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다." 이승우 작가의 소설 <사랑의 생애>의 첫 문장이다. 사랑의 불가항력적인 측면을 드러내는 선언과 같은 시작이다. 소설은 우리는 사랑에 휘둘리고 사랑에 잠식당해 허우적대는 광경을 보여주며 불가항력에서 불가해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처럼 사랑을 하는 사람의 극단적이고 비이성적인 면모는 문학의 주된 소재다. 그중에서도 금단의 사랑을 침범한 연인들은 특별한 지위를 차지한다. 루소의 <신엘로이즈>에서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 이르기까지 문학은 줄기차게 신분 계급 국적 인종 등 온갖 금기로 인해 가로막힌 사랑을 그려냈다. 하지만 걸림돌은 도리어 사랑의 불쏘시개가 되기 마련이다. 애타는 사랑은 도리어 두 사람을 나락에 떨어질 때까지 밀친다. 비극의 낙차가 크면 클수록 독자는 소설에 더 몰입한다. 세간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를 향해 투신할 때 우리의 비루한 일상도 잠시나마 각별해진다. 권태로운 저녁 밤도 애처로운 연인 앞에선 흐드러지게 춤을 춘다. 오늘은 모두가 만류하는 금단의 사랑을 지켜낸 이들을 만나보자.

 

모니카 마론 <슬픈 짐승>(1996)

독일 통일 직후, 동독 출신의 화자 '나'는 서독에 살던 남자 프란츠와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은 모두 아내가 있지만 우연한 만남 이후 불타오른다. 차이가 있다면 여성화자 '나'는 사랑을 위해 가정을 포기했는데, 프란츠는 두 집 살림을 오가며 그녀를 만난다. 멀티태스킹을 하는 쪽은 늘 사랑을 나눠줘야 하기에 남겨진 자를 불행하게 한다. 화자에겐 인생을 건 사랑이지만 프란츠에겐 그저 외도에 불과하다. 관계의 농도가 다른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끝내 파열음을 내며 나자빠진다.

소설의 시점은 두 사람의 사랑이 소멸하고 한참의 세월이 지난 뒤다. 노년이 된 화자는 알츠하이머 증상에 시달리고 있다. 그는 미약한 기억을 붙잡고 자신의 마지막 사랑이었던 프란츠를 회고한다. 소설은 대놓고 파편적이며, 불분명한 기억과 망상이 뒤섞여 도통 진위를 알 수 없다. 이런 실험적인 형식은 점점 기억이 소멸해가는 화자를 영원한 사랑 안에 가둔다. 강렬했지만 실패한 사랑이기에 결코 미소 지을 수 없는 구렁텅이에서 신음한다.

소설을 다 읽고 한숨을 푹 쉬었다. 실패한 사랑은, 아니 버려진 연인은 날 뒤흔들고 가만히 놔두질 않는다. 책을 다시 펼쳐보니 내가 친 무수한 밑줄이 마치 폭격의 잔해처럼 나뒹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떠올릴 수밖에 없는 회한이 모니카 마론의 문장 곁에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다. 화자를 짓누르는 처절한 감정 묘사가 내 시뻘건 밑줄과 함께 파괴적인 기억을 뱉어냈다. 작가 모니카 마론은 '나'가 홀로 신음하고 고통받는 대목을 마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지휘자처럼 거칠면서도 섬세하고 묘사했다. 속내를 조각칼로 오려낸 것처럼 날이 서 있어서 자꾸만 책장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 노년이 되어서도 지나간 사랑 때문에 고통받는다면 인간은 정말 슬픈 짐승이 아닐 수 없다.

어둡고 슬픈 소설이지만 <슬픈 짐승>은 마치 김연아의 레이백 스핀처럼 힘이 넘치고 우아한 문장을 지녔다. 슬픔과 고통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묘사가 압권이다. 정곡을 찌르는 문장엔 가슴을 꿰뚫는 힘이 있다. 그래서 난 내상을 입은 채 옮겨 적기에 바빴다. 한 번도 다가서진 못한 고유한 감정을 발견한 것처럼 늦은 밤까지 화자의 고통에 침잠해서 베갯잇을 적셨다. 한숨을 내쉬면서도 마저 다 읽어버렸다.

화자가 자꾸만 변명으로 일관하는 프란츠를 놓지 못할 때마다 이런 생각을 했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번번이 속고도 그냥 믿어버리는 거구나. 내게 돌아올 거라는 믿음, 나만 사랑할 거라는 믿음,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는 믿음은 실로 터무니없지만, 사랑에 빠진 자는 앞뒤 가리지 않고 포용하는 거구나. 옆에서 보기엔 한심하고 바보같이 이용당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게 사랑이구나. 사랑이 지닌 비이성적이며 맹목의 믿음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화자인 '나'는 무너지는 와중에도 프란츠를 옹호하고 그의 입장에 서기를 멈추지 않았다. 연민은 자기중심적인 사고지만 그게 사랑이라면 자기는 안중에 없이 그를 싸고돌게 마련이다. 한 치의 희망에 모든 걸 내팽개치고 다 걸어버린다.

<슬픈 짐승>에서 가장 마음이 저렸던 대목은 프란츠가 화자와 섹스만 하고 바로 옷을 챙겨 입고 나가는 순간이다. 그녀는 버려지기 싫어서 조르고 달래고 화를 내며 온갖 수를 써서 그를 붙잡지만, 프란츠는 무심하게 등을 돌린다. 자신의 견고한 삶 속으로 복귀하기 위해 막차도 끊긴 어두운 거리로 나선다. 한 번 정도는 그녀의 곁에서 자고 갈 법도 한데, 대충 둘러대고 하룻밤은 그녀의 몸에 자신을 맡길 법한데 매정하게 떠나버린다. 쾅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이제 공백이 그녀를 흔들어 놓는다. 어떻게 그는 연인 앞에서 늘 철두철미한 사람일 수 있을까?

불륜이 등장하는 소설이 독자의 억장을 무너뜨리는 건 익명성에 있다. 금기와 은밀함이 결합하면 그 무엇보다 달콤하지만, 정당화할 수 없는 감정이기에 쉽게 지친다. 누구에게도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없어서 비참해진다. 사랑을 타인에게 인정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 지닌 치명성이다. 프란츠는 화자를 방 한구석에 몰아넣고 기밀의 사랑을 휘둘렀다. 프란츠에게 그녀는 한낱 배음에 불과했던 걸까. 홀로 집에 남겨진 화자는 고통받는다. 프란츠가 아내와 나눌 섹스를 떠올리고, 아내와 함께 보내는 사사로운 장면에 신음한다. 레스토랑에서 다정한 말을 주고받는 걸 떠올리며 질투하고 시샘하며 끝내 그의 부인을 찾아가서 격정을 토해낸다. 인정받고 싶어서, 그를 온전히 내 것으로 가두기 위해서 마지막 수를 쓴다.

남겨진 사람에게는 일상적인 것이 사라지는 게 가장 큰 고통이다. 이별은 사소한 많은 것을 앗아간다. 그와 습관처럼 주고받던 우스갯소리가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우리만 아는 의식과 같은 대화, 몸을 비비던 살결의 냄새가 애틋하리만큼 소중해진다. 문밖을 나선 그는 마구 뒤섞인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을 남기고 떠났기에 더 잔인해졌다. 소설은 기억을 잃기 시작한 이래 오직 프란츠라는 운명의 연인에 골몰했던 여인의 삶을 비추며, 우리가 죽을 때 과연 마지막까지 떠올릴 만한 일이 사랑 아니고서야 있기나 한지 되묻는다. 비록 실패하고 인정받지 못한 사랑이라 할지라도 과연 그 사랑을 빼고 인생에 있어서 남길만한 가치가 있는 게 뭐가 있겠냐며. <슬픈 짐승>은 독일 통일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깊숙이 자리하지만, 결국은 사랑이라는 보편의 감정을 끝까지 파고든 작품이다. 생의 끄트머리에서 사랑만 붙들고 소멸하는 이야기다. 슬픔에 완전히 잠식된 사람만 내뱉을 수 있는 기운이다.

 

쿠라하시 유미코 <성소녀>(1965)

미키라는 열여섯 먹은 소녀가 교통사고를 내고 기억을 잃어버리는데, 그녀의 어머니는 그 사고로 인해 잔인하게 죽었다. 기억을 잃은 미키는 약혼자인 K에게 일기장을 건네면서 파파라고 부르던 알 수 없는 정체를 설명한다. 프로이트의 ‘가족로망스’(Familienroman)를 떠올리게 하는 파파라는 캐릭터는 미키의 입을 통해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한다. 엄마의 옛 연인이자 치과의사이고, 아내에 복수하기 위해 딸과 동침하는 악인이자 외제 차를 몰며 사치를 즐기는 속물이기도 한 남자는 오히려 미키의 정체를 더욱더 알 수 없게끔 흔들어댄다. 한편 K는 친구들과 어울려 여학생을 집단 강간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미키와의 첫 만남을 고백한다. 친누나와 사랑을 나누며 한때 코뮤니스트 집단에서 활동하던 과거를 숨기고 이제 미국이라는 대륙에 발을 붙이려 노력하는 K는 미키와의 만남으로 전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정체성의 혼란을 느낀다.

소설 <성소녀>는 난해한 작품이다. 책 뒤편에 소개된 작가의 연보와 작가가 써온 작품이 시대에 새긴 의미를 추론한 글엔 흥미가 가지 않았다. 상실감과 허무라는 틀에 박힌 단어와 전공 세대를 보낸 화자의 경험으로 작품을 해석한 시각은 크게 와닿지 않았다. 오히려 작가가 어느 인터뷰에 남긴 '반세계'라는 표현이 적절하게 느껴진다. 작가가 현실과 이격한 존재를 그리려고 한 의도가 뭘까. 주위를 둘러싼 현실감각과 톱니바퀴 같은 인과의 서사를 멀리하고 오직 감각으로 빚어낸 문장들은 <성소녀>를 계속 들여다보게 하는 힘이다. 이것은 그저 소녀라는 존재만이 잉태할 수 있는 도발적인 망상이고, 그것을 이야기로 풀어내는 작가적인 자아를 지닌 K를 홀리는 귓속말이다. 무엇보다 소설이 가진 유일무이함에 탄복하며 문장을 곱씹었다. 세상이 내 맘 같지 않을 때 사람은 상상으로 만든 이야기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허상에 불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 안에 갇혀 안도한다. 지독한 성에 대한 갈망 그리고 일상의 끈적한 권태, 일기장에 부지런히 적은 상상의 나래. 방황의 시기를 거쳐 온 사람이라면 그리워하게 마련인 금기에 대한 환상이다. 소설은 왜곡된 마음마저 포용할 수 있는 곳이므로 난 마음껏 성(聖)스러운 판타지아를 즐겼다. 시대가 무거운 이데올로기에 갇혀있을 때 예술은 더 자유롭게 비탈을 죽죽 미끄러져 간다.

<성소녀>는 마치 십 대 시절에 꾼 꿈을 떠올리게 한다. 성인(成人)으로 들어가는 문턱을 외설적이고 음흉하게 그려냈다. 단지 어른이 된다는 것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무간지옥으로 가는 것인 양 무력하게 느껴지게끔 썼다. 작가 '쿠라하시 유미코'는 한국에는 비교적 알려지지 않다가 최근에야 주목을 받고 있다. 현역 작가들이 주목한 소설로 많은 명사의 추천 도서 목록에 오르내렸다. <성소녀>는 ‘창비 세계문학’ 37권으로 국내에 소개된 작가의 첫 소설이다. 일본 문학이 가장 뜨거웠던 전공투 세대들의 높은 지지를 받은 작가다. 그녀는 현실감각을 거부하는 반세계를 그려온 작가답게 리얼리즘을 중시하는 80~90년대엔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몸속에 심장이 있는 것 같은 존재 방식으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작가의 표현처럼 현실과 등을 진 소설이 지닌 고유함이 시대를 거쳐 여기에까지 이르게 했다. 환상 속으로 파고들던 소설은 현실과 마주하는 지점에서 툭하고 끝이 난다. 독자는 각자의 주검을 삶 속에 유기한 채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캐롤>(1952)

캐롤은 범죄소설 전문 작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첫 연애소설이다. 유일한 퀴어 장르이자 가명으로 세상에 내놓았던 작품이기도 하다. 그만큼 사회적으로 퀴어 소설을 내는 것이 위험천만하던 시절에 나온 작품이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50년대, 미국과 소련의 본격적인 냉전 시대로 접어들면서 사회 전체가 차갑게 경직되던 시절의 어느 겨울, 유부녀지만 이혼을 원하는 캐롤과 온 나날을 무기력하게 보내던 어린 테레즈가 만나 사랑에 빠진다.

소설에서 두 사람이 백화점 문구류 판매대에서 처음 만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캐롤이 문으로 들어오고 테레즈는 숨이 멎을듯한 설렘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낀다. 한눈에 반했다는 말이 이런 것일까. 실제 퍼트리샤 하이스미스가 백화점에서 일했을 당시 모피코트를 입은 여인을 보고 반해 <캐롤>을 쓰기 시작했다고 밝힌 바 있다. 운명처럼 시작된 캐롤과 테레즈의 만남을 방해하는 건 다름 아닌 그들의 성이 같다는 사실이다. 캐롤의 남편 하지는 캐롤을 붙잡기 위해 성적 지향성을 문제 삼아 캐롤의 양육권을 박탈하고, 캐롤에게 이성애자 행색을 하며 자신과 살기를 요구한다. 테레즈의 친구 리처드 역시 테레즈의 사랑을 역겹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구애를 받아들이지 않는 테레즈를 마치 병에 걸린 사람처럼 대한다.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의 시선은 집요하고 오만하다.

두 사람은 동성이라는 장애물 외에도 당시의 사회적 약자인 여자이고, 나이 차도 상당하다. 심지어 캐롤은 여전히 이혼하지 못한 상황이고, 테레즈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골몰해있다. 두 사람은 모든 게 불확실한 현실적인 여건 앞에서 관계가 무너지는 것을 느낀다. 자라온 배경도 성향도 전혀 다른 부류이기에 이해하지 못할 언행도 속속 눈에 띈다. 이런 차이는 두 사람이 사랑을 이어나가는데 허들로 다가온다. 처음에는 힘을 내어 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지치고 피로해지는 관계다. 하지만 사회적인 통념과 상충할 때 사랑의 도피는 더욱 달콤해진다. 두 사람이 견디다 못해 미국 서부로 떠나면서 소설은 힘을 받는다. 캐롤과 테레즈는 즉흥적으로 행로를 정하며 틀에 박힌 듯 답답했던 삶에 산소를 불어넣는다. 소설의 표현에 따르면 두 사람은 "광기 서린 폭군처럼 내달리지만, 어디에도 가지 못하는 장난감 기차" 신세를 벗어나기로 한 것이다. 벗어날 수 없기에 미쳐버린, 이미 숨이 끊겼기에 지칠 수도 없는 궁지에 몰린 연인은 오직 사랑만이 사람을 살게 한다는 것을 점차 깨달아간다. 하지만 캐롤의 남편 하지가 붙인 사립 탐정으로 인해 여행은 급하게 중단되고, 리처드는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테레즈에게 더러운 편지를 보내며 저주를 퍼붓는다. 쓸쓸히 다시 집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두문불출 각자의 삶을 조용히 이어나간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작가의 말에서 이 책을 쓰고 수많은 사람에게서 편지를 받았다고 밝혔다. 소설을 비극이나 교훈이 아닌, 두 사람의 사랑을 지지하는 방식으로 끝내주어서 고맙다는 편지가 쇄도했다. 그들은 실패하지 않았고, 사회는 점점 더 성 소수자의 사랑을 지지하는 방식으로 나아지고 있다. 캐롤은 토드 헤인즈 감독에 의해 걸출한 사랑 이야기로 재탄생했고, 주연을 맡은 케이트 블란쳇과 루니 마라는 눈부신 연기로 캐롤은 불멸의 생명력을 획득했다.

 

메인 이미지 영화 <캐롤> 스틸

 

Writer

영화와 책, 그리고 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쓴다. 지은 책으로는 <우리 각자 1인분의 시간>, <보내지 않을 편지>가 있다. 염세주의자가 되고 싶으나 하루 세끼 먹을 때마다 행복하다.
박민진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