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주 언어는 글이다. 텍스트로 가득 찬 매체가 책이다. 그러나 글의 내용 이해를 돕기 위해 삽화나 사진이 들어가는 경우도 있고, 그림만이 주가 되는 그림책인 경우도 있다. 

글과 그림이 함께 있지만, 그림이 더 인상 깊었던 책이 있다. 찰스 장의 그림이 들어간 출판사 1984의 <어린왕자>, 아이슬란드의 풍경을 담은 그림 작가 엄유정의 <나의 드로잉 아이슬란드>, 6699 프레스에서 출간한 <괜찮아>.

 

내가 생각한 어린왕자를 찾았다.

<어린 왕자>, 그림 찰스장, 출판사 1984

<어린 왕자> 디자인 찰스장, 이미지 출처 – 온라인 서점

‘어린 왕자’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수채화 색감으로 그려진, 파란색 긴 재킷을 입은, 노랑머리, 동그란 두 눈이 콕콕 박힌 얼굴의 어린 왕자. ‘ㅇ ㅣ ㅇ’ 눈과 코가 딱 이렇게 생겼다. 어린 왕자 구글링을 하면 가장 먼저 나오고, 가장 널리 알려진 어린 왕자.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좋아하는 나지만, 내가 생각하는 어린 왕자는 그런 흐릿한 인상이 아니었다. 어른들은 대체 왜 그러는 거야? 툴툴거리며 장미를 돌보는 마음씨를 가진 그 아이는 더 똘망똘망하게 생겼을 것 같았다. 그렇게 마음에 든 책이 찰스장의 삽화가 들어간 <어린 왕자>였다.

이 책은 출판사 1984의 ARTIST X CLASSIC 프로젝트로 만들어졌다. 고전 작가와 현대 아티스트가 책으로 만난다는 취지로, 찰스장은 '어린 왕자의 호기심 넘치고 순수한 마음을 함께 느끼고자 했으며, 원작의 삽화가 가지는 자유로움을 재해석하여 자신의 느낌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참고 링크 - Maidennoir)

팝아티스트인 찰스장은 또렷하고 귀여운 어린 왕자를 그렸다. 어느 날 문득 사막 한가운데서 나타나 양을 그려달라는 어린 왕자는 동그랗고 커다란 눈에 사방으로 뻗친 머리카락을 가졌다. 소행성 ‘B612’에서 온 어린 왕자는 몹시 쓸쓸할 땐 해 지는 걸 마흔세 번이나 구경하고, 옆 행성의 이상한 어른들을 보며 갸우뚱한다. 커다란 눈을 가지고 있어서 그 눈에 나를 비춰보기가 쉽다.

찰스장은 어른들조차 귀엽게 그렸는데 그 덕에 어른의 안타까운 면이 마음에 와닿는다. "나는 모든 것을 다스리는 왕이다!" 기세등등 선포하는 임금님, 손뼉을 치면 온갖 무게를 잡으며 모자를 벗어 인사를 하는 허영쟁이, 창피한 걸 잊겠다고 술을 마시는 술고래, 하늘에 빛나는 별을 차지하겠다며 일일이 세고 있는 상인, 일 분에 한 번씩 불을 켜고 끄는 점등인, 흥미로운 곳에 탐험가를 보내놓고 중요한 자리만 지키는 지리학자. 작은 별 위에 한 자리씩 차지해 떵떵거리는 어른들도 작고 귀여워서 애처로운 마음이 배로 커진다. 귀여워서 더 안타까운 감정을 다들 알지 않나? '어린 왕자'의 또 다른 핵심 캐릭터인 여우는 삐죽삐죽 생겼지만 자그맣다. 변화가 없는 단조로운 내 일상에 네가 더해지면 내 삶은 네 발걸음만 들어도 환해질 거야, 네 금빛 머리를 닮은 밀을 보면 네 생각을 하고, 밀밭으로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좋아질 거야. 동글동글한 말을 건네는 여우는 삐죽삐죽 날카로운 귀와 주둥이를 가졌다. 제발 나를 길들여줘. 그래서 여우의 말은 더 애처롭다.

꿈에 그리던 이상형을 만난 것처럼, 이 어린 왕자는 내가 그린 어린 왕자 자체였다. 단순한 활자지만, 저 아이가 이렇게 말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괜히 한 번 더 읽게 된다. 어린 왕자가 어느 날 내 눈앞에 똑떨어진다면 이렇게 생겼겠지? 어느 날 사막에 가서 어린 왕자를 만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이 책 덕분에 할 수 있었다.

 

아이슬란드의 풍경을 담았다.

엄유정, <나의 드로잉 아이슬란드>

눈이 쌓인 산, 푸른 잎들로만 가득 찬 평원. 내가 좋아하는 풍경은 주로 단색으로 압도적인 광경을 선사하는 자연의 장면들이다. 겨울이면 강원도 대관령 또는 일본의 북해도를 가야겠다고 다짐을 한다. 그래서 이 작가가 담아온 아이슬란드의 풍경을 반겼다. 사진도 없이 그림으로만 그 풍경을 다 담을 수 있을까 따위의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이 작가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옮겼을 아이슬란드가 기대됐다. 엄유정 작가의 그림은 일찍이 알고 있었다. 사람들을 시원한 선으로 뭉툭하고 커다랗게 그린 그의 그림들이 좋아서 SNS를 팔로우하고 있었다. 피드를 살펴보다가 파란 하늘에 하얀 산이 그려진 그림이 잔뜩 올라와 있는 것을 발견했고, 그 때 이 책을 알게 됐다.

저자는 특정 장소에 거주하며 작업할 수 있는 프로그램인 아티스트 레지던스에 지원했고 아이슬란드 북부에서 40여 일을 보냈다. 그 때의 이야기와 풍경이 담긴 책이다. 해가 떨어져 깜깜한 하늘 앞에 깔린 하얀 눈, 가득 쌓인 눈 앞에 홀로 서 있을 때 느껴지는 고요함,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옆 동네 구경을 갔을 때 발견한 빵집, 따뜻한 물에서 헤엄치고 산을 바라보는 수영 모임에 참여했다는 일화. 다채로운 일화가 많지만, 이야기에 대한 전반적인 인상은 하얗다는 것. 하얀 눈이 끊임없이 색다른 모습으로 등장해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조용히 눈 속에 파묻히듯 집중하게 된다. 눈길을 걸을 때의 뽀득거리는 소리와 차가운 공기가 살짝 코끝을 스치는 것 같기도 하다.

사진처럼 실제 풍경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 작가가 느꼈을 공기, 온도, 기분 이 모든 것이 함께 담긴 그림이 전해주는 풍경은 또 색달랐다. 이 사람 눈에는 이렇게 보였겠구나. 그림을 한 번씩 눈에 담으며 아이슬란드에 간다면 이런 풍경을 보게 되는 거야, 아주 조용하게 들떴다.

이미지 출처 - 출판사 페이스북 링크

 

괜찮다며 안아주는 그림으로 꽉 찬 책

명난희, <괜찮아>, 출판사 6699프레스

가장 큰 위로를 전하는 책이라고 자신한다. 몇 년 전, 책과 라이프 스타일 용품 등을 취급하는 카페에서 우연히 집어 든 책이다. 몇 장 후루룩 넘기면서 단조롭다고 섣부른 판단을 했고, 한 장 한 장 제대로 넘겨본 후에야 진가를 알았다. 알 수 없는 먹먹함에 이 책을 샀고, 한동안 가지고 있다가 가장 큰 응원을 건네고 싶었던 친구에게 선물했다.

이 책은 크게 왼쪽과 오른쪽 페이지로 내용을 나눌 수 있다. 속상한 이야기를 털어놓는 게 왼쪽, 그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오른쪽. 글이 많은 건 아니다. 한 줄 한 마디를 남긴다.

“나는 쉽게 화가 나. 나는 남들과는 달라요. 마음이 아파요. 시험을 망친 것 같아요.”

속이 상한 이유는 가지가지다. 살면서 한 번 아니 그 이상 입 밖으로 말해봤던 것들에 공감하고 다음 페이지를 보면, 그를 안아주며 괜찮다고 말하는 그림이 있다. 이 대화가 반복된다. 속이 상한 이야기와 위로가 번갈아 등장하는 패턴이다. 세상에 우리를 힘들게 하고, 힘 빠지게 하는 일은 수없이 많다. 그렇게 마모되고 깎여나가는 게 힘들어서 한 마디를 툭 뱉는다. 그럴 때 항상 그 자리에서 괜찮다고 안아주는 이가 있다. 이 책은 그런 위로를 건넨다.

항상 같은 자리에서 나를 응원하고 지지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살아가는데 큰 원동력이 된다. 내가 슬플 때, 힘이 들 때 그가 건네는 말은 딱히 대단하지 않다. 가장 큰 위로가 되는 말은 괜찮다는 말이었다. “나 오늘 시험 망쳤어.”라고 말하면 그는 “괜찮아. 수고했어. 치킨 시켜줄까?”라고 물었다. 시험을 망치든, 누군가와 싸웠든, 누가 나한테 못된 말을 했든. 괜찮아. 너는 괜찮은 사람이야. 괜찮을 거야. 라는 말을 들으면 퍽 마음이 놓여서 괜히 한 번 끌어안곤 했다. 이 책이 주는 위로가 딱 그와 닮았다.

당신이 오늘 조금 지쳤다면, 사실 어제도 살짝 힘들었다면. 괜히 속에 담아두지 말고 아주 작게라도 입 밖으로 꺼내보길 말한다. 아니면 차라리 누군가에게 미리 말하는 건 어떨까? “자, 내가 이제 딱 한마디 할 건데, 너는 그냥 괜찮다고만 말해주면 돼. 알겠지?” 세계 최고 ‘답정너’지만, 그 말을 듣고 싶은 사람에게 까짓것 그 정도 선포는 미리 해놓을만하지 않을까?

이미지 출처 - 알라딘

 

Writer

좋아하는 것들을 쓴다. 좋아하는 이유를 열렬히 말하며 함께 좋아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