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J. 존슨의 뒤를 이어 재즈 트롬본의 역사를 이은 슬라이드 햄프턴(Slide Hampton)이 지난 11월 18일 뉴저지 자택에서 89년의 생을 마감했다. 그는 미국 인디애나폴리스에 살던 어린 시절 J. J. 존슨으로부터 트롬본 연주를 배웠고, J. J. 존슨, 웨스 몽고메리와 함께 인디애나폴리스를 대표하는 재즈 뮤지션이었다. 미국에서 재즈의 인기가 시들자 10여 년 동안 파리에 머물며 유럽에서 연주 활동을 계속 했고, 미국으로 돌아와서는 하버드대, 드폴 대학 등에서 후학을 양성하기도 했다. 노년에는 작곡가와 어레인저로 활동하면서 1998년과 2005년 그래미상을 받았고, 재즈 뮤지션에게 최고 영광인 NEA 재즈 마스터상을 받았다. 그와 그의 음악을 상징하는 키워드 셋을 알아보았다.

슬라이드 햄프턴을 추모하는 컴필레이션 영상

 

왼손잡이용 트롬본을 연주한 오른손잡이

그는 남자 여덟, 여자 넷의 열두 남매로 구성된 가족 밴드 듀크 햄프턴 밴드(Duke Hampton Band)의 막내였다. 그는 다섯 살부터 가족 밴드에서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고, 열두 살부터 밴드에서 아무도 연주하지 않던 트롬본을 아버지에게서 배웠다. 그때부터 본명 대신 ‘슬라이드’(Slide)를 예명으로 쓰기 시작했다. 당시 가족 밴드에는 왼손잡이용 트롬본밖에 없었다. 그는 오른손잡이였지만 왼손잡이용 악기로 배울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몸에 배여 왼손잡이용 트롬본을 계속 연주하게 되었다. 연주 영상을 보면 왼손으로 슬라이드를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지만, 다른 모든 일은 오른쪽 손으로 주로 쓰는 오른손잡이임을 알 수 있다.

슬라이드 햄프턴의 솔로 연주 ‘Rain or Shine’(1982)

 

인디애나폴리스 재즈의 기수

그의 가족으로 구성된 밴드는 인디애나폴리스 재즈신에서 인기를 누렸고, 그는 웨스 몽고메리, J. J. 존슨과 함께 재즈신을 대표하는 뮤지션으로 인정을 받았다. 1950년대에는 뉴욕으로 건너가 라이오넬 햄프턴과 메이나드 퍼거슨의 밴드에서 활동하면서 전국구 뮤지션으로 발전했다. 1960년대에는 자신의 밴드 ‘슬라이드 햄프턴 8중주단’(Slide Hampton Octet)을 결성하였고, 클래식 트롬본 연주자들과 함께 음반을 내기도 했다. 1968년부터 10여 년 동안 프랑스 파리에서 체류하면서 유럽에서 주로 활동했고, 1978년에 귀국해 하버드대, 인디애나주립대, 드폴 대학 등에서 후학을 지도했다. 2005년 인디애나폴리스 재즈 재단은 그의 이름을 명예의 전당에 올렸다.

메이나드 퍼거슨 밴드 시절의 인기곡 ‘Slide’s Derangement’는 그의 오리지널이다.

 

월드 오브 트롬본즈

유럽에서 돌아온 후 자신감을 얻은 햄프턴은 더욱더 파격적인 재즈 음악을 시도했다. 5년 만에 출반한 앨범 <World of Trombones>(1979)에는 아홉 명의 트롬본 연주자로 구성된 전례 없는 편성으로 재즈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이때부터 작곡가와 빅밴드의 편곡자로 명성을 얻었고, 전보다 더욱 활발한 음악 활동을 펼쳤다. 클리포드 조던과 퀸텟을 구성하여 출반한 앨범 <Roots>(1985)는 가장 잘 알려진 명반으로 손꼽힌다. 1998년에는 디디 브리지워터의 앨범 <Dear Ella>(1997)의 ‘Cottontail’을 편곡해 그래미상을 받았고, 2005년에는 뱅가드 재즈 오케스트라와 함께 낸 앨범 <The Way: Music of Slide Hampton>로 생애 두 번째 그래미를 안았다.

앨범 <World of Trombones>(1979)에 수록된 ‘Round Midn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