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얼마만큼 관심이 있을까? 보통 생애주기를 요람에서 무덤까지 망라하는 발달 단계로 치면서도 어린이 시절은 빼놓고 얘기한다. 난 인스타그램에서 아이가 웃으면 귀엽다고 난리를 펴지만, 정작 어린이가 어떤 생각으로 사는지엔 무관심하다. 어린이를 우리 사회의 미래라고 떠받들지만 실상은 깍두기로 치부한다. 어린이를 보호의 대상으로만 여겨 개별적인 존재로 대우하지 않은 탓이다. 내가 한때 어린이였다는 이유만으로 쉬이 넘겨짚고, 세상모르는 미숙한 존재로 대상화한다.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소설과 영화와 같은 대중 매체도 마찬가지다. 어린이를 판에 박힌 이미지로 재생산하며 평면적으로 다룬다. 이렇게 별 고민 없이 어린이를 대하면 그들의 세계는 점점 더 헐거워질 수밖에 없다. 어린이를 주목해야 한다는 담론은 청년과 노년 세대의 문제만큼 다뤄진 적이 없다. 다시 한번 질문해봐야 한다. 지금 이 도시에서 어린이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오늘은 우리가 몰랐던 어린이의 세계를 집중적으로 그려낸 책을 소개한다.

 

<완벽한 아이>(2020)

<완벽한 아이>의 작가 모드 쥘리앵은 청년이 될 때까지 이해할 수 없는 감금 생활을 했다. 그의 아버지는 자식을 초인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교외에 거대한 집을 사들였다. 그리고 아내로 삼을만한 십 대 소녀를 인신매매하여 결혼한다. 그렇게 뒤틀린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가 작가 모드 쥘리앵이다. 모드는 어린이 때부터 기행을 일삼는 훈육 방식 아래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인간의 약점을 제거한다는 이유로 모드를 가둔 채 폭압적인 훈련을 강요했다. 미동도 하지 않고 전기가 흐르는 철책을 잡고 있거나(완벽한 아이의 프랑스어 원제는 <Derrière la grille>로, ‘철책 뒤에서’라는 뜻을 담고 있다), 아무도 없는 컴컴한 지하실에서 겁에 질린 채 몇 시간을 보내야 했다. 아무리 울고불고 살려 달라고 졸라도 아버지는 모드를 몰아붙였다. 다 널 위한 거라고 속삭이면서 자신은 당연한 듯이 호의호식했다.

​모드의 어머니는 딸과 같이 살면서도 딸의 고통을 방관했다. 늘 겁에 질려있던 어머니 역시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작품의 첫머리에 아버지에 의한 첫 번째 희생양으로 어머니를 지목한다. 어머니는 남편이 만든 시스템에 길들어 모드를 괴롭히는 데 동참했다. 아버지는 잔인하게도 모녀지간을 서로 경쟁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제로섬 게임에 몰아넣고 서로 견제하게끔 유도했다.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를 미워해야만 하는 상황을 견디다 못한 모드는 점차 쇠약해졌고, 아무런 희망도 기대할 수 없는 나날에 절망했다. 그렇지만 모드는 강간과 학대 그리고 세뇌와 이간질이 횡횡하는 극악한 상황에서도 절대 굴복하지 않았다. 생존을 위한 자신만의 방식으로 아버지의 폭력에 대항했다.

모드는 마당에서 키우는 동물과 사시사철 푸른 생명력을 자랑하는 식물과 교감하며 자신을 지켜냈다. 모드는 자신 있게 동물에게서 사랑을 배웠다고 말한다. 다음 문장은 말 못 하는 동물이 인간에게 얼마만큼 큰 위로를 가져다주는지 보여준다.

"동물들이 우리에게 기쁨을 가르쳐주기도 하는 걸까? 혼란스러운 중에도 나에게는 그런 커다란 행복의 샘이 있다. 놀라운 행운이다. 아르튀르를 보러 간다는 생각만으로 내 가슴은 애정과 즐거움에 부풀어 오른다. 혹은 아르튀르 곁을 지나간다는, 재빠르게 지나가며 행복에 젖은 아르튀르의 눈길을 받는다는 생각만으로도 그렇다. 밤마다 나는 발길질을 당하면서도 참을성 있게 버티던 아르튀르의 흔들림 없는 표정을 떠올린다. 나는 아르튀르를 사랑하고, 린다를 사랑한다. 린다는 아르튀르를 사랑하고, 아르튀르는 린다를 사랑한다. 함께 있을 때 우리는 강하고 아름답다. 물론 힘겹기는 하다. 그래도 함께하는 사랑의 순간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견뎌낼 수 있다."

모드는 매일 오전 수업이 끝나면 정원을 둘러보며 숨을 골랐다. 울타리밖에는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걸 끝없이 상기했다. 도시에서 살다 보면 빽빽한 일상에 시야가 좁아진다. 하지만 시간을 내어 자연으로 들어가서 살아남기 위해 고개를 든 동물과 만나게 되면, 그들이 뿜어내는 생명력에 저도 모르게 힘을 받는다. 모드는 좁디좁은 마당에서도 약동하는 생명을 놓치지 않았다.

아버지가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강요한 것 중에서 유일하게 문학과 음악만큼은 모드를 감화시켰다. 극악한 속박 속에서도 예술이라는 동아줄을 붙들고 놓지 않았다. 모든 사생활을 통제받는 상황에서도 콧노래처럼 흥얼거리는 예술적인 고양감을 즐겼다.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가 엄격하고 비인간적인 규율이 지배하는 신학교 생활을 견디지 못하는 주인공이 결국에는 사회에서도 적응하지 못해 죽임을 당하는 이야기라면, 모드 쥘리앵의 경우에는 더 극한의 상황에 몰리고서도 유서 깊은 클래식을 통해 취향을 길러냈다.

모드 쥘리앵은 이런 문장을 적었다. "삶은 두 종류의 나사송곳이다. 한 종류는 지금 있는 자리에서 지체 없이 땅에 구멍을 판다. 그런 나사송곳은 도중에 자갈이나 벽돌이 나와도 멈추지 않는다. 다른 한 종류는 좋은 땅을 고르는 것부터 시작하는 나사송곳이다." 모드는 비록 비옥한 땅에서 태어나지 못했지만, 끝없는 예술의 탐구를 통해 땅을 고르고 거름을 재워냈다. 자갈이나 벽돌에 송곳이 부러질 것 같아도 쉬지 않았다. 결국, 성년에 가까운 나이가 되어 부모를 탈출한 모드는 자신이 그토록 염원했던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리 잡는다. 어려서부터 읽은 문학을 토양 삼아 작가가 되었고, 힘든 삶을 영위하는 약자들의 편에 서는 의사로 살아가고 있다. 모드는 의지와 무관하게 가르침을 강요받았지만, 결국 어렵사리 감식안을 터득하여 스스로 구원했다. 아버지가 원했던 완벽한 아이가 될 수는 없었지만, 완벽하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존엄을 지닌 어른이 된 셈이다.

 

<어린이라는 세계>(2020)

어린이에 관한 책도 드물지만 오직 어린이 입장에서 쓴 책은 더 희귀하다. 김소영 작가의 에세이 <어린이라는 세계>는 어린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이해해보려는 책이다. 작가는 10년 남짓 어린이용 책 분야에서 일했고, 현재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독서 교육을 하며 사는 어린이 전문가다. 어른들에게 어린이들이 어른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하는지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설명해낸다.

​먹고사는 문제에 치여 낡아버린 어른의 눈과 달리 어린이는 당연해 보이는 세상일에도 매사 의문을 제기한다. 그걸 귀찮아하거나 조용히 하라고 꾸짖으면 어린이라는 세계는 잦아들게 마련이다. 작가는 물정 모르고 소란스럽기만 한 아이의 소란스러움 뒤에 더없이 다정한 사려가 숨어있음을 강조한다. 어린이는 누군가의 속내를 섣불리 짐작하는 대신, 말과 행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아이의 말에 무작정 고개를 끄덕이면서 맞장구치기보다는 정확한 이해를 통해 어린이를 하나의 존재 양태로 인정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오직 순수함의 표상으로만 아이를 보는 것을 경계하고, 어른의 틀로 재단하려는 심보는 버려야 한다. 어린이 역시 어른들처럼 제 나름의 방식을 삶과 맞서서 노력하고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아이의 심정을 넘겨짚지 말고, 어른의 경험에 빗대어 아이의 고통을 깎아내리지 말 것을 강조한다.

요즘 어린이들은 팬데믹으로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다. 어린이가 마음껏 놀 수 있는 권리가 사라졌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한산해진 놀이터와 문 닫은 교육센터가 눈에 띈다. 우린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을까. 가만히 좀 하라고 미간을 찌푸리고 있지는 않은가. <어린이라는 세계>의 결론은 명확하다. 어린이를 진지하게 대해야 한다. 귀여움에 웃음이 베어져도 꾹 참고 예의 있게 말을 꺼내 보자.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면 자세를 낮추고 정중히 물어봐야 한다. 어린이는 예나 지금이나 촉촉한 눈으로 세상을 주시하고 있다.

 

<다섯째 아이>(1988)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첫눈에 반한다. 통하는 게 많은 두 사람은 두 달이 채 되지도 않았는데 약혼을 한다. 임자 만났다는 말이 이런 것일까? 일사천리로 부모의 돈을 빌려서 저택을 구입하고, 서둘러 성대한 결혼식을 연다. 그리고 이어서 바로 아이를 잉태한다. 그것도 넷이나. 다복한 가정을 꾸린 부부의 집은 인산인해를 이룬다. 그들의 행복을 나눠 갖기 위해서일까? 부부는 경제적으로 시달리는 와중에도 자신들의 행복을 의심치 않는다. 다산의 여왕 해리엇은 혼신의 힘을 다해서 아이들을 키워내지만, 친정어머니 손을 빌리고 시댁의 경제적인 지원을 받고도 힘에 부친다. 그렇게 점점 지쳐갈 무렵 젊은 부부는 부주의하게도 다섯째 아이를 잉태한다.

​경악할만한 일이 발생했다. 갓 태어난 아이가 침팬지처럼 생긴 것이다. 남다른 발육으로 백일도 채 되지 않아 걷는가 하면, 몇 살이나 많은 형제의 손가락을 부러뜨리는 폭력 성향을 드러낸다. 이웃집 강아지를 죽이고는 마치 세상 다 가진 것처럼 웃어젖히는 아이를 보고 해리엇은 경악한다. 부부의 집을 찾던 이웃 친척들도 발길을 뚝 끊는다. 벤의 형제들 역시 위협을 느끼고 집을 피해서 하나둘 친척 집으로 떠난다. 부부를 도와주시던 양가의 부모님마저 두 사람에게 등을 돌린다. 데이비드는 일에 집착하며 집을 멀리하고, 해리엇은 견디기 어려운 양육의 고통에 시달린다.

작가 도리스 레싱은 두 번의 이혼과 세 명의 자녀를 키운 경험을 가진 작가다. 작가는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 행복을 추구한다는 순리와 같은 흐름에 제동을 건다. 성인이 되어서도 스스로 삶의 양태를 정하지 않고, 의심 없이 남들이 하는 것처럼 답습하는 삶에 의문을 제기한다. 전통적인 가치관을 아무런 의심도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과연 온당한 선택일까? 그렇게 받아들인 결과가 벤처럼 돌연변이에 가까운 아이라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다섯째 아이>는 앞선 두 책과 달리 어른의 눈으로 이해할 수 없는 어린이의 기행을 바라보는 무력한 시선이 도드라진다. 자신의 배로 낳은 벤에 의해 삶이 망가져 버린 해리엇은 지나치게 넓은 저택에 홀로 앉아서 생각한다.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어른들은 본능적으로 아직 어른이 되지 않은 아이를 무서워한다. 계산이 딱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예측 불가능한 존재는 불안을 자아낸다. 자식일 경우 영영 이해하지 못하면 어쩌나 고심한다. 소설은 문명을 이탈하는 돌연변이가 나타났을 때도 허울 좋은 교육의 가치를 논할 수 있는지 묻는다. 양육을 통해 사회에 적합한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순진한 계획을 배격한다.

도리스 레싱은 <다섯째 아이>를 발표한 지 12년 후인 21세기의 첫머리에 <Ben, in the World>라는 후속작을 발표했다. 돌연변이로 어디서 적응하지 못했던 벤이 결국 전 세계를 떠돌아다니면서 자신을 도외시하는 사람들을 관찰한 작품이다. 자신은 그저 그런 존재로 태어났을 뿐인데 비난하는 눈초리다. 다양성은커녕 조금만 달라도 배척하기 바쁜 이들이 도시를 가득 메우고 있다. 누가 누구를 이해한단 말인가? 혐오와 배척의 문제가 여전히 화두인 2022년 요즘, 아이들의 눈은 저 밑에서 천연히 어른들을 응시하고 있다.

 

Writer

영화와 책, 그리고 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쓴다. 지은 책으로는 <우리 각자 1인분의 시간>, <보내지 않을 편지>가 있다. 염세주의자가 되고 싶으나 하루 세끼 먹을 때마다 행복하다.
박민진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