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재즈 팬들은 쳇 베이커와 빌 에반스의 음악적 감성이 상당히 닮았다고 여긴다. 두 사람 모두 1929년생 동갑으로 한때 최고의 인기를 누린 재즈 뮤지션이었고, 마약 과용으로 힘든 말년을 보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함께 연주한 기회는 의외로 많지 않았다. 1958년에서 1959년 사이, 두 사람 모두 리버사이드(Riverside) 레이블과 계약 관계에 있으면서 대표 프로듀서 오린 킵뉴스(Orin Keepnews)의 주선으로 3일 동안 레코딩 세션을 가진 것이 전부다. 두 사람이 우연히 투어나 페스티벌에서 만났을 수도 있지만, 스튜디오에서 두 사람이 만났다는 기록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여기서 녹음된 12곡은 모두 쳇 베이커의 앨범 두 장에 수록되어 1959년에 발매되었다. 후일 <The Complete Legendary Sessions>(2009)란 제목으로, 컴필레이션 CD음반이 출고되기도 했다.

앨범 <Chet: The Lyrical Trumpet of Chet Baker>에 수록한 ‘Alone Together’

쳇 베이커의 전성기는 1950년대 중반이었다. 제리 멀리건의 ‘피아노 없는 쿼텟’에서 매력남으로 인기를 끌었고, 제리 멀리건이 수감되자 자신의 쿼텟을 결성하여 패시픽 재즈(Pacific Jazz) 레이블에서 ‘웨스트 코스트 재즈’의 인기 음반들을 냈다. 이때 그의 피아니스트는 웨스트 코스트를 대표하던 명 피아니스트 러스 프리먼(Russ Freeman)이었다. 한동안 유럽 투어로 많은 시간을 보낸 쳇 베이커는 1958년 미국으로 돌아와 리버사이드(Riverside) 레이블과 계약을 맺고 1년간 다섯 장의 음반을 냈다.

쳇 베이커의 리버사이드 음반 다섯 장을 모든 스페셜 LP 에디션

리버사이드의 대표 프로듀서 오린 킵뉴스는 당시만 해도 무명에 가까웠던 빌 에반스의 연주가 쳇 베이커의 감성과 잘 맞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를 스튜디오로 불렀다. 두 사람 외에도 허비 맨(Herbie Mann), 페퍼 애덤스(Pepper Adams), 주트 심스(Zoot Sims)와 같은 관악기 뮤지션들이 뉴욕의 스튜디오에 모여, 앨범 <Chet: The Lyrical Trumpet of Chet Baker>(1959)와 <Chet Baker Plays the Best of Lerner & Loewe>(1959)에 수록될 곡을 녹음하게 되었다.

앨범 <Chet Baker Plays the Best of Lerner & Loewe>의 ‘I Could Have Danced All Night’

두 앨범 모두 쳇 베이커의 노래를 들을 수 없는, 순수 연주 곡으로 구성되었다. 앨범 <Chet: The Lyrical Trumpet of Chet Baker>는 1958년 12월과 1959년 1월, 두 번의 세션에서 녹음되었는데, 모두 10곡의 발라드 중 8곡에서 빌 에반스의 피아노를 들을 수 있다. 그 다음 앨범 <Chet Baker Plays the Best of Lerner & Loewe>는 1959년 7월 21일과 22일에 열린 두 번의 세션 중 빌 에반스는 하루 세션에만 참여했다. 모두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구성된 8곡 중 4곡에서 빌 에반스의 피아노를 들을 수 있다. 그후 쳇 베이커는 유럽으로 건너가 이탈리아 투어에 나서 두 사람이 더 이상 스튜디오에서 함께 연주한 일은 없었다. 빌 에반스는 그 해 8월 마일스 데이비스의 <Kind of Blue> 녹음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두 장의 리버사이드 LP에 누락되었다가 <The Completely Legendary Sessions>에 수록된 ‘Early Morning Mood’는 쳇 베이커의 오리지널이다.

두 사람의 높은 인기를 반영하여 2009년 <The Completely Legendary Sessions>라는 제목의 컴필레이션 앨범이 출반되었지만, 빌 에반스의 팬들이라면 이를 듣고 실망할 수도 있다. 두 사람의 협업이 아니라 쳇 베이커의 프로젝트라 할 수 있고, 빌 에반스의 피아노 연주는 거의 반주 수준이거나 짧은 시간의 솔로 연주에 머무른다. 게다가 여기에 수록된 15곡 중 3번, 6번, 15번 트랙에서는 빌 에반스의 피아노 연주가 들리지 않는다. 두 사람의 협연 음반을 소장하려는 팬은 이 컴필레이션 음반을 구입하거나, 아니면 쳇 베이커의 리버사이드 레이블에서 낸 마지막 두 장의 음반을 구입하는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