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게 살다 보니 놓치고 사는 것들이 있다. 목전에 닥친 일을 해치우기 바빠 과거를 복기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일은 뒷전으로 밀린다.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여지라는 '카르페 디엠'을 입버릇처럼 되뇌지만, 오늘을 수습하는데 경황이 없어 허둥대다가 잠자리에 든다. 삶은 사람과 자연 사회와 역사가 두텁게 둘러싸인 형국인데 좀처럼 그에 부합하는 사유를 하지 못한다. 무엇보다 나다운 삶, 내가 원하는 인생이 뭔지 고민하는 데 소홀해진다. 오늘은 작가의 사회적 학문적 경험을 바탕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질문하고 답을 구하는 과정을 다룬 책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마루야마 겐지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2012)

마루야마 겐지의 책을 좋아한다. 특히 소설보다 산문집에 유독 더 끌린다. 마루야마 겐지는 늘 확신에 차서 스스럼없이 목소리를 높이는 독설가라서 속이 다 시원하다. 이거 너무한 거 아닌가 싶다가도 눈에 비늘이 벗겨질 것 같은 꾸짖음에 정신이 번쩍 든다. 마루야마 겐지의 글을 읽다 보면 면벽참선하며 글을 쓰는 원칙주의자의 결기가 느껴진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명확한 잣대를 가지고 말을 하니 에두름이 없다. 그의 대표 산문집 <소설가의 각오>를 보면 거의 사무라이에 가까운 구도자의 자세로 글을 쓰는 마루야마 겐지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런 강성 일변도의 자세는 심심치 않게 다른 작가들을 비판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한 인터뷰에서 마루야마 겐지는 동료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 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평범에 미달하는 남자가 미녀에게 둘러싸여 늘 사랑을 받더군.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꿈이다. 작가의 콤플렉스지. 읽는 독자도 마찬가지고. (중략) 무릇 소설가란 이름의 인종은, 학교 선생이나 중처럼 끊임없이 인간과 사회를 테마로 살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세계에만 온 신경을 집중시킬 수 있는 홀가분함 덕분에, 즉 무절제한 사고에 브레이크를 걸 실질적인 체험이 뒷받침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중요한 테마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나머지 전혀 실태를 모르는 구석이 있다. 특히 오랜 세월 작가 생활을 하거나 자신은 태어나면서부터 예술가라고 믿는 자 중에 많은 것 같다.”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는 요약하면 어디에도 매이지 않은 단독자의 삶을 꾸려나가라는 조언을 담은 책이다. 타인의 말에 휩쓸리기보다는 스스로 생각하고 끝내 세계의 끝으로 뛰쳐나가라는 명령이 담겼다. 구체적으로는 하루빨리 부모라는 작자들은 버리고 독립해서 자립해야 한다는 말이 눈에 띈다. 부모에게 얹혀사는 인생이란 어차피 뻔한 인생이라며, 최대한 빨리 혼자가 되라고 한다. 그러니까 마루야마 겐지가 말하는 단독자의 삶은 정신적인 독립에 앞서 물리적으로 온전한 혼자가 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마루야마 겐지가 소로의 '월든'처럼 초월적인 무언가가 되라는 말을 하는 건 아니다. 마루야마 겐지가 말하는 고독은 하루키, 미시마 유키오, 가와바타 야스나리 등 일본 전통 사소설의 전통을 가진 작가들과는 다른 부류의 고독이다. 일본 작가들이 고독을 자양분 멜랑콜리한 기분에 사로잡힌 남자에 대한 이야기에서 다룬다면, 마루야마 겐지는 데카당스를 꿈꾸는 과격분자의 자세로 고독을 마주한다. “출퇴근 전철 안에서 죽은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인생의 절정기는 학교 축제 때뿐이었음을 절감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자유를 스스로 내던졌기 때문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국가와 가정, 사랑 따위는 모두 넘어서야만 하는 장애물일 뿐이다. 오히려 고독과 고통, 광기와 반항처럼 인간의 음습한 구석에 일견 더 많은 가치를 둬야 마땅하다. 홀로 고민하지 않은 자에게 인생의 유의미한 대답이 보일 리 없다면서 깊은 산골에서 혼자 집 짓고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하며 사는 게 '마루야마 겐지'의 스타일이다.

물론 강단이 있는 성격이 필연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빈틈도 있다. 센 말에는 항상 놓치게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냥 태어났으니 산다는 말이 횡횡하는 요즘 순응하는 삶을 경계하라는 어른의 말은 귀하다. 착한 아이 증후군에 걸린 것처럼 내면의 욕구나 소망을 억제할 때 인간은 죽은 것과 같다는 경고 어린 말은 다음 세대를 향한 우려와 연민이 담겨있다. 말 그대로 인생이라는 것은 제멋대로 살아도 괜찮은 것인지도 모른다.

 

데이비드 실즈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2008)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의 저자 데이비드 실즈는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과정을 기록한다. 뼈 있는 농담과 지적인 사유들을 구구절절 풀어놓는 작가의 글은 각종 문헌에서 뽑아온 경구(aphorism)와 섞여 독특한 리듬을 만들어낸다. 우리의 기억은 부스러진 연탄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고, 끝내 잊혀서 더는 문득 드리우지도 않을 것이라고 속삭인다. 그렇기에 죽음이라는 종착지까지 가는 과정을 알고 넘어가면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죽음이라고 해서 어둡거나 슬프기만 한 건 아니다. 데이비드 실즈는 위트 넘치면서도 절묘한 농담에 능숙한 필자라서 시종 낄낄거리면서 죽음을 마주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저자는 데이비드 실즈는 이름처럼 일생을 방어적으로 살았다. 평생 지나치게 건강해서 어쩔 줄 몰랐던 아버지와 달리 어려서부터 골골대며 지냈고 여전히 허리 통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늘 방에 틀어박혀서 책과 놀았던 아이는 죽음에 관한 책을 쓰는 작가가 되었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연령대별로 닥쳐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살펴본다. '유년기와 아동기' '청소년기' '중년기' '노년기와 죽음'까지 총 4부로 장을 나누고 각 연령대에 따라 겪는 육체적 심리적 변화를 자세히 설명한다. 책을 읽다 보면 내 인생의 좌표는 지금 어디쯤 있으며, 이제 곧 어떤 일이 내게 닥칠지 불안해진다. 유한한 삶을 살아야 하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평생 죽음을 걱정하는 팔자가 지닌 슬픔이 배어난다. 더 나아가서 공자, 셰익스피어, 오스카 와일드, 에밀 졸라 등 엄청난 위업을 남겼지만 결국 죽어버린 세기의 지성들의 말을 통해 죽음이 삶과 완전히 포개진 개념이라는 것을 증명해낸다. 그러니까 인생이라는 것은 결국 순간순간이 모인 과정에 불과하고 죽음이라는 마침표가 있기에 삶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납득시킨다.

LA 다저스의 스타팅 라인업으로 글자를 배울 만큼 야구광인 데이비드 실즈는 자신의 육체가 어디에서 시작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야구 경기를 하는 모습을 통해 보여준다. 다저스의 간판타자 탐 굿윈이 쳐낸 공이 유려한 구도로 펜스에 처박히듯 야구와 인생엔 비슷한 착점이 있다. 뜬 공을 받으려는 외야수의 위태로운 자맥질엔 우리의 버둥거림이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인간의 삶을 스포츠에 비유해서 설명해내는 지점이 일품이다.

“내가 6세 때부터, 아버지와 내가 매일 아침 제일 먼저 한 일은 신문 스포츠면을 읽는 것이었다. 내가 가장 애틋하게 간직한 기억은 20년쯤 전의 일인데, 아버지 댁의 소파에 우리 둘이 나란히 앉아서 사위가 어둑한 가운데 라디오 중계를 들었던 일이다. 다저스와 자이언츠 경기였다. 마이크 미셜이 10회에 3점 홈런을 날려서 다저스가 이긴 순간, 아버지와 나는 마주 보았다. 야릇하게도 우리 둘 다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데이비드 실즈에겐 97세까지 건강한 삶을 살다가 죽은 아버지가 있었다. 행동주의자인 아버지는 작가인 데이비드 실즈를 평생 탐탁지 않아했다. 늘 책을 달고 살았던 아들을 남자답지 못한 존재로 여겼다. 좌파 지식인이며 오랜 기자 생활을 하고 야구심판을 병행할 정도로 정력적인 남자였던 아버지는 아들만큼은 스포츠인으로 살기를 바랐다. 어쩌면 그것은 죽음에 대한 저항을 멈추지 말라고는 충고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데이비드 실즈는 고질적인 허리 부상으로 스포츠는커녕 오히려 지적인 사유가 돋보이는 학자로 자랐다. 침대에서 읽던 문학과 사랑에 빠졌고, 작가라고 불릴 때 행복을 느꼈다. 그래서 둘은 평생 서로를 미워하면서도 사랑했다. 부자가 함께 열광했던 건 오직 야구뿐이었다. 기록, 통계의 스포츠인 야구는 육체적인 활력과 동시에 데이터를 분석하고 거기서 이야깃거리를 만드는 것이 중요한 종목이었기 때문이다. 인생에서도 승리의 쾌감에만 몰두했던 아버지와 달리 우리의 삶이 죽음 앞에서 무릎 꿇게 될 확률을 소수점 셋째 자리까지 구할 수 있었던 아들내미는 소파에 앉아 야구를 보면서 서로가 한 핏줄임을 감내할 수 있었다. 이처럼 죽음에 늘 항거했던 아버지와 죽음을 늘 지근거리에 두고 살았던 병약한 아들은 서로를 의식하며 죽음과 탄생이 서로를 팽팽히 당기는 삶을 체현한다.

 

마크 롤렌즈 <철학자와 늑대>(2008)

저자인 27살의 마크 롤랜즈는 젊은 나이에 철학 교수를 하며 여러 권의 책을 써냈다. 그치지 않고 운동도 잘하며 얼굴도 꽤 잘생겨서 여자들도 그를 따른다고 본인 입으로 떠벌인다. 그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보다도 나이가 어리다. 그러다 보니 허구한 날 술 마시고 파티를 즐기며 화려한 싱글로 살았다. 어느 날 마크는 제 삶에 생긴 작은 구멍 하나를 발견한다. 아무리 책을 읽고 공부를 해도 매워지지 않은 부재를 본다. 마약과 술에 절어 살아도 채워지지 않은 허기를 마주한다. 마침 그즈음 신문에서 늑대를 판매한다는 광고를 보고 구경을 하러 간 마크는 이성을 잃고 만다. 야성미와 귀여움을 동시에 지닌 새끼 늑대에게 반해버린 것이다. 어릴 때부터 큰 개들과 어울려 살던 마크는 늑대를 가족으로 들이기로 한다.

<철학자와 늑대>는 염세적인 세계관을 지닌 완벽남 마크가 11년 동안 늑대와 한 가족으로 살면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닌 한계와 본질에 관해 탐구하는 책이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지성의 중심에 선 철학자가 그와 반대편인 야성의 늑대와 만나 동거한다는 점이다. 좌충우돌 사사건건 말썽과 충돌을 일으키는 아슬아슬한 동거의 기록을 통해 유머와 감동을 끌어내는 글솜씨가 탁월하다. <철학자와 늑대>는 일종의 에콜로지로서, 삶의 두 가지 방식이 포개지면서 발생하는 관계성을 핵심으로 다룬다. 유유히 걸어가는 늑대의 실존과 성공을 위해 아등바등하며 사는 인간의 삶을 극명하게 대비시키며, 삶이라는 게 어둡고 허무하고 온통 암울하게만 보여도 매 순간 즐겁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설득하는 데 총력을 다한다.

책을 읽다 보면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시시포스에게 내려진 형벌을 떠올릴 수 있다. 시시포스는 신을 속였다는 죄로 평생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려야 한다. 문제는 바위가 정상 근처에 다다르면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는 점이다. 끙끙거리며 바위를 올리려고 한발 한발 내딛는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그래 봤자 말짱 도루묵이지만 시시포스는 실망하지 않고 기꺼이 그 무게를 받아 든다. 마크 롤랜즈는 이 돌을 옮기는 형벌이 인간에게 착각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을 지적한다. 목표가 있다면 행복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 말이다. 돌을 옮기고 그것으로 끝이 난다면 목표를 완수했다는 기쁨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다음은 무엇인가. 다른 목표를 향해 가는가. 돌을 옮기는 행위를 통해 목표 달성의 행복을 느낀다면 달라지는 건 뭘까. 돌이 다시 굴러 떨어지는 부질없는 반복이 불행한 것이라고 쉽게 단정할 수 있을까. 이에 관해 알베르 카뮈는 생각이 달랐다.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운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 역시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살아내기 위해서는 잉어처럼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마크 롤랜즈는 무한 반복되는 인생이라는 터울에서 순간에 최선을 다하라는 다소 피상적인 말을 늑대 브레닌과 살면서 비로소 체감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영겁회귀'(永劫回歸, Ewige Wiederkunft)를 실현하는 존재로서 늑대는 반복을 새로운 시작으로 여기며 그 순간만을 충실하게 살아낸다. 그래서 작가는 역설적이게도 죽음이 닥쳐오는 순간에도 숨결 하나에 모든 고통을 담아낼 줄 아는 브레닌의 앓는 소리를 인생 최대의 환희라고 말한다. 시간의 제스처, 공기가 볼에 닿는 냄새, 브레닌이 마크에게 남긴 원의 형상을 띈 삶의 실상이다.

 

메인 이미지 영화 <우리 선희>(2013) 스틸

 

Writer

영화와 책, 그리고 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쓴다. 지은 책으로는 <우리 각자 1인분의 시간>, <보내지 않을 편지>가 있다. 염세주의자가 되고 싶으나 하루 세끼 먹을 때마다 행복하다.
박민진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