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능인’(multi-potentialite)이라는 개념이 주목받고 있다. 잠재된 가능성을 기반으로 여러 분야에서 활약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스페셜리스트가 되기를 강요하던 현대 사회에서 이제야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는 다능인들에게 롤모델이 될 만한 사례를 소개한다. 무민 작가이자 회화, 소설 등 경계를 넘나드는 전방위 창작자 토베 얀손, 공예운동가, 디자이너, 시인, 연설가, 사회운동가까지 타이틀을 섭렵한 윌리엄 모리스, 전무후무한 건축가이자 환경운동가인 훈데르트 바서까지. 자신만의 세계관을 넓혀 간 세 인물을 통해 앞으로의 다능인의 미래를 그려본다.

 

열정적인 창조자의 삶을 살았던 종합 예술인, 토베 얀손

1914년 스웨덴계 핀란드 가정에서 태어난 토베 얀손은 하마같이 생긴 트롤, 무민 시리즈의 원작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미 10대 시절부터 그림책, 일러스트레이션을 제작했고 25살에 <무민 가족과 대홍수> 초안을 작성하며 그 이야기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야기 중엔 동화 같은 작화와 반전되는 에피소드가 가득하다. 홀로 겨울잠에서 깬 무민의 불안정한 마음, 점점 모험 대신 안정을 선택하는 친구들을 지켜본 ‘무민파파’의 쓸쓸함은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만한 현실적 두려움, 진취적인 삶에 대한 열망을 담아 어른들에게도 널리 읽힌다.

공식 홈페이지 화면(왼쪽), ‘무민 가족과 대홍수’ 삽화(오른쪽)

그뿐 아니라 토베 얀손은 소설 묘사에도 탁월하다. 최근 민음사에서 번역 출간한 자전적 소설 <페어플레이>에서 ‘마리’와 ‘욘나’가 함께 창작하고 애정을 교류하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담았다면, <정직한 사기꾼>에서는 세상을 잘 모르는 작가 ‘안나’가 영리하지만 차가운 ‘카트리’의 덫에 걸려 평온한 일상을 잃는 과정을 담았다. 특유의 한이나 정 같은 정서가 주가 되는 한국소설과 달리 고요하고 차갑다 느낄 만큼 담백한 묘사가 색다르다.

왼쪽부터 <페어플레이>, <정직한 사기꾼>, <토베 얀손 일과 사랑>

최근 몇 년간 토베 얀손의 작품과 함께 그의 삶도 재조명되고 있는 듯하다. 2020년에 제작된 <토베 얀손>(Tove)은 인생의 동반자를 만나고 작업의 전환점을 맞던 시기를 그리고 있고, 2017년 문학동네에서 번역 출간한 책 <토베 얀손, 일과 사랑>에서는 그의 출생과 전쟁으로 얼룩진 성장 배경부터 초기작들, 클로브하룬 섬에서의 노년까지 영화의 러닝타임에서 다 보여줄 수 없었던 삶의 전반이 담겨있다. 방식과 도구를 넘나들며 인생을 다방면의 창작물로 승화한 다능인이 궁금하다면 단연 필독서로 추천하고 싶다.

 

공예 예찬에서 쓸모있는 노동 이야기까지, 윌리엄 모리스

공예와 디자인 분야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윌리엄 모리스를 아르누보 설립에 영향을 준 공예 운동자이자 디자이너로 알고 있을 것이다. 1834년 출생의 윌리엄 모리스는 영국 출신이지만 조국의 제국주의와 산업혁명이 영국과 당시 영국의 식민지 공예 산업 전반을 망가트렸다고 비판하였다. 이에 반해 미술공예 운동을 전개한 것이 미술사에 한 획을 그었다. 또한 모리스 상회를 설립하여 그가 주장한 일상 속의 예술을 실현하고자 벽지, 스테인드글래스, 가구, 타일 등 수공예품을 유통하며 성공하는 사업가의 궤도 오르기도 했다.

윌리엄 모리스(왼쪽)와 공예품으로 가득한 그의 집인 레드하우스 내부(오른쪽)

이상적인 사회건설을 위해 예술과 공예 부흥에 뛰어든 그는 당연한 수순처럼 가치 있는 노동을 고민한 사상가가 되었다. 이는 윌리엄 모리스 산문선인 <아름다움을 만드는 일>이라는 책에 잘 드러나 있다. 이 책은 그의 연설을 구어체 그대로 담아 마치 교과서 속 인물이 보내는 편지를 읽는 듯한 기분을 선사한다. 왜 혁명적 사회주의를 수용하고 전파하게 되었는지 설명할 때, 공예가이자 디자이너의 관점에서 실제 산업의 구조적 문제로 접근한 것이 새로웠다. 부유한 부모 슬하에서 교육받고 자란 사업가가 하는 이 연설은 지나치게 이상적인 이야기로 들리기도 하지만, 그 시절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아예 없었다면 오늘날 더 무미건조하고 효율 집약적인 시대에 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책 속 각 챕터가 끝날 때마다 등장하는 윌리엄 모리스의 완벽한 수제 도안은 그가 꿈꿨던 치밀한 이상 세계의 구조를 빗댄 아름다움 같다.

<아름다움을 만드는 일>과 여기에 수록한 윌리엄 모리스 도안, ‘Wool Curtain Bird’(왼쪽) ‘Woven Fabric Tulip and Rose’(오른쪽)

 

문-이과 대통합 환경운동가의 작품세계, 훈데르트 바서

“우리는 자연에 초대된 손님입니다, 예의를 갖추십시오.” 훈데르트 바서가 환경 운동을 위해 내 건 슬로건이다. 화가이자 건축가인 그의 작품세계는 자연에 대한 사랑으로 설명이 된다. 이미 국내에 전시를 통해 여러 번 소개된 작가지만, 자연에서 영감 받은 유기적인 작업들은 언제나 새롭다. 1928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일찍 여인 그는 유대인인 어머니와 함께 히틀러 탄압으로 인해 외가 친척의 몰살과 강제 이주의 연속에서 생존해야만 했다. 하지만 훈데르트 바서는 그의 폭력으로 얼룩진 유년 시절을 뒤로 하고 세상을 포용하는 자신만의 신념을 회화와 태피스트리에 녹이고, 기능주의와 실용주의에 반하는 곡선을 건축물에서 실현시켰다.

회화 ‘Irinaland over the Balkans’(왼쪽), 건축 ‘Kuchlbauer-Turm’(오른쪽)

환경운동가로서의 행보 역시 흥미롭다. 성명 발표, 캠페인 포스터 제작, 퍼포먼스 전개 등 선한 영향력을 평화적으로 행사하였고, 그 덕에 일례로 실제 공사 중이던 하인버그 원자력 발전소의 건설이 중단되었다고 전해진다. 국내에서는 괴짜 예술가 같은 면모가 더 강조된 느낌이라면, 뉴질랜드, 워싱턴에서는 훈데르트 바서 환경주간을, 샌프란시스코에서는 훈데르트 바서의 날을 지정할 정도로 사회운동가로서 명망이 두텁다.

하인버그 원자력 발전소 건설 반대 운동 당시(왼쪽), 자연 정수 시스템 설계도(오른쪽)

그의 전시를 찾아가면 지루할 틈이 없다. 자연 정수 시스템 모형, 태피스트리, 건축모형 등 2D와 3D를 넘나드는 강약 있는 구성에 화려한 색감의 회화까지 강렬한 감정과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뚜렷한 철학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다능인 훈데르트 바서의 일상이 담긴 사진 자료를 마주하면 천재적인 면모와 별개로 유쾌한 인간미가 전해져 마치 어느 유럽 시골에 간다면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바야흐로 세계관 전성시대다. 일관되고 진정성 있는 태도로 창작을 하고 대중을 설득할 때, 사람들이 열광하는 하나의 세계가 완성된다. 조금 과장하면 르네상스 시대 이래, 지금이 하나의 가치, 하나의 이야기를 경계없이 전달하는 다능인에게 활약하기 가장 좋은 시대일지 모른다. 전문가가 되기를 요구해 온 사회가 점차 다양한 직업 정의를 받아들이고 있으니까 말이다. 다만 <모든 것이 되는 법> 의 저자, 에밀리 와프닉(Emilie Wapnick) 말처럼 “단순한 변덕으로 얕게 이 우물 저 우물 주위를 맴도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각 분야를 탐험하고 몰입해야 한다”라는 것이 전제다. 앞서간 다능인들 역시 한 번에 그 세계관을 뚝딱 지었을 리는 없다. 이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스티브 잡스의 연설 속의 ‘지점의 연결’(connecting dots)이 가능했던 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이야기의 힘이나, 노동의 가치나, 환경에 대한 사랑이 진심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에밀리 와프닉 테드 영상 <Why some of us don't have one true calling>

 

Writer

넓고 깊게 이야기를 담고 싶은 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