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게 마감한 옷감 위에 과하게 붙어있는 수많은 패치들. ‘배틀 베스트’, ‘배틀 재킷’, ‘컷 오프’, ‘쿠테’ 등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 옷. 누구에게 물어도 “아 그거!”라며 알고 있지만 모두의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배틀 베스트에 대한 이미지는 다르다. 누군가는 찢어진 청 조끼로, 누군가는 가죽 재킷으로, 서로의 머릿속에는 자신만의 배틀 베스트가 있다. 비슷한 디자인은 있지만 같은 디자인은 없다는 말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배틀 베스트. 여기 제2차 세계대전에서 시작된 배틀 베스트 연대기를 소개한다.

 

제2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배틀 베스트, 출처 – ‘Collectors Weekly

배틀 베스트는 그 이름처럼 전투를 위한 옷으로 시작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합중국 소속 파일럿들은 지급받은 봄버 재킷(Bomber Jacket)에 직접 자신들이 만들거나 모은 여러 가지 패치들을 붙이고 그림을 그려 옷을 리폼하기 시작했다. 전투에서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은, 불안감을 떨치기 위한 작은 여흥이었다. 점점 배틀 베스트는 공군 전체의 유행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당시에는 개인의 수작업으로만 만들어 지던 시기라 전체를 아우르는 유행은 없었다. 굳이 하나를 찾자면 몇 번의 전투를 치렀는지 그 수를 표시하는 디자인을 종종 찾을 수 있다. 디자인은 난잡했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소중한 의미들을 재킷에 수놓아 자신을 표현했던 시기다.

 

모터사이클 클럽 유니폼

Hells Angels, 출처 – Reddit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많은 수의 공군 베테랑들은 사회로 복귀하며 모터사이클 클럽에 가입했다. 자연스레 그들이 군대에서 가지고 있던 문화는 모터사이클 클럽에 정착하게 되었고 배틀 베스트는 마치 유니폼같이 모터사이클 클럽을 대표하는 문화로 자리 잡았다. 군대 문화의 연장선인 탓일까 이렇듯 모터사이클 클럽은 유독 패치를 다는 것에 대한 규율이 엄격하다. 패치를 달 수 있는 자격, 패치를 조끼에 다는 위치 등이 세밀하게 규칙으로 짜여 있는 클럽이 많다. 다양한 패치들이 그들의 소속 모터사이클 클럽, 그리고 클럽 내의 위치를 나타내며 소속감을 높이는 용도로 사용된다. 악명 높았던 모터사이클 갱 ‘헬스 엔젤스’의 롤링 스톤즈 공연 경호 사건 이후 배틀 베스트는 대중들에게 부정적인 인식으로 깊게 각인되었다. 미디어에 보도된 사건 당시 헬스 엔젤스의 모습과 그들이 입었던 배틀 베스트는 배틀 베스트를 갱들의 유니폼, 혹은 사회의 질서와는 떨어진 사람들이 입는 것으로 대중에게 인식시켰다. 이 사건은 이후 배틀 베스트가 가지는 마이너 한 이미지의 시작이 되었다.

 

메탈 키드들의 최신 유행

메가데스, 출처 – 링크

1970, 1980년대로 넘어가며 배틀 베스트는 서서히 기존의 가죽 소재 유행에서 벗어나 데님을 사용하는 형태로 트렌드가 바뀌기 시작한다. 또한 이 시기부터 뾰족한 징을 재킷을 꾸미는데 사용하였고, 재킷이 아닌 조끼 형태의 배틀 베스트가 디폴트로 굳어졌다. 80년대에는 스래시 메탈의 유행과 함께 장르를 상징하는 패션으로 젊은 층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과하게 워싱 되고 손상된 데님 조끼에 장난스러운 디자인의 핀들과 좋아하는 밴드의 로고, 멤버의 이름 등을 패치로 장식하는 것이 이 당시 가장 일반적인 디자인이었다. 시간이 지나 메탈의 세부 장르가 늘어나고 배틀 재킷의 형태 역시 이에 따라 조금 더 다양해졌다. 예를 들어 데스 메탈 쪽은 징이 많이 박힌 가죽 재킷을, 팝 메탈 팬들은 간단한 패치가 박힌 데님 조끼를 입는 식으로 장르 별로 유행하는 배틀 재킷의 형태가 다르다.

 

DIY

Ruby Soho, 출처 – ‘AEW

1970년대 말부터 펑크신에서도 배틀 베스트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배틀 베스트가 가지고 있는 자유도와 다양성은 펑크의 DIY 정신과 만나며 완벽한 르네상스를 시작했다. 각기 각색의 패치를 스스로 제작하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핀, 징, 클립, 체인 등 사용하는 재료를 가리지 않는 제작 방법을 정착시켰다. 가죽 재킷, 데님 조끼 혹은 군복을 리폼한 소재까지, 배틀 베스트는 유례없는 다양성을 띠기 시작했다. 펑크와 만난 배틀 베스트는 마이너 한 소속 집단을 표현하는 패션을 넘어 개성의 표현 수단으로 발전하였다. 더 이상 배틀 베스트를 설명할 때 옷의 생김새로 설명할 수 없다. ‘재킷 혹은 조끼에 패치 등을 붙여 놓은 것’으로 정의되던 배틀 베스트는 펑크 문화에 결합되어 ‘자신의 신념을 여러 심벌 등을 이용하여 장식한 옷’으로 문화의 일부분이 된 것이다. 또한 2000년대 이후 시작된 팝펑크의 대중적인 인기는 10대들에게 배틀 베스트를 유행시키며 기존의 마이너 한 이미지를 없애고 대중적인 패션으로 배틀 베스트를 보급시키는 발판이 되었다.

 

비슷한 모습은 있어도 같은 모습은 없다

빅뱅, MTV EMA Awards(2011), 출처 – ‘MTV

배틀 베스트는 대중에게 더 이상 낯선 옷이 아니다. 고등학생부터 화면 속 아이돌까지 이제는 모두 패션으로써 자연스럽게 배틀 베스트를 접하고 입는다. 스스로 만들어야만 했던 과거와는 다르게 유명 브랜드의 공산품으로 구매할 수 있으며 조금만 인터넷을 뒤져도 원하는 디자인으로 주문 제작해 주는 규모 기업들과 개인 제작자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자신만을 위한 배틀 베스트를 만들기에 너무나 편한 세상이 되었다.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제각각 다른 배틀 베스트들. 이제 배틀 베스트는 다양성과 자유로움을 대표하는 패션, 그리고 문화로서 퍼져나가고 있다.

 

Writer

낯선 음악들과 한정판 굿즈 모으는 걸 좋아합니다. 물론 글 쓰는 것도 정말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