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동부 지역에서 활동하던 많은 재즈 뮤지션이 세계대전이 끝난 후 서부로 이주해 로스앤젤레스의 할리우드 부근에 정착했다. 그들은 그곳의 맑고 온화한 날씨에 영향을 받아 가볍고 경쾌한 웨스트 코스트 재즈를 꽃피웠는데, 그들 중에는 트롬본의 달인이며 종종 스캣 스타일의 노래를 부르던 프랭크 로솔리노(Frank Rosolino)도 있었다. 디트로이트 출신인 그는 전역 후 뉴욕에서 활동하다가 1954년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여 1960년대와 1970년대 나이트클럽과 레코딩 스튜디오에서 활동했다. 웨스트 코스트 재즈 뮤지션들이 그렇듯이 낮에는 스튜디오에서 영화와 TV 일을 하고, 밤에는 클럽에서 재즈를 연주하는 일상이 계속되었다.

TV에 출연한 프랭크 로솔리노 쿼텟(1962)

성격이 원만하고 재치 넘치는 유머를 곧잘 하여 로솔리노는 동료들 사이에 인기 만점이었다. 셜리 맨, 콩트 캔돌리, 돈 멘자, 퀸시 존스 등 로스앤젤레스의 인기 재즈 뮤지션들과 허물없이 어울렸고, TV 프로그램에도 고정적으로 출연하여 트롬본을 연주하고 노래도 곧 잘 하던 만능 엔터테이너였다. 1960년대 후반에는 동료 트롬보니스트 마이크 버론(Mike Barone)과 콤보를 이루어 ‘Trombone Unlimited’라는 별칭으로 불렸고, 1970년대에는 퀸시 존스의 슈퍼색스(Supersax) 일원으로 순회 공연을 다니기도 했다. 동료들 사이에 언제나 즐겁고 유쾌한 성격으로 알려진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잠든 두 어린 아들을 총으로 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프랭크 로솔리노 앨범 <Turn Me Loose!>(1961)에서 노래와 트롬본 연주를 같이 했다.

1978년 11월 26일, 함께 살던 여자친구 겸 매니저 ‘다이앤’은 친구와 함께 나이트클럽에서 새벽 4시경에 돌아왔다. 두 아이의 방에 전등이 켜진 것을 보고 아이들 방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총소리를 들었다. 다이앤은 방으로 들어가 로솔리노가 일곱 살, 아홉 살이던 아이들에게 이미 총기를 발사하고, 뒤이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두 아이의 친모는 6년 전 차고에 있던 자동차의 시동을 걸고 차 안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으며, 친모의 자살 동기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채였다. 로솔리노는 겉으로는 쾌활한 재즈 뮤지션으로 마지막까지 지냈으나, 그 내면에는 전처의 원인모를 자살과 성장하는 아이들을 지켜보면서 지독한 우울증을 앓았던 것이다. 검시 결과 사건 당일 그가 술이나 마약을 전혀 하지 않은 맨 정신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주위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했다.

자살하기 4개월 전 녹음한 몇 곡이 수년 후 <Last Recording>이란 제목으로 발매되었다.

사건이 일어나기 며칠 전 동료들과 콜로라도에 연주 여행을 하면서 버스 안에서 아이들과 함께 자살할 것이라는 의향을 얼떨결에 밝힌 적이 있었는데, 이 때에는 그 누구도 이를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 총격을 받은 작은 아이 ‘제이슨’은 14시간에 걸친 수술 끝에 생명을 건졌으나 시력을 잃은 채 살아남았다. 그는 친모의 먼 친척 뻘인 가정에 입양되어 제이슨 빈(James Bien)이란 이름으로 살고 있으며, 지난해 중년이 된 사진이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그 사건 후 재즈 계에서 ‘프랭크 로솔리노’라는 이름은 마치 금기어처럼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