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 있고 아름다운 책들을 찾아다니다가 만나게 된, 아티스트북이라는 장르와 이 분야의 대가 코라이니 에디지오니(Corraini Edizioni)를 소개하고자 한다. 아티스트북(Artist's books)은 단어 그대로 예술가가 만든 책이다. 그러나 예술적인 책이라고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고, 아트북처럼 만듦새가 예술의 경지에 오른 경우와도 차이가 있다. 아티스트북의 기원을 파헤쳐보면 20세기 초 이탈리아의 아방가르드한 미술사조 미래파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데…. 이들의 파격적인 행보를 살피는 것도 흥미롭겠지만, 사실 코라이니 출판사의 책을 보면 금세 알게 될 것이다.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아티스트북의 매력이 어떤 것인지.

깜깜한 밤, 작은 불빛을 따라가며 여러 존재를 마주치게 되는 이야기. 다양한 종이가 사용되었으며 구멍, 플랩 등의 장치가 활용되어 페이지 곳곳을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Bruno Munari <까만 밤에>(Nella notte buia)(1956)

 

아티스트북(Artist’s Book)

아티스트북이란 ‘아티스트의 메시지를 온몸으로 표현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티스트북에는 예술가의 메시지가 텍스트 외에도 책의 물성과 형식으로 표현된다. 종이의 질감과 컬러는 어떤 느낌인지, 텍스트와 이미지의 상호작용은 무엇을 의미하며, 각 페이지의 관계는 어떠한지 등. 제작 사항 전반에 작가의 의도가 담기기 때문에, 내용과 형식은 한 몸이 된다. 텍스트로 말하는 책의 목소리와 함께 책의 몸이 적극적으로 보여주는 몸짓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책인 것이다.

독특한 내용과 표현방식으로 저마다 가지각색인 아티스트북의 특징을 하나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코라이니의 세분화된 카탈로그에서는 팝업북, 아동 도서의 구분에 속하는 책들도 있다. 그러나 이들 모두에서 찾아볼 수 있는 성격이 있다. 바로 아티스트의 상상과 실험이 독창적으로 구현된 책이라는 것. 코라이니 출판사의 창의적인 아티스트북들을 몇 가지 골라보았다.

아방가르드 음악가 존 케이지가 텍스타일 디자이너 루이스 롱과 함께 만든 색다른 요리책. 진흙 케이크를 만들며 상상력을 탐구할 것을 제안한다, John Cage, Lois Long <Mud Book>(1983), 이미지 출처 – 링크
John Cage, Lois Long <Mud Book>(1983), 이미지 출처 – 링크
‘꿈속의 꿈’이라는 루이스 캐럴 원작의 모티브가 책의 구조에 반영된 그림책. 그림과 사진 그리고 책을 넘기는 손의 이미지가 뒤섞이며, ‘그림 속 그림’과 ‘책 속 책’에 대해 이야기한다, Suzy Lee <Alice in Wonderland>(2002), 이미지 출처 – 링크
Suzy Lee <Alice in Wonderland>(2002), 이미지 출처 – 링크
스텐실 판을 이용하여, 노동의 현장에 노동자를 그려 넣는 책, Taro Miura <Workman stencil>(2014), 이미지 출처 – 링크
Taro Miura <Workman stencil>(2014), 이미지 출처 – 링크
페이지를 넘기면 숫자가 다른 숫자로 변하도록 고안된 입체 책, Marion Bataille <10>(2010), 이미지 출처 – 링크
Marion Bataille <10>(2010)

 

경계를 넘나드는 출판사

비범한 책들을 만들어낸 출판사의 자기소개 역시 남다르다. ‘책을 만들고, 전시를 열고, 프로젝트를 한다’. 이 독특한 정체성의 유래는 코라이니 출판사의 모태가 1973년 설립된 동명의 아트갤러리라는 점에 있다. 설립자 마르치아 코라이니는 남편 마우리치오 코라이니와 함께 갤러리의 예술가와 디자이너에게 헌정된 카탈로그를 제작하며 출판, 예술, 디자인 분야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지금도 코라이니는 전세계의 예술가, 일러스트레이터 및 디자이너와 출판 워크숍을 진행하며, 책으로 짓는 예술 실험을 끊임없이 펼쳐 보이고 있다.

브루노 무나리가 리디자인한 코라이니 에디지오니의 로고, 이미지 출처 –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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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노 무나리(Bruno Munari, 1907~1998)

코라이니와 아티스트북을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으니, 이탈리아의 전방위적 예술가 브루노 무나리이다. 그는 피카소가 '20세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고 칭했을 정도로 회화, 조각, 디자인, 문필, 영화, 건축, 그림책, 어린이 조형교육 등 장르를 초월한 다양한 분야에 업적을 남겼다. 1970년대부터 20년 넘게 지속된 코라이니와의 협업에서 브루노 무나리는 수많은 그래픽 서적, 그림책, 게임 등을 창작하였다. 또한 항상 어린이의 세계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던 그는 코라이니와 함께 어린이들이 창의력과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워크숍을 열었다.

브루노 무나리에게 책은 삶을 즐겁게 만드는 매체였다. 생각을 일깨우고, 누군가를 기쁘게 해주는 것. 이러한 마음이 담긴 그의 아티스트북과 예술적인 그림책은 독자를 호기심과 새로운 발견으로 이끌었고 창작자들에도 많은 영감이 되어왔다. 가장 잘 알려진 1945년의 그림책 시리즈는 브루노 무나리가 아들 알베르토를 위해 만들기 시작한 작업이었다. 작은 종이 덮개를 넘겨보며 소포 안에 든 물건, 동물들의 머릿속 생각처럼 숨겨진 이야기를 찾는 재미가 있다. 그 이후 브루노 무나리는 ‘읽을 수 없는 책(libro illegibile)’ 이라는 프로젝트를 일생 동안 탐구하였다. 글 없이 종이가 주는 시각적 메시지로 책과 커뮤니케이션의 가능성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작업이었다.

브루노 무나리가 아이들을 위해 만든 이야기 시리즈 7권, 이미지 출처 – 링크
기린이 나오는 큰 문인 책표지부터, 가장 안쪽의 개미가 나오는 작은 문까지 7개의 문을 노크하며 읽는 책, Bruno Munari <똑똑(Toc Toc)>(1945), 이미지 출처 – 링크
문자 없이 시각과 촉각으로 탐구하는 책 작업이다. 브루노 무나리는 종이가 규격, 재단, 색, 배치 등을 통해 그 자체로 하나의 언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Bruno Munari <읽을 수 없는 책>(Libro illeggibile MN 1)(1949), 이미지 출처 – 링크

코라이니는 브루노 무나리의 전 작품을 복각하여 재출판하고 있다. 그중 1980년 브루노 다네즈(Bruno Danese)에 의해 출판된 <I prelibri>는 ‘책과 만나기 전의 책’이라는 뜻으로, 아직 읽고 쓰는 법을 배우지 못한 어린아이들에게 헌정된 책이다.

12개의 작은 책 시리즈. 다양한 재료, 제본, 색상을 감각할 수 있다, Bruno Munari <I prelibri>(1980), 1st Corraini edition(2002), 이미지 출처 –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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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라이니는 또한 브루노 무나리가 1970년대에 책임 편집으로 있었던 줄리오 에이나우디(Giulio Einaudi) 출판사의 그림책 시리즈 탄티밤비니(Tantibambini)를 펴내고 있다. <빨간 모자> 동화를 재해석한 세 권의 책 <초록 모자>, <노란 모자>, <하얀 모자>는 각 이야기마다 특징적인 표현방식을 비교해보는 재미가 있다.

나뭇잎으로 만든 모자를 쓴 소녀와 개구리 친구의 이야기. 스탬핑 기법으로 우거진 초록빛 숲속을 나타냈다, Bruno Munari <Little Green Riding Hood>, 1st Corraini edition (2007), 이미지 출처 – 링크
노란색 니트 모자를 쓴 소녀와 카나리 친구의 이야기. 뉴욕의 복잡한 도심 풍경을 콜라주 기법으로 표현했다, Bruno Munari <Little Yellow Riding Hood>, 1st Corraini edition(2007), 이미지 출처 – 링크
흰 모자를 쓴 소녀가 눈 속에서 겪는 이야기. 글자만 있는 흰 종이를 보며 독자가 상상을 펼칠 수 있다, Bruno Munari <Little White Riding Hood>, 1st Corraini edition(1999), 이미지 출처 – 링크

 

<세디체시모>(Un Sedicesimo)

코라이니의 출판 실험을 잘 보여주는 프로젝트로 두 달에 한 번 완전히 새로운 실험을 펼치는 잡지, 세디치시모(Un Sedicesimo)를 들 수 있다. 제호는 이탈리아어로 ‘16의-’ 혹은 ‘16절판’을 의미한다. 이 잡지에서 정해진 제약은 이름답게 16페이지의 분량, 그리고 종이가 낭비되지 않는 사이즈인 17x24cm의 판형뿐. 그 외엔 모든 것이 바뀐다. 레이아웃도, 테마도, 그리고 편집 팀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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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부터 신인까지 작가, 예술가, 디자이너를 비롯한 다양한 창작자가 참여해 온 세디체시모는 일종의 종이 갤러리로서 두 달에 한 번씩 새로운 개인전을 펼쳐 보인다. 현재 코라이니를 이끄는 피에트로 코라이니의 기획으로 2007년부터 시작된 이 잡지는 코라이니 출판사의 실험적인 창조성을 잘 보여준다.

신문의 여행 페이지에서 잘라 수집한 푸른 하늘, Joe Rudi Pielichaty <Blue Skies(Un Sedicesimo 40)>(2016), 이미지 출처 – 링크
Mark Greif의 책을 읽고, 그의 에세이를 인용하여 작업한 콜라주, Joanna Neborsky <So many conditions conspire to make life intolerable.(Un Sedicesimo 46)>(2017), 이미지 출처 – 링크
대리석 산지 카라라의 풍경이 그리스 신화 속 시지프의 이야기를 나타내는 작업. 노동으로 만들어진 흰 광산과 대리석의 상처가 시지프에게 내려진 형벌을 증언한다, <Sisyphe(Un Sedicesimo 48)>(2018), © Studio Rimasùu, 이미지 출처 – 링크
구전으로 전해온 치료법을 수집한 프로젝트로, 과학적 사실과 미신이 섞여 있다, Joe Velluto <Go Away and Stay Away!(Un Sedicesimo 36)>(2014), 이미지 출처 – 링크

 

게임(Games)

마지막으로 소개할 코라이니의 카테고리는 게임이다. 코라이니의 카탈로그에는 책, 매거진 이외에도 오브젝트라는 카테고리가 있다. 포스터나 회화 같은 작품부터 식탁 매트, 카드, 게임에 이르기까지 일상에서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온갖 사물들이 있는 분야다. 이 중에서도 특히 게임은 창작자들이 부여한 규칙들을 가지고 놀며 입체적인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기에, 독자의 참여로 완성하는 아티스트북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눈썹, 코, 주름 등으로 구성되어 다양한 얼굴 표정을 만들 수 있는 스탬프, Olimpia Zagnoli <OZ faces>(2017), 이미지 출처 – 링크
이름, 동사 및 기타 단어로 구성된 삼각형 카드를 연결하여 문장을 만드는 게임, Paul Cox <Gioco dell'amore e del caso>(2000), 이미지 출처 – 링크
다양하게 배치하며 시각적 스토리를 구성할 수 있는 카드, Bruno Munari, Giovanni Belgrano <Transformations>(1975), 이미지 출처 – 링크

 

Writer

글과 이미지가 만드는 아름다움을 좋아합니다. 
마음이 닿는 세상의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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