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스파이 소설의 거장 '존 르 카레'는 2020년 말,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그는 냉전이 한창일 때 영국 정보부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다수의 스파이 소설을 썼다. 선과 악이 모호한 회색지대를 사실적인 필치로 그려내며 숱한 걸작을 남겼고, 몇몇 작품은 영화로 제작되어 큰 성공을 거뒀다. 존 르 카레의 작품에 나오는 정보요원은 우리 흔히 아는 이언 플레밍의 화려한 소설과는 판이하다. 그보다는 창문 없는 사무실과 켜켜이 쌓인 서류철을 배경으로 뿔테 안경에 포마드를 잔뜩 바른 화이트 칼라 사무직에 가깝다. 그래서 존 르 카레의 소설을 읽다 보면 작가 'C. S. 루이스'가 묘사한 현대의 악을 떠올릴 수 있다. "오늘날 실제로 악을 구상하고 지시하는 일은 카펫이 깔린 깨끗하고 환한 사무실 내부에서, 흰색 와이셔츠에 잘 정리된 손톱과 매끈히 면도한 얼굴로 좀처럼 목소리를 높일 필요 없이 묵묵히 일하는 사무직원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처럼 존 르 카레의 작품은 사무적인 디테일 속에 오랜 세월 같은 일을 해온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무심함이 배어진다. 물론 번지르르한 외향 속에 감춰진 속사정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쥐도 새도 모르게 살생을 하고 국익을 위해 온갖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는 냉혹한 스파이들은 옳고 그름을 명확히 가려내지 못한 채 고뇌한다. 결국 존 르 카레는 특수한 상황에 놓인 스파이도 우리와 다를 바 없이 먹고사는 문제에 치여 악행에 잠식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은 냉전 시대에 활동한 스파이들을 리얼하게 다룬 작품들로 유명한 존 르 카레의 1주기를 맞아 그의 대표작 세 편을 소개한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1974)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말쑥한 트렌치코트에 검은 가죽 가방을 든 스파이 '존 스마일리'의 출근길로 시작한다. 그는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독한 커피를 마시며 시무룩한 표정으로 담배를 꼬나물고 타자기를 친다. 조도가 형편없는 형광등 아래서 열심히 뭔가를 들여다보는 스마일리의 무표정은 그가 얼마나 닳고 닳은 사람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의 일터는 마치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처럼 서늘한 정적이 머문다. 사무용 의자에 등을 기대고 상관의 사무실과 벽걸이 시계를 번갈아 바라보는 모습을 영락없이 오늘날의 샐러리맨의 자화상과 같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존 스마일리는 소련 정보부와 각축전을 벌이는 영국의 일급 정보 요원이다.

존 스마일리는 우리가 스파이라고 하면 의례 떠올리는 제임스 본드와 같은 매끈한 외모와는 가장 거리가 먼 인물이다. 단신에 배가 불뚝 나온 스마일리는 누구의 주목도 받지 않을 만큼 평범하다. 하지만 소설을 읽다 보면 그가 왜 존 르 카레가 창조한 인물 중에서 가장 유명한지 알 수 있다. 조용한 성미에 감춰진 신중함과 민첩함, 사소한 단서들로 그림을 그려내는 학자와 같은 태도는 현실적인 스파이의 모습을 추측케 한다.

존 스마일리는 정년퇴임을 눈앞에 둔 베테랑 스파이다. 젊은 시절의 총기가 사라지고 조직에서도 뒤안길로 밀린 스마일리는 외도하는 아내를 붙잡지 못할 정도로 무기력한 상태다. 그저 하루하루를 습관처럼 버텨나갈 뿐 별 수가 없다. 스마일리도 소싯적에는 옥스퍼드 출신으로 촉망받는 인재였다. 그는 이른 나이에 정보부에 들어와서 화려한 경력을 쌓았지만 지금 그에게 남은 건 연금 액수를 보장하는 근속 경력뿐이다. 아내의 외도를 알아채기 전까지만 해도 하와이풍 셔츠를 입고 여행지에서 레모네이드나 마시는 삶을 꿈꿨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 꿈마저도 산산조각 나버렸다.

스마일리는 늘 음지에서 국가를 위해 일해온 제 노고가 인정받지 못하는 작금의 현실에 적잖이 당황한 눈치다. 정보부 직원 특성상 제 삶이 타인에게 노출되지 않는다는 게 젊은 시절엔 특권으로 여겼지만, 은퇴를 코앞에 두고 보니 아무도 자신의 노고를 몰라봐 준다는 사실이 서글프기만 하다.

그렇게 매일 퇴직만 기다리던 스마일리 앞에 두더지라 불리는 소비에트 연방의 이중간첩이 존재를 드러낸다. 평소 그를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정보부 고위 관료들은 다시 존 스마일리의 업적을 우러르며 소련 정보부의 수장 ‘카를라’와 상대하는 임무를 맡긴다. 잠잠하던 사무실에 긴장감이 맴돌고, 넋이 빠져있던 스마일리의 미간이 잔뜩 구겨진다. 그는 늘 그래 왔듯 자신의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기계적으로 수사에 돌입한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화려한 총격전이나 첩보 액션 없이도 외교전과 사무실 내의 정치 역학 그리고 개인 간의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의 사슬을 풀어내며 서스펜스의 강도를 높여간다.

 

<모스트 원티드 맨>(2008)

독일 함부르크는 정부의 빈민 정책으로 난민들이 모여들어 골치를 썩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런 혼란상 속에 국제 스파이들이 독일로 스며들면서 상황은 더 복잡해졌다. 실제 9·11 테러범들도 함부르크를 전초 기지로 썼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각국의 정보기관까지 모두 모여든 형국이다. 그런 와중에 불법 체류 난민에 섞여 들어온 한 사내가 함부르크 정보부 요원 ‘바흐만’의 레이더에 잡힌다. 온몸에 상처가 나 있고 정신적으로도 불안해 보이는 무슬림 청년 '이사'는 아버지의 유산을 찾기 위해 독일에 왔지만, 바흐만의 정보원의 첩보에 의하면 그 돈은 러시아 마피아의 비자금으로 넘어갈 예정이다. 바흐만은 이사를 돕는 인권변호사 ‘아나벨 리히터’와 비자금을 숨겨둔 은행장 ‘토미 브뤼’까지 정보원으로 포섭하여 이사를 미끼로 삼아 그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를 테러범의 흔적을 추적해나간다.

바흐만은 고민한다. 이사는 테러리스트들의 자금줄 역할을 하는 닥터 압둘라의 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하는 실마리지만, 그와 동시에 더 큰 비극을 막을 수 있는 매개자이기도 하다. 누구도 다치지 않고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한 바흐만은 회유와 타협을 통해 상황을 타개하려고 한다.

<모스트 원티드 맨>의 바흐만은 베를린에서 스파이 생활을 하다가 작전상의 실수로 독일 대테러 정보부서에서 일하게 된 정보 전문가다. 딱 봐도 결혼은 실패했고, 자식도 없어 보인다. 치솟던 권력욕도 꺾였고, 변방에서 제 할 일이나 하며 사는 별 볼 일 없는 작자다. 담배와 술을 달고 사는 그에게 유일하게 남은 건 일이다. 베테랑 정보 요원으로서 기여할 수 있는 바가 있다고 믿고 있다. 그건 직업인으로서의 윤리를 지키는 프로페셔널한 방식이고, 죄 없는 이를 다치지 않게 하는 정도의 최소한의 선의다. 이처럼 <모스트 원티드 맨>은 무엇이 정의인지 말하는 것이 우스워진 국제 정세의 소용돌이에서 과연 인간은 어떻게 존엄을 지킬 수 있는가를 묻는 소설이다.

 

<리틀 드러머 걸>(1983)

냉전 시대를 배경으로 한 무수한 작품을 써낸 존 르 카레는 소련 붕괴 이후에는 초점을 여러 곳에 두며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모스트 원티드 맨>이 포스트 9·11 시대의 국제 정세를 그려낸 비교적 최근 작품이라면, <리틀 드러머 걸>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사태를 배경으로 한 1983년 작품이다.

연극배우 ‘찰리’는 중동인 남자 요제프를 만나서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요제프의 정체가 이스라엘 정보부 요원임을 알게 되지만, 그를 향한 감정은 더욱 깊어만 간다. 찰리는 마치 수순처럼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 단체의 이중간첩으로 잠입을 시도한다. 항상 삼류 배우로 살아온 경력을 뒤엎고, 사랑을 쟁취하며 끝내 완벽한 실전을 겪어보겠다는 욕망이 겹치면서 찰리는 걷잡을 수 없이 분쟁의 한가운데로 빠져든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은 영국의 외교 실책이 빚은 참사지만, 그로 인해 무수한 민간인이 죽어나갔다. 두 민족을 전쟁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제1 세계의 강국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자금줄을 쥔 이스라엘의 폭력적인 시오니즘을 묵인하고 있다. 4차에 걸친 중동전쟁은 온갖 비극적인 사건을 불러왔다. 존 르 카레는 뉴스 보도로만 접했던 중동전쟁의 한 복판에 무명의 배우를 데려다 놓고 두 나라의 입장을 모두 들어본다. 첩보 행위라는 외형 속에 감춰진 두 민족의 속사정은 결국 전쟁이라는 것도 개개인의 문제에 불과하다는 것을 상기한다. <리틀 드러머 걸>은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의 근본적인 문제점과 그 너머 서구의 이기주의를 신랄하게 지적하면서도 한 개인의 사랑과 야망을 다룬다는 점에서 거시와 미시가 모두 빼어난 드문 작품이다.

‘리틀 드러머 걸'이라는 소설의 제목이 아리송한데, 이 소설을 드라마로 연출한 박찬욱 감독은 이에 대해 "작품의 주인공인 여배우 찰리는 낭만에 이끌려 참혹한 전쟁에 참여하게 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순진한 아이, 혹은 어른들에게 이용당하는 아이라는 의미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메인 이미지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스틸

 

Writer

영화와 책, 그리고 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쓴다. 지은 책으로는 <우리 각자 1인분의 시간>, <보내지 않을 편지>가 있다. 염세주의자가 되고 싶으나 하루 세끼 먹을 때마다 행복하다.
박민진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