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탄>(2021)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을 때 가장 많이 거론된 인물은 제인 캠피온이다. <티탄>의 쥘리아 뒤쿠르노 감독 전까지 칸 영화제에서 여성 감독의 작품이 황금종려상을 받은 건 제인 캠피온 감독의 <피아노>(1993)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영화 <브라이브 스타>(2009) 이후로 드라마 <탑 오브 더 레이크>(2013) 시리즈 연출에 집중하던 제인 캠피온이 <파워 오브 도그>(2021)로 돌아왔다. <파워 오브 도그>는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이후로 여러 시상식에서 유력 후보로 이름을 올리며, 관객과 평단의 찬사를 받고 있다. <스위티>(1989), <내 책상 위의 천사>(1990), <피아노>(1993)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여성을 보여주던 제인 캠피온은 <파워 오브 도그>에서 ‘남자다움’의 허상을 이야기한다. 세상의 통념 속에서 자신만의 신념으로 살아가는 인물들의 행보를 지켜보면서, 자연스레 내가 가진 편협함에 대해 생각해본다. 아름다움 화면 안에 곱씹을수록 여운이 강한 메시지를 심어둔, 제인 캠피온의 영화를 살펴보자.

<피아노>로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각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 각본상을 받은 (왼쪽부터) 홀리 헌터, 안나 파킨, 제인 캠피온, 이미지 출처 링크 – imdb

 

<스위티>

‘케이’(카렌 콜스턴)는 점쟁이로부터 ‘이마에 물음표가 있는 남자를 만난다’는 말을 듣는다. 케이는 직장에서 자신의 동료와 약혼한 ‘루이스’(톰 라이코스)의 물음표 모양 앞머리를 보고 점쟁이의 말을 떠올리며 그를 유혹하고 동거를 시작한다. 루이스는 사랑을 시작하는 걸 기념하며 마당에 나무를 심는데, 케이는 나무가 시들어버리면 불행한 징조가 될 것 같아서 루이스 몰래 나무를 뽑아서 감춘다. 어느 날 케이의 유일한 자매 ‘스위티’(제네비에브 레몬)가 남자친구 ‘밥’(마이크 레이크)과 함께 갑자기 케이와 루이스를 찾아온다. 스위티는 어릴 적부터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지는 아버지의 지지 하에 연예인을 꿈꾼다. 케이는 모든 게 제멋대로인 스위티가 자신의 집에서 나가기를 바라지만, 스위티는 자기 고집을 버릴 생각이 없어 보인다.

제인 캠피온의 시작은 컬트였다. 제인 캠피온의 영화 데뷔작 <스위티>(1989)는 칸 영화제 경쟁 부문 진출작으로, 시종일관 독특한 분위기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세상이 어떻게 생각하든 자신의 신념을 따라가는 제인 캠피온의 캐릭터는 <스위티>부터 시작되었다. 스위티를 연기한 제네비에브 레몬은 최근작 <파워 오브 도그>(2021)까지 제인 캠피온의 영화에 가장 자주 출연한 배우다.

<스위티> 트레일러 

케이는 자신의 운명을 점에 맡기기도 하고, 스위티는 세상이 뭐라든 자신이 연예인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많이 달라 보이는 두 자매의 공통점이라면 작은 가능성 때문에 힘들어한다는 거다. 케이는 나무가 죽으면 안 좋은 징조이니 아예 그럴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나무를 뽑아버리고, 스위티는 어릴 적 자신이 무엇을 하든 좋아해 주던 아버지처럼 세상도 자신을 사랑해줄 거라고 믿는다. 작은 가능성이 현실이 될 수도 있지만, 그 희망 때문에 단단한 일상이 망가지기도 한다. 이들의 삶이 달콤해지기 위해서는 실현하기 힘들어 보이는 가능성을 버려야 할까, 아니면 일상이 무너져도 작은 가능성에 희망을 걸고 버텨야 할까? <스위티>는 예쁘게 포장된 달콤한 사탕보다, 달콤할 줄 알았지만 깨물고 나면 쓴맛이 묻어나는 사탕 같은 영화다.

 

<내 책상 위의 천사>

오렌지 빛 곱슬머리를 한 ‘자넷 프레임’(케리 폭스)은 어릴 적 따돌림을 당하며 자란다. 자넷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에는 서툴지만 문학에 대한 재능과 관심이 크다. 이성에 대한 관심이 있음에도, 자넷은 서툰 자신의 모습을 들키기 싫어서 혼자 시간을 보내며 글을 쓴다. 자넷은 동경하는 교수로부터 정신 질환이 의심되니 병원에 입원하라는 말을 듣고, 교수의 말을 믿고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이로 인해 자넷은 8년 동안 정신병원에 갇혀서 수백 번의 전기충격 치료를 받는다. 자넷이 입원해있는 동안 자넷이 쓴 글은 세상으로부터 점점 인정받게 된다.

<내 책상 위의 천사>(1990) 속 자넷의 삶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비극적인데, 놀랍게도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제인 캠피온과 마찬가지로 뉴질랜드 출신인 자넷 프레임의 자서전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다. 성인 자넷 프레임을 연기한 케리 폭스는 뉴질랜드 배우로 이 작품이 데뷔작이다. 케리 폭스는 <내 책상 위의 천사> 이후로 대니 보일 감독의 데뷔작 <쉘로우 그레이브>(1994)과 마이클 윈터바텀 감독의 <웰컴 투 사라예보>(1997) 등에 출연하고, 파트리스 쉐로 감독의 <정사>(2001)로 베를린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는다.

<내 책상 위의 천사> 트레일러

자넷은 사람들과의 교류를 힘들어하지만, 그만큼 뛰어난 문학적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 편협한 사람들은 자넷의 사교성 부족을 병처럼 여긴다. 자넷은 그저 자신의 방식으로 삶을 살았을 뿐인데, 세상은 좀처럼 그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반짝이는 자넷의 삶은 주변 사람들의 편견과 방해로 인해 점점 원치 않는 방향으로 나아 간다. 한 명의 관객으로서 자넷의 수동적인 면을 보며 답답하다고 느낄 때도 있었는데, 나조차도 편협함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느꼈다. 신념을 따르는 인물의 삶을 보다가, 인물에게 장애가 되는 편협함을 나조차도 느끼고 있음을 깨닫고 반성한다.

 

<피아노>

남편 없이 어린 딸 ‘플로라’(안나 파킨)와 함께 살고 있는 ‘에이다’(홀리 헌터)는 6살 때부터 말하기를 그만두기로 결심하고 여전히 말을 하지 않는다. 에이다는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하게 되면서, 플로라와 함께 피아노를 포함한 짐을 챙겨서 배를 타고 뉴질랜드로 간다. 에이다의 남편 ‘앨리스데어 스튜어트’(샘 닐)는 마우리 족 동료 ‘조지 베인스’(하비 케이틀)와 함께 해안가에 도착해서 에이다의 짐을 옮긴다. 그러나 에이다에게 가장 소중한 피아노를 옮겨주지 않고, 에이다는 베인스에게 피아노를 옮겨줄 것을 부탁한다. 베인스는 에이다에게 피아노를 되찾을 방법을 알려 주면서 거래를 시도한다.

관객들에게 제인 캠피온은 곧 <피아노>(1993)로 기억될 만큼, <피아노>는 제인 캠피온의 대표작이다. <피아노>는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과 여우주연상을 받은 작품으로, 제인 캠피온은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첫 여성 감독이다.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각본상,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을 받은 영화로, 특히 안나 파킨은 11살에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홀리 헌터는 <피아노> 이후에 제인 캠피온의 드라마 <탑 오브 더 레이크>(2013)에 출연하며 오랜만에 재회한다.

<피아노> 트레일러 

<피아노>의 에이다는 외딴곳에 갑작스럽게 와서 기댈 구석 하나 없지만, 자신에게 소중한 피아노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누군가는 피아노가 대수냐고 할 수 있겠지만, 에이다에게는 피아노가 세상과 소통하는 역할을 한다. 제인 캠피온은 <스위티>(1989), <내 책상 위의 천사>(1990), <피아노>(1993)까지 연달아서 여성을 주인공으로 보여주며, 사회의 통념 속에서 자신의 길을 가는 인물들을 보여준다. 신념을 지켜내며 세상과 맞선 결과가 어떻든, 결국 자신의 가치를 지켜낸 이에게 패배란 없다. 제인 캠피온의 어떤 영화를 살펴보아도, 제인 캠피온의 영화 속 여성들은 계속해서 자신의 방식으로 전진 중이다.

 

<파워 오브 도그>

1925년의 미국 몬타나에서 ‘필’(베네딕트 컴버배치)과 ‘조지’(제시 플레먼스) 형제가 함께 목장을 운영 중이다. 필은 카리스마를 가진 무리의 수장으로 마초적인 면이 도드라지고, 동생 조지는 좀처럼 언성을 높이는 법 없이 얌전히 목장 경영을 살핀다. 필과 조지 일당은 남편을 잃고 아들 ‘피터’(코디 스밋 맥피)와 살아가는 ‘로즈’(커스틴 던스트)의 식당에 찾아간다. 이날을 계기로 로즈와 조지는 가까워지다가 결혼을 하고, 필은 로즈와 피터를 못마땅해한다. 로즈는 필 때문에 지쳐가는 가운데, 기숙사 학교에 있던 피터가 목장에 찾아온다.

<파워 오브 도그>(2021)는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작품으로, <브라이트 스타>(2009) 이후로 오랜만에 제인 캠피온이 연출한 영화다. 넷플릭스가 제작에 참여한 작품으로, 토머스 새비지의 소설이 원작이다. 주로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던 제인 캠피온 감독이 왜 남성으로 가득한 서부 영화를 찍을까 의문이 들 수도 있는데, <파워 오브 도그>는 ‘남자다움’의 허상을 다룬 작품이다.

<파워 오브 도그> 트레일러 

필은 장갑도 안 기고 맨손으로 소를 거세하는 등 자신의 거친 모습을 과할 만큼 주변에 표출한다. 반면 피터는 목장의 무리들이 아무리 자신을 남자답지 못하다고 놀려도 개의치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해나간다. 주변에 자신의 거친 모습을 과시하는 필은 오히려 혼자일 때 외롭고 연약한 면모가 드러나고, 피터는 겉으로 보기에 연약해 보일지 몰라도 언제나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단단한 모습을 보여준다. 필을 비롯한 목장의 무리는 자신들의 기준에서 남자답지 못한 피터를 계속 위협하고, 필은 피터를 보며 자신이 피터의 나이쯤 겪게 된 변화에 대해 말해준다. 필은 세상이 사람들을 위협하는 방식을 그대로 습득해서 타인을 위협하며 자신을 방어하고, 피터는 세상이 뭐라 하든 자신의 방식으로 살기로 결심한 듯 보인다. 나는 나를 방어한다는 핑계로 타인을 위협한 적이 있는가, 나는 누군가를 아프게 할 수 있는 통념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았는가? 묵직하게 다가오는 영화의 메시지를 느끼며, 제인 캠피온의 영화를 다시 찬찬히 살펴본다.

 

Writer

에세이 <나만 이러고 사는 건 아니겠지>, <달리다 보면> 저자. 좋아하는 건 영화, 여행, 음악, 문학, 음식. 특기는 편식. 꾸준한 편식의 결과물을 취향이라고 부르는 중. 취향을 바탕으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김승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