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의 드라마 <블랙미러> 시즌1의 첫 번째 에피소드 '공주와 돼지'는 영국 공주의 납치를 중계하며 시작한다. 납치범은 영국 수상에게 TV 생중계로 돼지와 수간할 것을 요구하고, 이때 범인이 요구하는 촬영 조건을 보며 시민 중 누군가는 '도그마 95 선언' 같다고 말한다. 도그마 선언은 1995년에 4명의 감독이 그들의 영화 신념을 담아 발표한 선언으로, 촬영은 소품과 세트 없이 로케이션으로 할 것, 카메라 촬영은 반드시 ‘핸드 헬드’일 것, 컬러 필름을 사용하고 특수 조명은 허용하지 않을 것 등의 원칙이 담겨있다. 이 선언문을 작성한 네 명은 차례로 도그마에 입각한 영화를 만들었고, <백치들>의 라스 폰 트리에, <셀레브레이션>의 토마스 빈터베르그, <미후네>의 소렌 카우-야콥슨, <왕은 살아있다>의 크리스티안 레브링이 그 주인공들이다. 그리고 이들의 국적은 덴마크다. 

덴마크에서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가 레고인데, 덴마크 영화는 레고로 만든 세계만큼 창의적이다. 덴마크의 영화 시장은 그리 크지 않지만, 덴마크는 영화사에서 늘 주목받아온 나라이고, 많은 명감독을 배출했다. 도그마의 주역이었던 라스 폰 트리에와 토마스 빈터베르그는 도그마 선언 이후로 지금까지도 덴마크를 대표하는 영화인들이다. <잔 다르크의 수난>(1928), <오데트>(1954)를 만든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는 영화사에서 반드시 언급되는 거장이고, <정복자 펠레>(1987)와 <최선의 의도>(1992)로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두 번 받은 빌 어거스트를 비롯해서 많은 덴마크 출신 감독이 여전히 활발히 활동 중이다. 레고로 만든 세계보다 더 창의적인 덴마크 영화들을 살펴보자.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오데트>

보겐 농장의 ‘모튼 보겐’(헨릭 말버그)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다. 첫째 ‘미켈’(에밀 하스 크리스텐센)은 아내 ‘잉거’(버짓 페더스피엘)의 출산을 앞두고 있고, 둘째 ‘요하네스’(프레벤 레어도르프 라이)는 자신이 예수라고 주장한다. 셋째 ‘안더스’(케이 크리스티안센)은 아버지와 종교적으로 다른 입장을 가진 재단사 ‘피터’(에이너 페더스피엘)의 딸 ‘안느’(게르다 닐슨)와 결혼을 원한다. 모튼은 피터에게 자식들의 결혼 관련 입장을 밝히러 찾아가고, 잉거가 곧 출산할 것 같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는 덴마크 영화를 말할 때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할 감독으로, 덴마크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기준으로 보아도 첫 손에 꼽히는 거장이다. <오데트>(1954)는 카이 뭉크의 희곡 ‘말씀’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제목인 ‘Ordet’는 덴마크어로 ‘말(The Word)’을 뜻한다.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작품으로, <잔 다르크의 수난>(1928)과 함께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의 가장 널리 알려진 영화다.

<오데트>는 믿음에 대한 영화다. 보겐의 집안에서는 목사의 말은 따르지만, 자신이 예수라고 주장하는 요하네스의 말은 믿지 않는다. 모두 요하네스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할 뿐이다. 믿음에는 답이 없지만 세상은 믿음을 규격화한다. 1954년에 나온 <오데트> 속 세상과 2022년의 세상 모두 믿음을 사용하는 방법에 있어서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을 뿐이다. 믿음이 핑계처럼 사용되고, 실체 없이 그럴듯한 말들만 떠돈다.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가 2022년의 세상에 제목을 짓게 된다면 과거와 똑같이 ‘오데트’라고 답하지 않을까?

 

빌 어거스트, <정복자 펠레>

스웨덴에서 온 ‘라세’(막스 폰 시도우)와 그의 어린 아들 ‘펠레’(펠레 베네가아르드)는 일자리를 찾아 덴마크로 떠난다. 정착해서 편하게 사는 삶을 꿈꾸지만, 열악한 환경의 농장에서 힘들게 일하기 바쁘다. 농장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주장을 당당히 말하는 ‘에릭’(비욘 그라나스)은 펠레에게 몇 년 뒤에 눈이 녹으면 함께 세상을 정복하러 멀리 떠나자고 말한다. 펠레는 에릭의 말에 희망을 품고 언젠가 농장을 떠나 멀리 갈 날을 기대하지만, 라세는 자신과 재혼할 사람을 찾아 이곳에서 정착하는 삶을 꿈꾼다.

국내에서는 <리스본행 야간열차>(2013)로 알려진 빌 어거스트는 <정복자 펠레>(1987)와 <최선의 의도>(1992)로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두 번 받은 감독이다. 이 중 <최선의 의도>는 스웨덴의 거장 잉마르 베리만의 각본을 빌 어거스트가 연출한 작품이다. <정복자 펠레>(1987)는 덴마크의 작가 마르틴 안데르센 넥쇠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로,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을 받은 4편의 덴마크 영화(<바베트의 만찬>(1987), <정복자 펠레>(1987), <인 어 베러 월드>(2010), <어나더 라운드>(2020)) 중 하나다

라세와 펠레 부자가 바라본 현실은 냉혹하다. 두 사람의 가치관 차이도 큰데, 늙은 아버지 라세는 재혼 후에 따뜻한 집에서 여생을 사는 정착을 원하고, 어린 아들 펠레는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 모험하기를 원한다. 펠레가 성장하면서 바라본 풍경은 결코 희망적이지 않다. 자신의 아버지가 자기 또래 작업반장에게 굽신거리는 모습, 신분 차이로 사랑에 실패한 광경을 무기력하게 바라볼 뿐이다. 펠레는 아버지와는 다른 길을 걷는 데 성공할까? 펠레가 세상을 정복하는 건 몰라도, 적어도 자신의 삶은 의지대로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 어른으로 자라나기를 바라게 된다.

 

라스 폰 트리에, <브레이킹 더 웨이브>

교회의 힘이 강한 보수적인 마을에서 자란 ‘베스’(에밀리 왓슨)는 유정에서 일하는 ‘얀’(스텔란 스카스가드)과 사랑에 빠지고 결혼한다. 둘은 깊은 사랑을 느끼지만, 얀은 일을 하기 위해 떠난다. 얀에 대한 베스의 사랑은 점점 커지는 가운데, 얀은 일을 하다가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다. 얀은 베스에게 다른 남자와 사랑을 나누고 그 과정을 자신에게 말해달라고 말하고, 베스는 자신이 얀의 말을 따라야 얀이 나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기 시작한다.

국내 관객들에게 덴마크 하면 떠오르는 감독은 단연 라스 폰 트리에다. 라스 폰 트리에는 초기작 <유로파>(1991)와 <브레이킹 더 웨이브>(1996)가 칸 영화제에서 각각 기술 대상(지금의 심사위원상)과 심사위원대상을 받으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이후 도그마 선언에 따라 <백치들>(1998)을 연출하고, <어둠 속의 댄서>(2000)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라스 폰 트리에와 호흡을 맞춘 배우 중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이들이 많은데, <어둠 속의 댄서>(2000)의 뷔요크, <안티크라이스트>(2009)의 샤를로뜨 갱스부르, <멜랑콜리아>(2011)의 커스틴 던스트가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에밀리 왓슨은 <브레이킹 더 웨이브>(1996)로 데뷔와 동시에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다.

<브레이킹 더 웨이브>는 <오데트>에 대한 라스 폰 트리에의 답장처럼 느껴진다. 베스는 자신의 특기를 ‘믿음’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보수적인 마을 교회의 핵심 인물들은 모든 것을 자신들이 결정 지으며, 교회에서 제명당한 이들을 묻어주며 ‘지옥에 갈 거다’라고 말한다. 마치 자신들의 신의 대리자인 것처럼 구는 가운데, 베스는 왜 사람을 믿어야지 말을 믿어야 하냐고 반문한다. 베스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당하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온몸으로 실천한다. 믿음이 기적을 만들어낸다는 걸 증명한 건, 말만 하는 이들이 아니라 매 순간 온몸으로 믿음을 향해 전진한 베스다.

 

토마스 빈터베르그, <어나더 라운드>

‘마틴’(매즈 미켈슨), ‘토미’(토마스 보 라센), ‘피터’(라스 란데), ‘니콜라이’(마그누스 밀랑)는 친구 사이로 현재 같은 고등학교에서 일하고 있다. 니콜라이의 생일을 맞이해 넷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자신들의 삶이 예전에 비해 활력을 잃었음을 느낀다. 이들은 혈중알코올농도 0.05%를 유지하면 침착함과 개방성이 늘어난다는 가설을 발견하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술을 마시고 수업을 진행하기로 결심한다. 지루한 교사 취급받던 마틴은 술을 마신 뒤로 학생들이 잘 따르는 재밌는 선생님이 되었고, 권태로웠던 아내와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느낀다. 넷은 혈중알코올농도와 관련해 추가로 실험을 이어 가기로 한다.

토마스 빈터베르그는 도그마 선언에 따라 연출한 장편 데뷔작 <셀레브레이션>(1998)으로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한다. 도그마 선언의 주축이었던 그는 어느새 <어나더 라운드>(2020)로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국제장편영화상을 받은 감독이 되었다. 기존 영화에 반발하는 도그마 선언과 가장 보수적인 영화상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의 트로피를 모두 가진 인물은 토마스 빈터베르그 뿐이고, 이는 그의 넓은 연출 스펙트럼을 증명한다. <어나더 라운드>(2020)의 매즈 미켈슨은 덴마크를 대표하는 배우로 전세계적으로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는데, <더 헌트>(2012)에 이어 토마스 빈터베르그와 다시 한번 호흡을 맞췄다.

삶에서 권태는 찾아올 수밖에 없다. 늘 원해왔던 ‘안정’도 시간이 지나면 ‘권태’로 그 의미를 달리하여 곁에 머문다. <어나더 라운드>는 권태로부터의 탈출에 필요한 작은 변화에 대한 영화다. 어떠한 문제에 대해 크게 보면 한없이 크게 보이고, 그렇게 인식하는 순간 해결 불가한 크기의 골칫덩이가 되기도 한다. 작은 변화가 큰 결과를 만든다고 믿을 필요가 있다. 내 삶을 작은 부분부터 바꿔 나갈 수 있도록, 가까운 곳에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바꿀 필요가 있다. 그게 술이라면 술도 얼마든지 좋은 명분이 되어줄 거다. 물론 무엇이든 과하면 안 되겠지만. 평소에 술에 별 관심이 없음에도 마틴과 친구들을 보며 술을 핑계로 미친 척하고 그동안 못했던 도전을 해보고 싶어진다. 내 삶의 즐거움은 현재 얼만큼의 농도를 지녔을까? 더 나아질 수 있음에도 방치해둔 내 삶의 한 부분에 화학 작용을 일으킬 변화의 한 방울을 떨어뜨린다. 술 한잔이든, 운동 후의 땀 한 방울이든, 그렇게 삶은 서서히 변한다.

 

Writer

에세이 <나만 이러고 사는 건 아니겠지>, <달리다 보면> 저자. 좋아하는 건 영화, 여행, 음악, 문학, 음식. 특기는 편식. 꾸준한 편식의 결과물을 취향이라고 부르는 중. 취향을 바탕으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김승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