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극적인 마라 맛과 불닭이 휩쓸고 지나간 빨간 맛의 시대, 그와는 대척점에 있을 것 같은 슴슴한 맛에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다. 한 자리에서 오랜 업력을 쌓으며 묘한 중독성으로 단골을 탄탄히 확보한 식당들이 그 주인공이다. 이 인기는 재료 본연의 맛을 극대화하는 레시피를 기반으로 하고 있고, 양념과 향신료로 가릴 수 없는 부분이다 보니 깔끔하고 좋은 재료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신뢰가 간다. 밍숭맹숭 슴슴한 맛은 열탕에서 ‘시원하다’고 말할 수 있는 어른들의 전유물인 줄 알았는데, 성별과 나이에 상관없이 많은 사람이 이 맛에 서서히 빠져들고 있다. 레트로 열풍과 높아진 미식 기준으로 뜨거운 감자가 된 슴슴한 맛의 세계. 출구 없는 매력에 롱런하는 5곳을 소개한다.

 

 

첫입에는 잘 몰라요! 줄 서서 먹는 평양냉면, 을밀대

서울 마포구 염리동에 있는 본점은 50년 가까이 지켜온 평양냉면의 맛을 보러온 사람들로 꽉 차 있다. 메밀가루와 고구마 전분을 섞어 만든 면발의 쫄깃한 식감과 고소한 국물을 찾아온 사람들이다. 처음에는 밍밍한 국물맛에 식초와 겨자를 곁들이지만, 계속 먹을수록 원래의 감칠맛이 생각나 다시 도전하게 된다. 취향에 맞게 간을 하기 전 특유의 슴슴한 맛과 친해지려는 노력을 들이고 나면 그 맛에 빠져 날씨에 상관없이 냉면집 단골이 되는 것이다. 그래도 조금 허전하다면, ‘을밀대’의 녹두전이 좋은 조합을 완성하는 키가 된다. 바삭한 맛은 살아있고 녹두전 하면 떠오르는 텁텁함은 거의 없어 곁들여 먹어도 부담스럽지 않다. 전 속에 큼직이 썰린 고기가 느껴져 씹는 맛이 배가 된다. 원래는 미식가나 지긋한 어르신들이 찾았던 평양냉면이 이제 2030세대에게도 힙한 맛으로 통하고 있다. 평양냉면의 전성시대 중심에 선 을밀대의 자부심이 젓가락에 새겨진 한자 세 글자에서도 느껴진다. 50년 뒤에도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을 충실한 맛이라 ‘백 년 가게’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다.

을밀대 평양냉면 (본점)

전화 02-717-1922
주소 서울 마포구 숭문길 24
영업시간 11:00~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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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마다 다른 재료를 찾아내는 추리 게임, 자하손만두

깔끔한 주택형 식당 ‘자하손만두’는 1993년부터 부암동을 지켜온 만두 전문점이다. 인왕산 자락에 자리를 잡아 경치도 자연 친화적이지만 만두에서 느껴지는 재료 하나하나에 신선함을 느낄 수 있다. ‘미쉐린 가이드 2022’에도 빕 구르망-합리적 가격에 훌륭한 음식 선정-으로 선정되었는데 직접 담근 조선간장으로 맛을 낸 삼삼한 국물을 특징으로 소개하고 있다. 첫 방문이라면 우선 모둠 만두로 어떤 속 재료가 취향에 맞는지 찾아보는 재미를 느껴보는 건 어떨까? 종류별로 숙주, 두부, 고기 등 다양한 재료가 살아있어 쉽게 유추할 수 있다. 모둠 만두로 만두 본연의 맛을 즐겼다면, 이제는 뽀얀 고깃국물에 색색깔 화려함을 더한 떡만두국 차례다. 채소로 즙을 내어 완성한 삼색 만두와 귀여운 조랭이떡은 숟가락을 번갈아 부지런히 움직이게 한다. 이쯤 되면 계절 메뉴도 궁금해져 그 다음 방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자하손만두

전화 02-379-2648
주소 서울 종로구 백석동길 12
영업시간 11:00~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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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도 높은 하얀색이 뜨끈하게 채우다, 연희동 칼국수

연희동 ‘사러가 마트’ 근처에 항상 주차장이 북적이는 3층 건물이 있다. 바로 ‘연희동칼국수’다. 사골육수에 동그란 면발과 야채 고명을 올린 것이 특징인 칼국수, 그리고 조금 더 양이 많은 칼국수 (대), 수육이 메뉴의 전부이다. 다소 좁은 직경에 일자로 떨어지는 도기 대접은 배를 꽉 채울 만큼 든든한 양을 담고 있고, 밑반찬 겉절이와 백김치는 각각 다른 매력으로 입안을 개운하게 정리한다. 고명과 곁들여 면치기를 하고서 국물과 김치를 남김없이 먹다 보면 속부터 몸이 따뜻해진다. 복작복작하지만 주차장이 넓고 전담 관리해주시는 분들이 계시기 때문에 주차 걱정은 넣어둘 수 있다. 대기가 있더라도 메뉴 특성상 회전율이 빠른 편이고 브레이크 타임이 없어 근처를 지난다면 꼭 도전해볼 만 하다.

연희동 칼국수

전화 02-333-3955
주소 서울 서대문구 연희맛로 37
영업시간 11:00~21:00 (월요일 정기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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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으로 승부하는 한상차림, 선한 레시피

요즘엔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가정간편식으로 한식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살아있는 자연식이 고플 때면 따뜻한 차에 정갈한 상차림으로 채우는 ‘선한 레시피’를 찾게 된다. 개성 있는 도자기 그릇에 담긴 연잎 정식은 짜거나 맵지 않아도 충분히 다채로운 맛을 낸다. 연잎 향이 은은하게 밴 쫀득한 밥을 중심으로 모자라지도 과하지도 않은 한식 반찬으로 든든해진다. 짜지 않고 버섯이 듬뿍 들어간 구수한 된장찌개, 밀가루 공백이 보이지 않는 부추전은 공략 1순위로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어린이에게도 어렵지 않고 노인분들도 무난히 소화할 구성이라 그런지 항상 가족 단위 손님들이 눈에 많이 띈다. 이곳은 동네 주민들의 사랑을 받는 맛집으로 분당 정자동 본점과 판교점 두 곳에 운영 중이다.

선한 레시피 정자본점

전화 031-719-3312
주소 경기 성남시 분당구 불곡로13번길 1
영업시간 11:30~21:00 (일요일 정기휴무) | 15:00~17:30 브레이크 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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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구이로 시작하는 속 편한 든든함, 인제 고향집

강원도 인제에 갈 일이 있다면, 아니 강원도 어딘가로 여행을 계획한다면, 돌아가더라도 여기는 꼭 들려야 한다. 용도와 식감에 따라 많은 종류의 두부 제품을 마트에서 고를 수 있지만, 여전히 노하우가 깊은 손두부 장인의 ‘고향집’은 따라올 수 없기 때문이다. 들어서자마자 진하게 풍기는 들기름 향에 두부구이는 기본이고 두부 전골에 수육을 추가한다. 밑반찬 하나하나 여기서만 만날 수 있는 맛으로 원래 나물, 김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새로운 기호에 눈을 뜰지 모를 정도다. 특히 비지 샐러드는 여기저기서 ‘더 주세요!’를 연발하게 만드는 시그니처이다. 불은 하나만 쓰기 때문에 구이와 전골이 동시에 나오지 않아도 놀라지 마시길. 애피타이저처럼 노릇노릇 튀기듯 구운 두부를 먹고 나면 빨간 빛깔에 비해 담백한 맛의 두부 전골이 준비된다. 수육은 숭덩숭덩 썰려서 쌓여있는데 기름기가 촉촉하고 잡내가 나지 않는다. 이 세 가지 메뉴를 싹싹 비우면 건강한 단백질 일주일치를 몰아서 채운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고향집 (인제)

전화 033-461-7391
주소 강원 인제군 기린면 조침령로 115 고향집
영업시간 09:00~20:00 (매월 세 번째 수요일 정기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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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간 사랑받는 슴슴한 맛집들은 계속 생각나는 자연스러운 감칠맛으로 살아남는다. 인생에 단 한 번 강렬하게 혹은 사치스럽게 즐기는 음식이 아니라, 속을 든든하게 채워주면서 더부룩한 불편함은 남기지 않는 깔끔함이 멀리서도 다시 찾게 만드는 힘이 아닐까? 화려하고 힘을 준 옷으로 인생 사진을 찍고 돌아온 후 몸에 착 감기는 파자마로 포근함을 놓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쉽게 끼니를 때울 수 있는 세상이지만, 몸을 바로잡고 허한 기분을 차곡차곡 채우는 밀도 높은 슴슴한 맛이야말로 일상에서 누리는 진정한 셀프 케어가 된다.

 

모든 이미지 네이버 지도 발췌 및 직접 편집

 

Writer

넓고 깊게 이야기를 담고 싶은 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