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는 에세이 판매량이 올라간다. 설치던 여름이 쇠하고 멜랑콜리한 마음을 어쩌지 못한 가을을 뒤로할 때 에세이는 제 몫을 해낸다. 그러니까 겨울은 독서의 계절이라기보다는 다정한 말소리가 당기는 끼니때다. 에세이 작가들은 누구보다 더 넓고 깊게 오래도록 관찰하고, 정확하고 섬세하게 기록한다. 독자를 위한 상차림에 신경 쓰느라 부산히 문장들 사이를 오간다. 그래서 좋은 에세이는 식어 가는 몸에 온기를 불어넣고, 잠들어있던 세포까지 일제히 봉기시킨다. '버지니아 울프' 역시 에세이를 읽을 때 느껴지는 기쁨을 다음과 같은 말로 적었다. “좋은 에세이를 읽을 때 우리는 모든 능력이 활발하게 깨어 즐거움의 햇볕을 쬐는 느낌이 든다. 또 좋은 에세이는 첫 문장부터 우리를 사로잡아 삶을 더 강렬해진 형태의 무아지경으로 빠뜨린다.” 이처럼 좋은 에세이를 읽으면 내 감정에 현미경을 들이댄 것처럼 마음속 작은 기척에도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인간을 성실하게 관찰해서 그간 발견할 수 없었던 불가해한 감정까지 형언해낸다. 그래서 오늘은 깊어 가는 겨울에 어울리는 에세이 책을 소개한다.

 

<작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2021)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국내에 에세이 세 권을 출간했다. 뛰어난 문장을 가졌다거나 눈이 번쩍 뜨이는 바가 있는 책들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책을 읽는 이유는 그냥 사람이 좋아서다. 정확하게 말하면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쓴 회고를 읽으면서 그의 영화가 내게 남긴 추억을 되짚길 즐긴다. 가장 최근에 나온 <작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를 읽으면서도 그가 만든 수 편의 영화를 내 머릿속에서 하이라이트 필름으로 재상영하며 추억에 빠졌다.

<작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는 생활인으로서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고민하는 대목이 자주 나온다. 작가로서 권태와 타성에 빠지지 않기 위해 매일 밤 고쳐 생각하고, 그런 고민을 끄적인 것이 책으로 나온 것이다. 쉽게 잠이 오지 않는 새벽, 자신을 다독이는 글 속에는 영화로 세상에 어떻게 이바지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지식인의 고뇌가 담겨있다. 또한, 창작의 동력을 얻기 위해 어린 시절 어머니가 자신에게 이른 말까지 탈탈 털어내서 쓰는 모습에서는 끝없이 자신을 허물면서까지 글을 써야만 하는 작가의 고단함이 엿보인다. 난, 마치 카페 옆자리에 앉은 것처럼 다리를 꼬고 그의 고충을 엿들을 수 있었다. 그만큼 세상은 아직 해결할 수 없는 고민이 가득하고, 글로 쓰거나 영화로 만든다고 해서 더 나아지지 않을 거라는 비관적인 어조도 느낄 수 있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화려하지 않지만 정확하게 단어를 조탁하는 솜씨가 있는 작가다. 그건 아마도 쉽게 재단하지 않는 그의 화법이 지닌 특징일 것이다. 딱 아는 만큼만 말하려고 잠시 말을 고르는 순간이 좋다. 화려한 언변으로 말을 잘하는 사람도 있지만, 정확하게 말을 잘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그래서 난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글이나 영화에서나 망설이고 뜸을 들일 때 끌린다. 납득할 수 없는 해피엔딩을 경계하고, 무작정 인물을 끌어내리는 무책임한 슬픔도 용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물렁물렁한 작가만은 아니다. 특히 사회 현안이나 영화 연출과 같이 자신이 물러설 수 없는 지점에서는 단호하다. 예를 들면, 영화가 어떤 메시지를 담아야 한다거나 작품을 본 관객의 반응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지적에 대응할 때는 말투부터 거칠어진다. 적당히 타협하며 사는 삶에 대해서 자신이 비난할 권리는 없지만, 누군가에게 잣대를 들이밀며 무례하게 굴면 절대 좌시하지 않겠다는 자세다. 온갖 고민이 출몰하는 도시에서 상식의 선을 지켜내겠다는 각오로 들렸다. 난 그런 상식의 선이 다큐멘터리 감독 출신인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지키려는 영화의 본령이 아닌가 생각했다.

책에 수록된 글은 시간 순서가 아니라 주제에 따라 묶여있다. 그래서 읽다 보면 젊은 고레에다와 이제는 지긋이 나이가 든 고레에다가 번갈아 나온다. 30대와 60을 바라보는 그는 확실히 다른 사람으로 느껴진다. 영화를 만들어 오며 그가 생각한 것도 미세하게나마 달라져 왔다. 나이를 매해 한 살씩 먹다 보니 지금 제 나이가 자연스러운 것처럼, 그의 영화를 매해 즐기다 보니 늘 소년 같던 그가 이제 중견 감독이 되었다는 사실에 약간은 사무친 기분이 들었다. 얼마나 더 그의 영화를 누리며 살 수 있을까? 난 새삼스럽게 그와 이렇게 나이를 먹을 수 있다는 게 행운으로 여겨졌다.

몸에 힘을 주던 시기를 넘어 느슨하게 풀리는 것마저 받아들여야 하는 요즘에 이르기까지 그는 근면하게 영화를 만들어왔다.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게 있다면 책 제목에도 붙은 '작은'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점일 것이다. 예술가로서 그가 가진 겸양으로도 보이는 '작은'이라는 수식어는 그 어떤 수사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적이다. 소설이 결코 대설이 아닌 것처럼, 숨죽이며 사는 보이지 않는 이들마저 결코 모른 척하지 않겠다는 그의 의지로 읽힌다. 예나 지금이나 그가 만든 작은 세계를 신뢰하며 찾는 이유다.

 

<살고 싶다는 농담>(2020)

최근에 허지웅이 쓴 <살고 싶다는 농담>을 읽었다. 글을 다 읽고 내가 생각한 것은 허지웅은 술자리에서 만나면 더 재밌을 사람이라는 점이다. 이런저런 곳에 관심이 많고, 말투가 필요 이상으로 완강해서 고개를 끄덕이면서 음미하기 좋은 문장이 자주 나온다. 그래서 허지웅의 글은 시퍼렇게 날이 선 칼 같다. 그건 그가 전에 쓴 에세이집과 결이 다르지 않았다. 다방면에 두루 한소리 늘어놓는 솜씨도 여전했다. 그는 늘 고독한 시간을 알차게 보냈고, 항시 즐겨본 영화가 있었으며, 유심히 지켜본 사회문제가 있으니 글이 근면하다는 인상을 준다.

​다만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그가 주변 사람들을 의식하기 시작한 것 같다. 본 적 없던 삼인칭 대명사가 자주 등장했다. 중병에 걸렸다가 새 삶을 찾아서일까? 삶은 혼자일 수 없다고 수줍게 고백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글을 읽을 때 자주 되새기게 만든 도사린 가시도 적었다. 세상은 혼자고 좋은 어른 따윈 없으니 기껏해야 책이나 읽으라는 식의 냉소는 분명 아니었다. 단언하던 문장이 조금 물러졌고 대신 고마웠던 사람들을 찾아내서 그들을 추켜세웠다. 자기가 냉소적으로 굴어도 끝내 지근거리에 버티고 서서 우스갯소리를 해줬던 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그게 이 수필집의 장점이자 단점인 것 같다. 기대하지 않았던 온기에 마음이 놓이면서도, 과거에 촌철살인으로 굴었던 매서운 허지웅이 그리워졌다. 이런 변화는 노화의 여파일까? 헬스장 대신 요가를 하기 시작했다는 취향의 변화일까? 가장 도드라졌던 점은 청년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조언을 하겠다는 선의였다. 뭔가를 비판하는 글쓰기 대신 어린 친구들을 바른길로 인도하고 싶다는 말은 내겐 꼭 '김난도' 작가의 책 서론처럼 읽혔다. 흑화한 김난도랄까.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 대신 아파보니까 청춘 짧더라고 말해주는 동네 형 같았다. 다시 암이 재발하면 치료를 하지 않겠다는 호기로운 말투는 여전했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글을 쓰겠다는 허지웅은 분명 다시 태어난 것처럼 보였다.

난 계속 허지웅의 글을 읽을 것 같다. 수필은 어쨌든 사람을 보고 읽는 글이다. 난 생활인으로서 그가 당면하고 사는 바에 관심이 많고, 좀처럼 인정하지 않았지만 알게 모르게 그의 문체에 영향을 받았다. 무엇보다 그가 과거를 후회하고 자책하며 어쩔 땐 다 망했다는 식으로 굴다가도, 끝내 고쳐내서 살겠다고 다짐하는 태도를 좋아한다. 그는 냉철한 독설가의 면모를 갖춘 셀럽이라 종종 구설에 오르지만, 호승심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걸 본 적은 없다. 창피함을 감수하고라도 뱉었던 말을 번복할 수 있다는 건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마음사전>(2008)

우리가 사는 도시는 생활과 공간이 빠르게 변해간다. 과거를 떠올려보면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것들이 잔뜩이다. 그것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언어도 마찬가지다. 같은 단어를 써도 과거와 현재에 쓰는 단어는 어감과 분위기가 상이하다. 소실된 의미와 엉겨 붙은 어감이 혼재한다. 그래서 말을 하거나 특히 글을 쓸 때 내가 골라든 단어가 정확하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모를 때도 있다. 어긋남은 미세해서 일상에서 잘 보이지 않지만, 글을 쓸 땐 그 디테일이 성패를 가르기도 한다. 이런 잠재적인 고민은 현대인에게 점점 더 문장 대신 이모티콘과 축약어에 집착하게끔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김소연 시인의 베스트셀러 에세이 <마음사전>은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단어의 본의를 알아주기에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같은 단어도 김소연 작가의 눈을 통과하면 개성 넘치면서도 납득이 가는 정확한 정의를 얻는다. 사회적 기억, 자연과 사물, 인간에 관한 관심으로 이루어진 시선이 단어에 녹아든다. 문장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 남김없이 밑줄을 긋고 싶을 만큼 유려하다. 우리가 흔히 쓰는 단어가 그 자체로도 빛나고 도드라질 뿐 아니라, 다른 유의어와 상호작용을 거치면서 더욱 제 가치를 발한다. 그리고 가끔 사전 형식을 벗어나서 작가 개인의 사색이 담긴 글도 좋다. 지금의 세상을 형성한 폭력과 차별 그리고 공포에 대한 시인의 체험이 녹아든 글이다. 책은 불평등과 갈등, 불안과 초조를 선명하게 드러낼 뿐 아니라, 그 현상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하고 되돌아본다.

난 시인이 삶을 꾸려감에 있어 말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마음사전>을 썼다고 생각했다. 언어를 정제한다는 건 모두가 하나의 선을 따라가기에 급급한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과 같다. 상실, 죽음, 고통 같은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을 정의하면서 세상을 규격화한다. 언어가 인간의 의식과 사고, 세계관 등을 결정한다는 ‘언어결정론’처럼 인간 사고의 내용과 구조는 우리가 쓰는 단어에 의해 세상을 재단한다. 이렇게 세계관이 명확해질 때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우리 일상은 조금 덤덤해진다. <마음사전>이 아직도 많은 사람의 곁에 머무는 이유다.

 

메인 이미지 © Caroline Knapp, <뉴욕타임즈>(2010. 10. 20)

 

Writer

영화와 책, 그리고 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쓴다. 지은 책으로는 <우리 각자 1인분의 시간>, <보내지 않을 편지>가 있다. 염세주의자가 되고 싶으나 하루 세끼 먹을 때마다 행복하다.
박민진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