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셀러는 서점에 별도 매대가 생길 정도로 보편적인 용어로 자리 잡았다. 극장에 신작이 개봉하면 출판사는 공공연하게 영화의 파급력을 노리고 홍보를 한다. 아무래도 영화 관객이 독서 인구보다는 월등해서 생긴 현상이다. 최근에는 반대로 영화가 원작을 이용해서 홍보하는 경우도 잦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원작의 인기를 노리고 영화를 제작하거나 수입 배급하는 경우가 그렇다. 이처럼 공생 관계에 돌입한 책과 영화는 한 이야기를 두 작가의 시각으로 모두 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이다. 원작이 있는 경우 영화화 과정에서 덧셈과 뺄셈이 생기게 마련인데 이를 비교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무엇보다 영상과 활자라는 두 매체의 특성을 모두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상호보완적이다. 그래서 오늘은 영화 못지않은 매력을 지닌 원작 책들을 소개한다.

 

<종이달>(2014), 가쿠다 미츠요 저

<종이달>은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의 영화 <종이달>의 원작 소설이다. 주인공 ‘리카’는 40대 가정주부로 전문직에 종사하는 남편과 결혼해서 안정된 가정을 꾸리며 산다. 아이가 생기지 않아 고민하던 리카는 계약직으로 은행에 출근하며 다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별다른 경력이 없는 리카는 당초에 은행에서 단순 잡무만 맡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상 좋고 상냥한 태도를 바탕으로 노인을 대상으로 외판 업무에 두각을 나타낸다. 돈은 많은데 자식들과는 멀어진 노인들은 리카를 딸처럼 대한다. 실적은 올라가고, 리카는 스스럼없이 자신감을 얻는다. 그리고 스무 살을 갓 넘긴 수줍은 대학생 고타와 연애를 시작하면서 전과 다른 삶을 살기로 한다.

리카가 엇나가기 시작한 계기는 비교적 단순하다. 처음에는 백화점에 들렀다가 돈이 좀 모자라서 고객의 예금액에 손을 댔다. 그저 푼돈으로 시작한 착복은 시간이 지나자 점점 대범해져서 십억 원에 가까운 돈을 훔치기에 이른다. 리카는 젊은 애인과 호화로운 생활을 위해 소비를 시작한다. 귀금속과 명품가방 그리고 호텔 스위트룸과 고급 레스토랑에 카드를 긁는다. 외제 차를 사서 ‘고타’를 옆에 태우고 교외로 나선 리카의 얼굴은 행복해 보인다. 리카는 비로소 자신의 숨겨진 삶을 찾았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참고 사느라 놓치고 살았던 숨겨진 가능성을 찾아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책의 줄거리는 무심코 보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불륜 스토리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조금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리카는 돈을 훔치기 전에도 부족하지 않았다. 돈 잘 벌어오는 다정한 남편과 중산층이 모인 동네에 살았다. 리카의 생일에 명품 시계를 사 온 남편의 득의양양한 얼굴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예측 속에서 돌아가는 일상은 무료하다. 부족함은 없지만 그렇다고 특별할 것도 없어 아득하다. 가녀린 몸에 젊음은 사라져 가고, 무언가 새로 시작하기에는 늦은 나이라는 불안이 리카를 지배한다. 리카는 누가 보기에도 행복한 삶이어야 마땅했기에 더 짜릿한 일탈을 꿈꾼다. 범죄와 불륜의 흥분이 생을 가득 메운다. 무엇보다 더할 나위 없는 소비의 기쁨이 그녀를 끝내 탈주하게끔 한다. 소설에서 키워드가 되는 단어는 ‘만능감’萬能感'이다. 마치 우주의 중심이 된 듯,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그 기분. 리카는 고타와의 첫날밤 이후 상쾌한 새벽 공기를 맡으며 달뜬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하늘에 걸친 희미한 새벽달을 보며 행복의 실체를 실감한다. 소설 <종이달>은 그렇게 평범함을 거부하는 리카를 끝까지 지지하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리카는 고객의 돈을 서류상으로 조작하고 돈을 쓴다. 하지만 돈을 쓸 때도 그것은 신용의 거래에 불과할 뿐 돈의 실체는 나타나지 않는다. 소설은 허상에 불과한 돈이 과연 노동의 가치를 대변하고 있는가에 의구심을 가진다. 우리는 매일 보이지도 않는 무언가를 위해 출근해서, 고작 하루도 만능감을 느끼지 못한 채 이십 년 후의 계획에 매달리고 있는 건 아닌지. 행복을 유예하는 방식의 버팀이 과연 무슨 의미일지. 소설은 결국 리카라는 캐릭터를 통해서 우리가 사는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 질문하고 있다.

소설 <종이달>의 시대적 배경이 일본의 거품 경제가 무너지던 1990년대라는 점은 기록해둘 만하다. 일본 문학에서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은 사회파 미스터리는 버블경제의 몰락 간 인간 군상을 조명하는 데 주력한다. 각종 명품 브랜드가 치장하는 중산층의 삶은 급격하게 불어난 융자액과 빈부격차, 고금리 대출의 늪에 빠져 무너져버린다. 민주화 항쟁 이후의 후일담 소설처럼 잃어버린 20년이라고 불리는 일본의 경제 침체기는 여러 지류를 만들어낸다.

<희박한 공기 속으로>(1997), 존 크라카우어 저

<희박한 공기 속으로>는 영화 <에베레스트>의 원작 논픽션이다. 주요 내용은 1996년 5월 10일 ‘로브 홀’이라는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가이드의 인솔 아래 ‘존 크라카우어’가 직접 에베레스트를 등반한 과정을 재구성한다. 저자는 당초 돈을 받고 에베레스트 정상으로 인도하는 상업등반대를 비판하는 기사를 쓰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에베레스트를 비롯한 네팔의 봉우리들은 상업등반대의 무분별한 등반으로 엄청난 쓰레기에 신음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자가 참여한 등반대가 악천후로 리더인 로브 홀을 비롯한 12명이 사망하면서 책의 방향은 사건의 진위를 따라가는 방식으로 바뀐다.

​이 책의 원제는 ‘Into thin air : a personal account of the Mount Everest disaster’이다. 말 그대로 존 크라카우어가 사고 당사자들을 찾아가 인터뷰한 내용이다. 죽은 사람들은 말이 없고, 남겨진 사람들은 감정의 날이 잔뜩 서 있다. 사고를 향한 이해관계는 저마다 다르고,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기 위한 왜곡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책을 집필한 시점이 사고의 여파가 아직 사라지지 않은 고작 1년 후라는 점은 꽤 충격적이다) 저자는 아직 정신적 상흔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당시 생존자를 향해 사정없이 날카로운 질문을 쏟아낸다. 어떤 이는 울고, 어떤 이는 고조된 감정에 못 이겨 인터뷰를 포기한다. 존 크라카우어는 기자가 쓸 수 있는 논픽션의 한계를 시험하듯 사건의 진위를 통제하면서 진실에 접근한다.

<희박한 공기 속으로>가 그렇다고 오직 사건에만 몰두하는 책은 아니다. 존 크라카우어는 수천만 년 전 인도 대륙과 아시아 대륙이 서로 융기해 오른 산맥인 에베레스트가 인류에게 끼친 역사적 흐름을 서술한다. 에베레스트는 티베트어로 '초모룽마, 우주의 어머니 혹은 세계의 여신'이라는 뜻이다. 네팔어로는 '사가르마타, 하늘의 어머니'로 불린다. 이처럼 가장 높은 봉우리라는 신화적인 명성은 인류의 끝없는 도전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을 읽는다고 왜 인간들이 굳이 그 험준한 산맥을 오르려 하는지 알 수는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오늘날 산악인들이 직면한 고민과 생각에 관해서 이해할 수 있게끔 풀어낸다. 또한, 등정 장비와 등반 기술이 발전함으로써 생겨난 상업등반대의 역할과 그 이면에 담긴 기업들의 관계까지 이야기를 확장한다. 추리 문학처럼 긴장감을 유지한 채 재앙의 실마리를 짚어나가는 작가를 따라가 보다 보면 한껏 넓어진 지평을 마주할 수 있다.

<파이 이야기>(2001), 얀 마텔 저

2002년에 부커상을 수상한 <파이 이야기>는 이안 감독의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의 원작 소설이다. 바다를 표류하는 고무보트에 탄 소년과 호랑이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나 나올 법한 이미지지만 <파이 이야기>는 이처럼 단순한 설정으로 세상에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줄거리를 살펴보면, 16살 소년 ‘파이’는 피신 ‘몰리토 파텔’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늘 ‘피싱’(Pissing)과 발음이 같은 이름 때문에 ‘오줌싸개’로 불렸으나, 그는 제 이름 앞의 두 글자(PI)를 따서 파이라고 자칭한다. 파이는 자신의 이름이 가진 수의 무한 배열처럼 불규칙적이고 아득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파이는 어릴 적부터 죽음을 두려워해 힌두교, 천주교, 이슬람교 교리를 차례로 섭렵했다. 그들 각자의 믿음을 존중하며 이해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의구심이 들기 시작한다. 동물원의 주인이기도 한 서구식 합리주의자를 자처하는 아버지 때문이다. 파이의 아버지는 어릴 적 중병을 앓았다가 당시에는 드물게 서구 의학으로 목숨을 건진 경험이 있다. 그래서인지 그는 신앙에 의지해 삶의 기반을 쌓아가는 파이에게 이성을 공부하여 균형을 찾기를 바랐다. 그렇게 파이는 세상을 향한 풀리지 않는 의구심을 가슴에 품은 채 비틀거리는 성인이 된다.

청년이 된 파이는 가족과 함께 캐나다 이민 길에 오른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배가 난파하면서 파이를 제외한 모든 가족이 죽는다. 구사일생으로 조난자를 위한 고무보트 위에 우라 탄 파이는 그곳에서 탈출한 얼룩말, 하이에나, 오랑우탄 그리고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를 발견한다. 삽시간에 아비규환의 수라장으로 변한 보트는 이제 살육의 장이 된다. 고작 두 평도 안 되는 곳에서도 약육강식은 엄연해서 결국 인간과 호랑이만 남는다.

어렵사리 리처드 파커와 동거를 시작한 파이는 막막한 시간을 앞에 두고 글을 쓴다. 정확히 말하면 생존 일지를 남긴다. 그 과정에서 파이는 성인이 되며 잊고 지냈던 의문 앞에 선다. 삶은 무엇인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그걸 답하는 여러 사유가 소설의 주를 이룬다. 소설의 결말은 비교적 단순하다. 풍요를 갈망하며 태양 앞에 선 인간에게 상상력이야말로 구심력이 될 것이라는 전언이다. 생계와 노화는 지속적인 원심력을 자아내지만 어떻게든 추슬러서 다시 힘을 모으는 것이야말로 삶일 것이다. 파이는 망망대해에서 글을 쓰면서 창작이야말로 모든 혼란의 종착지임을 눈치챈다. 이 소설의 결말은 반전으로 유명하다. 이를 폭력적으로 요약하면 단순하다. 자신이 원하는 이야기를 선택하라. 파이는 리처드 파커가 유유히 자신을 떠나자 서럽게 운다. 이제 한 이야기가 끝이 났고, 다음 챕터로 넘어가야 할 순간이다. 우린 현실의 막연한 벽 앞에서 또 다른 창작의 고통을 겪어내야 한다.

저자 얀 마텔에 관한 한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그는 한때 한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낸 것으로 한국 언론에 오르내렸다. 2013년 한국에서 출간한 <각하, 문학을 읽으십시오>에서 얀 마텔은 “조금은 뒤로 물러나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위해 독서가 필요하다. (중략) 현재의 순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광적인 정치적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대통령님이 진정으로 무엇을 하기를 바라고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냉철하게 판단하기 힘들 것”이라고 대통령에 조언했다. 특히 그는 무엇보다 문학을 강조했다. “픽션을 읽으십시오. 그것이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모든 정치인이 원하는 것이 새로운 세계, 더 나은 세계를 이룩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현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을 목도하며 걸어가는 자유의지의 여정이다. 그렇다면 픽션 무엇일까? 허구는 현실 세계를 조금 변형시켜 자기 입맛에 맞게 의미를 부여하는 삶의 방식이다. 파이는 더 나은 이야기를 지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작가 얀 마텔은 고귀한 신과 야만스러운 삶 속에서 갈등하던 소년에게 망망대해라는 백지를 선사했다. 이제 제대로 쓸 일만 남은 셈이다.

메인 이미지 영화 <에베레스트>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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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 그리고 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쓴다. 지은 책으로는 <우리 각자 1인분의 시간>, <보내지 않을 편지>가 있다. 염세주의자가 되고 싶으나 하루 세끼 먹을 때마다 행복하다.
박민진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