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존 쿠색이 기존 이미지를 탈피한 무게감 있는 형사 역할을 맡았고, 경찰관을 연기한 레이 리오타나 매춘부를 연기한 아만다 피트는 관록의 배우답게 서스펜스를 자아내는 데 크게 일조한다.

 

<로건>(2017)

엑스맨으로 활동하다가 쇠약해진 '울버린'은 자신의 본명 '로건'을 내걸고 작별 인사를 건네 온다. 그것도 너무나 연약하고 인간적이라서 눈물이 다 날 만큼 애틋한 목소리였다. 돌연변이의 운명으로 달리는 차에 올라타서 닥치는 대로 부수고 찢어 놓으며 지구를 지켰던 울버린의 모습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로건은 이제 다음 세대를 걱정하고 자신의 노후까지 생각해야 하는 노쇠한 인간일 뿐이다.

때는 2029년 더는 돌연변이가 태어나지 않는 근미래다. 엑스맨 역시 인재가 없어서 더는 조직을 유지하지 못한다. 무엇보다 조직의 중심인 찰스 교수가 병에 걸려서 회복하지 못할 것 같다. 이제 실버타운을 생각해야 할 만큼 기력이 떨어진 로건은 은신처에서 요양 중인 찰스 교수를 모시고 한다. 돈도 없는지 멕시코 국경지대에서 지내는 두 사람의 모습은 세월의 무상함을 절로 느끼게 한다. 과거의 영광은 고사하고 생계를 이어 나가기 위해 로건은 시내에서 리무진 기사를 하며 찰스와 함께 미국을 떠날 계획을 세운다. 그러던 어느 날 이름 모를 여자가 로건을 찾아온다. 자신이 돌연변이로 태어난 '로라'라는 아이를 데리고 있는데, 부디 아이를 캐나다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만 하고 사라진다. 로건은 결국 중병에 걸린 노인인 찰스도 챙기고 말도 안 듣는 여자아이까지 무사히 데리고 다녀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로건>은 히어로 액션물이라기보다는 눈물겨운 신파 드라마에 가깝다.

영화는 절로 한숨이 나오는 쓸쓸한 정서를 자랑한다.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피로감은 희뿌연 화면에 배어난다. 다리를 질질 끌며 등장하는 울버린은 마치 노쇠한 짐승처럼 보일 따름이다. 동시에 이제껏 선보인 울버린 중에 가장 인간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 제임스 맨골드 감독은 서부극의 구조를 차용해서 울버린을 클린트 이스트우드에 버금가는 쇠락한 영웅으로 만들어냈다. 거기에 피칠갑이 난무하는 잔혹한 격투신을 집어넣어서 몰락하는 영웅의 나락에 처절함을 더했다. 오랜 시간 엑스맨과 울버린에게 정을 준 팬들에게 보답하는 뭉클하고 애달픈 작별 인사다.

 

Writer

영화와 책, 그리고 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쓴다. 지은 책으로는 <우리 각자 1인분의 시간>, <보내지 않을 편지>가 있다. 염세주의자가 되고 싶으나 하루 세끼 먹을 때마다 행복하다.
박민진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