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많은 형태의 직업이 있지만, 누구나 한 번쯤 커리어와 관련된 위기를 겪는다. 극단적으로는 하루아침에 헌신했던 직장에서 해고 통보를 겪는다던가, 직장 내부에서 한직으로 밀리고 대우가 나빠지는 경우가 있겠다. 또한 사명감으로만 헤쳐나가기 녹록치 않은 업무에 대한 고충이나, 매너리즘에 빠져 직무 적합성을 고민하는 일도 꽤 심심찮다. 하는 일,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회의가 밀물처럼 밀려들 때 이야기 속의 인물들을 통해 영감을 얻어보는 건 어떨까? 잠시 현실에서 자신을 분리해 이야기 속에 빠져드는 동안 불안한 감정은 한 차례 갈무리되고, 내일을 위한 의욕이 샘솟아 오르기도 하니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벼랑 끝에서 찾은 의미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직업을 잃은 사람들 <찬실이는 복도 많지>, <아메리칸 셰프>

직업의 가장 큰 이유를 꼽으라면 아무래도 생계유지와 자아실현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모든 사람이 그 두 가지를 직업에서 충만하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주인공 ‘이찬실’과 <아메리칸 셰프>에서 요리하는 ‘칼 캐스퍼’는 그런 삶을 살았었다,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오랫동안 몸 담갔던 직장에서 내쳐지기 전까지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스틸컷

이 둘은 중년의 초입에서 배신감과 허무함으로 방황하게 되지만 치열한 전선에서 잠시 물러나 강제로 숨 고르기 시간을 갖는다. 찬실은 ‘일만 하고 산’ 영화 외길 40년에서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친한 배우 ‘소피’네서 가사 도우미 일을 시작하고, 칼은 전처의 남편에게 중고트럭을 구매해 푸드트럭에 도전한다. 영화 현장에서 유능한 프로듀서와 일류 레스토랑 주방에서 호랑이 메인 셰프였던 이들이 과거의 영광에 비하면 너무 초라한 현실을 맞닥뜨린 게 아닐까, 절망하는 인물에 동화된 마음은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그들의 희망찬 발걸음과 함께 다시 피어난다. 꿋꿋하게 버텨온 세월이 모여 완성된 그들의 커리어는 그들 주변에 좋은 동료를 남기고, 인생의 2막을 기약할 수 있는 단단한 마음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젊은 날의 일을 향한 그들의 진한 열정은 결국 반짝이는 보석이 되어 새로운 길을 열어준 셈이다.

<아메리칸 쉐프> 스틸컷

 

 

계란으로 바위 치기, 깨져도 떳떳한 사람들

조직 내 약자들의 끈기 있는 반란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사회 초년생 시절을 지나 연차가 높아질수록 ‘나는 조직의 톱니바퀴 중 그저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업무의 흐름과 조직의 생리를 수용하고 그저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회사의 마지막이 달린 미션을 받는다면? 회사에서 나를 팽하지 않을까 발버둥을 치다 회사의 치부를 발견한다면?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왼쪽),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오른쪽) 스틸컷

<라이프> 매거진에서 16년을 근무한 ‘월터 미티’와 삼진그룹 입사 8년 차 만년 사원 ‘이자영’은 갑작스럽게 직장에서 혼자만의 비밀이 생긴다. 월터는 <라이프> 마지막 호 표지를 장식할 사진을 잃어버려 그것을 찾는 모험을 떠나게 되고, 자영은 사랑해 마지않는 회사가 불법 폐수 방류하는 모습을 목격한 뒤 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골머리를 앓는다. 사진을 찾는 여정은 상상보다 화려하지만, 월터의 해고는 번복되지 않는다. 자영 역시 든든한 친구들과 여러 통로로 문제를 바로잡아 보려 하지만 번번이 높은 벽에 부딪힌다. 다만 월터는 자신을 해고한 새로 온 상사에게 눈을 바라보며 하고 싶은 말을 남길 수 있는 사람으로 변했고, 사건을 은폐하려는 사람들을 저지한 자영과 친구들은 토익을 무사히 치고 대리가 된다. 누가 봐도 이길 수 없는 상대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약자들의 반란을 보고 나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행동하고 싶어진다.

 

우공이산, 우직한 사람들이 바꾸는 세상

직업의 이유를 고민하다 <더 포스트>, <라이브>

직업에 귀천은 없지만, 사명감 없이는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 직군이 있는 것 같다. 신문사에서 벌어지는 첩보 실화 <더 포스트>는 최초 여성 발행인 캐서린 그레이엄과 베트남 전쟁 관련 펜타곤 페이퍼를 입수한 편집장 벤 브래들리의 이야기이다. 가족 사업인 ‘워싱턴 포스트’, 이사회에서 다소 무시당하는 자신의 지위, 회사에 생계가 달린 직원들 등 캐서린의 어깨를 무겁게 하는 요소들은 많지만, 결국 그는 벤과 팀원들의 의지를 믿고 나라를 뒤집는 일을 강행한다. 2시간 남짓의 영화 한 편을 통해 건강한 언론이 행사하는 영향력에 감사하게 되고, 각자의 자리에서 하는 일이 과연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인가, 최소한 해를 끼치지 않는 일인가 생각하게 된다.

<더 포스트> 스틸컷

시리즈 <라이브>에는 몰랐던 한국 경찰의 희로애락이 담겨있다. 국민을 위한 경찰들의 노고는 물론이고, 현장에서 그들이 느끼는 두려움과 그런데도 사건의 중심으로 달려야 하는 직업의 운명을 생생하게 그렸다. 생과 사의 전선을 일상에서 가장 가깝게 느끼는 그들과 공명하고 나면, 그 긴박함이 전염되어 냉철하게 빠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추진력을 얻게 된다. 당연시 여겼던 안전한 생활이 경제적으로는 치환되지 않는 누군가의 사명감 덕분에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 자신의 삶을 더 가치 있게 해주고 인생의 본질에 다가서게 해주는 것 같다.

<라이브> 포스터 & 방송 화면

이야기의 장점은 한 사람이 살면서 겪기 힘든 다양한 경험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혹은 각자의 경험을 이야기 속 인물에 투영하면서 위로를 얻거나 해결책에 대한 영감을 얻을 수도 있다. 작든 크든 일에 대한 고민은 아마 평생에 거쳐 우리를 따라올지도 모른다. 그 고민에 스스로 중심을 잃고 매몰될 것 같을 땐, 영화 한 편, 드라마 정주행만큼의 숨 고르기를 하며 잠시 다른 인생을 엿보는 것이 숨을 틔워주기도 한다. 다듬어서 만들어진 픽션 속 인생의 굴곡은 지혜를 안전하게 빌려올 수 있는 아카이브 같으니까.

 

 

Writer

넓고 깊게 이야기를 담고 싶은 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