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다는 것, 이동의 행위 그 이상을 담다

걷기는 대부분의 사람이 자연스럽게 습득하는 능력이다. 어딘가 이동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걷는다는 게 단순한 이동의 의미를 넘어서는 때가 있다. 머릿속을 정리하는 사유의 순간이나 누군가와 나란히 방백을 하듯 대화하는 순간이 그렇다. 이야기 속 걷는 장면에는 다양한 인물과 그들이 존재하는 배경이 등장한다. 다른 장소 다른 상황이지만 담담하게 걸으며 주고받는 그들의 문장에 감정 이입이 된다. 이건 연출의 힘일까, 연기의 힘일까, 아니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평범한 순간을 특별하게 그리는 걷기의 힘일까?

 

걸으면서 나아가는 이야기

조금 과장하자면 걷는 것만으로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완성하는 작품이 있다. 걷기에서 얻은 삶의 철학을 담았기보단, 정말 일상적인 행위에 특별함을 한 스푼 얹어 서서히 빠져들게 하는 이야기들이다. 지극히 현실적인 설정에 걷기를 더 했는데 그 효과가 폭발적이다. 텍스트와 영상을 넘나드는 이야기와 함께 방구석 걷기 체험이 완성된다.

 

소설 <밤의 피크닉>

왼쪽 이미지 출처 – 예스24

"모두 함께 밤에 걷는다. 단지 그것뿐인데 말이야. 어째서 그것뿐인 것이, 이렇게 특별한 걸까."

시작은 장르 만능 일본 소설가 온다 리쿠의 <밤의 피크닉>이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북고에서는 매년 보행제를 실시한다. 24시간 동안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80km를 걷는 것. 이 행사를 관통하는 책은 350페이지를 가뿐히 넘긴다. 주인공 ‘도오루’와 ‘다카코’는 학교에 알려지지 않은 이복 남매 사이다. 이 드라마틱한 설정을 치정으로 풀어내지 않고, 오로지 두 사람의 미묘한 신경전과 소통의 의지를 보행제에 녹여냈다. 학생들은 설레는 보행제의 시작과 함께 삼삼오오 이야기꽃을 피우지만, 시간이 갈수록 당연하게도 지쳐간다. 그 와중에 옆에 걷는 사람이 종종 바뀌고, 서로의 새로운 모습을 찾게 되고, 함께 완주라는 공유한 목표를 달성하고자 돕기도 한다. 마침내 남매가 그들의 상황과 관계가 자신들의 의지가 아니었음을 인정하는 장면은 이를 단순히 성장소설이라고 정의하고 싶지 않게 한다. 걷기에 오롯이 빠져 인물들의 내면 변화를 관찰하는 재미에 보행제의 끝이 다가올수록 독자가 아쉬워지는 몰입감이 있다.

 

영화 <최악의 하루>

은희와 전 남자친구 운철(위), 은희와 처음 만난 료헤이(아래),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포토
"진짜라는 게 뭘까요? 사실 다 솔직했는걸요."

<최악의 하루> 역시 인물들이 걸으며 보내는 시간을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거짓과 진실이 범벅된 대화가 채운다. ‘은희’와 세 명의 남자가 하루 동안 마주치고 대화하며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그 흐름과 전후 연결이 꽤 느슨한 편이다. 그날 일어난 일에는 의도보다 우연이 더 큰 힘을 발휘하는 듯 느껴진다. 영화를 힘차게 이끌어가는 것은 서울 곳곳을 걷는 인물들이다. 변화하는 골목과 산책로 배경에는 주인공의 마음과 대조되는 평화로움이 있다. 걷기 덕분에 배우들 표현의 폭이 넓어지며 극의 생기는 더해진다. 한 방향을 바라보고 나란히 걷는 사람들의 대화는 서로에게 전하는 의도와 자신을 납득시키기 위한 독백이 섞여있다. 처음 만난 료헤이와 비로소 외국어로 대화할 때 더욱 솔직해지고 더 자유로워 보이는 은희는 아이러니하지만 사랑스럽다.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

1부 고조시 취재 페이크 다큐(왼쪽), 2부 고조시 배경 픽션(오른쪽), 출처 – 네이버 영화 포토

"어떤 이야기든 좋아요. 들려주시겠어요?"

<최악의 하루>가 정처 없는 걷기였다면,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다분히 의도적인 걷기의 연속이다. 1, 2부가 나뉘어 현실과 픽션을 넘나드는 연출에 고조시라는 배경을 더한 영화는 제목처럼 환상적인 느낌을 준다. 1부는 영화 로케이션을 탐색하러 간 취재 여행을 담은 페이크 다큐이고, 2부는 실제 고조를 배경으로 찍은 1부의 결과물로 같은 배우들이 다른 이름으로 등장하면서 기분 좋은 혼란을 선사한다. 걷고,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련의 과정은 현실적이고 연속적이다. 물론 목적에 충실하게 여러 장소를 돌아보다 보니 인물들이 차를 타기도 하고 앉아 식사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를 기획하는 ‘태훈’과 ‘미정’은 작은 마을을 거닐 때 비로소 작은 디테일과 풍경을 잡아낸다. 공교롭게도 ‘한여름의 판타지아’에서 가이드 역할을 맡은 ‘유스케’ 역시 <최악의 하루>에서 료헤이를 연기한 이와세 료가 맡았는데 특유의 내성적이지만 솔직한 캐릭터가 각 영화에 로망을 심어준다. 걷기 최적화된 이미지라고 할까?

 

진심을 확인하고 마음을 다독이는 걷기의 힘

윤희와 딸 새봄(왼쪽), 윤희와 쥰의 재회(오른쪽),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포토

걷기는 사건 자체보다 관계성에 집중하는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단골 연출이다. <윤희에게>에서 ‘윤희’와 딸이 눈밭에서 나누는 대화, ‘쥰’과 윤희의 재회 장면에서 어김없이 그들은 나란히 걸었고, 최근 화제작인 <듄>에서 ‘폴’과 아버지 ‘아트레이데스’ 공작이 아라키스로 떠나기 전 걸으며 나누는 대화도 그들 사이의 신뢰, 애정 등이 묻어나는 명장면이다.

이야기 속 걷기는 달리기, 서핑 같이 눈길이 가는 화려한 동작이나 격한 음향은 없지만, 대화가 가능한 속도와 천천히 지나가는 풍경에 인물들과 관람객 모두를 환기시킨다. 또한 한없이 일상적이지만 외적인 요소보다 내면에 묻어나는 언어적, 비언어적 소통을 끌어 낸다. 지나간 시간을 다시 정리하거나, 현재의 관계를 확인하거나, 다음을 향한 실마리를 열어갈 때, 운동화 끈을 조여 매고 일단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 아니면 이야기를 통해 걷는 인물들을 지켜보는 것도 좋은 처방이 될 것 같다.

 

Writer

넓고 깊게 이야기를 담고 싶은 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