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채플린의 무성영화가 그랬듯 동작의 일면은 생각보다 많은 사실을 알려준다. 무언(無言)은 결코 언어의 부재가 아니다. 하물며 대화 또한 완성형이 아니다. 언제나 결핍이며 그래서 오해를 낳지만 덕분에 세상은 다채롭다. 저마다의 창으로 우리는 어떤 한 객체를 상정하고, 일부를 통해 전체를 이해하기 마련이다. 곧 세상은 편집이다. 부작용과 작용의 영역을 제쳐두고서라도 그러하다.

공간은 어떠한가. 완공(完工)이라 표현하나, 인간이 없다면 공간은 불완전의 영역에서 탈피하지 못한다. 결단코 아무것도 될 수 없다. 감각할 주체가 없다면 객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시뮬레이션이다. 메타버스 운운하는 세상이지만 감각의 영역은 여전히 현실에 있다. 공간의 개념이 도전받는 상황임에도 주도권은 여전히 몸의 감각에 존재하며 지금도 새로운 공간들이 현실에서 끊이지 않고 배태한다. 다만 인간의 감각은 공간의 모든 요소를 단번에 받아들일 수 없다. 공간의 크기에 비해 인간은 작고 연약한 탓에.

종국엔 이 간격을 메워야 하는바, 공간을 설계하는 사람이 있다면 공간을 포착하는 사람도 있을 테다. 아니, 더 정확히는 설계자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공간의 표정을 기어이 알아차리는 작업자가 필연적으로 필요하다. 설계도면을 그리는 대신 카메라로 공간을 현상함으로써 다른 의미로 실체를 구현하는 사람. 그렇게 평면에 부피를 입히고 이차적인 ‘공간감’을 부여하는 이. 공간과 건축물을 전문으로 촬영하는 사진가 최용준의 이야기다.

리퍼크, @reperk_coffee, © 최용준

단순히 피사체를 담는다고 표현하기엔 최용준의 시선은 어쩐지 주목해볼 만한 구석이 있다. 그는 물성이 서로 다른 마감재의 결과 결이 만나는 ‘겹’의 지점을 예리하게 포착해낸다. 그래, 그의 장점은 ‘의외성’이다. 설계자가 놓친 장면을 새롭게 창조한다. 흘러가듯 지나칠 수 있는 사물의 물성을 생경한 무엇으로 승화시킨다. 그것이 그의 예술성이다. 그리하여 공간은 비로소 실체화된 ‘작품’으로 남는다. 한마디로 그의 작업은 공간을 있는 그대로 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진이라는 매체로 공간을 작품화하는 차원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느와르 라르메스 플래그십스토어 가로수길, @noir_larmes, © 최용준

작품을 작품화한다는 말에, 본래의 형태를 필요 이상으로 미화하는 시도가 아니냐는 의문부호가 붙을 수 있다. 다만 사진이 형상 그대로를 구현하는 일이 아니고 형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라는 합의에 이른다면 그는 사진의 또 다른 본질에 충실한 작업자에 불과하다. 다만 빤하지 않을 뿐이다.

비담, @cafe_bidam, © 최용준

우리는 눈 맞춤으로 타인의 영혼 깊숙이 다가서고, 손아귀 모양새로 상대의 마음 상태를 나지막이 가늠한다. 이렇듯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은 꽤 미시적이고 집요하다. 앞서 말했듯 우리가 부분을 전체를 이해하는 잣대로 삼기 때문이다. 영화마저 하나의 대사로 기억되곤 하는 법이니 인간이 사물을 인식하는 과정을 구태여 탓할 모양새는 아니다. 이는 인간의 한계인 동시에 잠재력이기도 하니까.

그랑핸드 마포, @granhand_official, © 최용준

따라서 이러한 인식의 과정을 어떻게 작업물로 표현해내는지가 중요하다. 최용준의 시선이 벼린 날처럼 예리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가 포착한 어떤 한 장면은 특정 공간의 결을 대변하기에 충분하다. 그 덕에 한 공간을 받아들이기 위해 애써 전경 전부를 볼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된다. 어쩌면 그는 의외성이라는 무기로 핍진성이라는 진리에 도달하는 게 아닐까 싶다.

한지문화산업센터, @hanjicenter, © 최용준
스페이스독, @spacedog.official, © 최용준

업계(그에게는 클라이언트가 되는 인테리어디자이너, 건축가, 브랜드 디렉터 등)에서는 그의 작업을 두고 다양한 시각으로 한 공간이 가진 고유의 콘텍스트를 선명하게 풀어낸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바꿔 말하면 시점의 다채로움은 자연히 공간 구석구석에 자리한 여러 소재를 부각하며 공간의 분위기를 왜곡되지 않게 드러낸다. 분위기라는 막연한 설렘은 곧 실체화된 감각을 길어 올리는데, 그게 바로 우리가 이야기하는 공간감이다.

윤 서울, @yun.seoul, © 최용준
사뿐 명동스테이지, @sappun_korea, © 최용준

한편 최용준은 자신의 작업방식을 이렇게 대변한다. “내부를 촬영할 때는 해당 공간의 특징적인 디자인 요소나 분위기를 파악하는 일이 먼저입니다. 외부에서는 시점의 확보라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건축물의 조형성을 드러내거나 주변과의 맥락을 드러내는 장면이 있을 수 있는데, 그 장면을 찍을 수 있는 시점이 공공의 영역이 아닌 경우 여러 변수가 생깁니다.”

솔드아웃, @soldout_musinsa, © 최용준
을지다락, @eulji_darak, © 최용준

내외부를 구분 지어 설명했으나 공간이 서로 다른 사물들의 관계로 이루어지는 집합이라고 본다면, 내부에서도 시점의 중요성은 일관되게 작용한다. 아닌 게 아니라 실제 공간 속에서 그의 시선을 추적하고 있노라면, 고요하게 잠긴 공간의 표정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이후에 공간의 성격을 어떻게 결론지을지는 방문자의 몫이다. 공간에 대한 해석은 사람마다 다르니까.

뱀포드 더현대서울점, @bamford © 최용준
갓포아키 삼성점, @kappo_akii © 최용준

그런데도 단 하나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 공간의 이상은 파편화된 물질과 상처 입은 인간이 합일을 이루어 달성된다는 점이다. 이질적인 것들이 공백 사이사이에 살아 숨 쉬며 이타적인 것들로 변모하는 가운데, 어지러이 흩어진 자신의 감각을 활성화하는 일. 공간은 바로 그런 개념과 맞닿아 있기에 개별 요소는 비로소 서로를 연대하는 쪽으로 진화한다. 결국, 최용준은 이러한 틈입의 품을 자신도 모르게 걸머쥐고 있는 노릇일지 모른다. 렌즈라는 자신의 또 다른 망막에 기대서 말이다.

하나금융 하나클럽, @hanafn.official, © 최용준
보사노바 커피로스터스 삼척점, @bossanova_coffee_roasters, © 최용준

 

모든 이미지 © 최용준

 

최용준 인스타그램

 

Writer

일상이 계기가 된다고 믿었던 사람. 망상을 철칙으로 삼았던 사람. 언젠가 현실주의자가 되고픈 염세주의자.
서인원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