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에는 이미 현대까지 아우르는 훌륭한 예술사 책이 많다. 예를 들면 불세출의 고전으로 불리는 곰브리치 <서양미술사>와 대학 교재로도 쓰이는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가 그렇다. 하지만 나른한 일요일 아침 미술관을 찾는 관람객에겐 그런 정통 학술서는 문지방만 높일 뿐이다. 특히 난해하고 복잡한 현대미술 전시회 카탈로그처럼 좀처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과연 제프 쿤스의 꽃과 풍선으로 장식한 강아지나 데미언 허스트의 물에 빠진 상어를 보면서 어떤 말을 보탤 수 있을까. 오늘 소개할 책들은 미술에 관한 풍부한 예시와 더불어 생동감 넘치는 공상까지 가미한 오직 재미있는 미술책이다. 무엇보다 전시회 한 번 들르기 부담스러운 요즘 시대에 방구석에서 뒹굴뒹굴하며 읽기에 더할 나위가 없는 교양서다.

 

<발칙한 현대미술사>(2014)

<발칙한 현대미술사>의 원제는 'What Are You Looking At?'이다. 점점 더 이해하기가 난감해지는 현대미술을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할지 고심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저자 윌 곰퍼츠는 테이트 모던의 관장을 역임하면서 미술을 하나의 놀이로써 즐길 수 있도록 최대한 쉽게 풀이한 책을 쓰고자 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스토리텔링이 마치 역사 소설을 읽는 듯 유려하다. 미술 안에 갇히기보다는 새로운 미술사조가 탄생할 시기의 세계 정치 상황과 문화예술계 전반을 아우르면서 시각을 넓혀 나간다. 책을 사면 부록으로 지하철 노선도처럼 생긴 현대미술 사조 흐름도를 볼 수 있는데, 이는 과거와 현재가 어떠한 영향 관계 안에서 이어져 왔는지 보여준다. 무릇 예술이라 함은 하늘에서 내려온 영감을 받아서 세상에 없는 것을 창조하는 행위로 여기기 쉽지만, 실은 어제와 오늘이 긴밀하게 결속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저자의 관점이 드러난다.

이 책이 말하는 미술의 서사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는 독일의 화가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사례다. 그는 고향인 안트베르펜에서 대규모의 공방을 운영했는데, 루벤스가 밑그림을 그리면 그의 수많은 조수와 제자들이 그것을 채색하는 방식으로 대규모 생산체계를 구축했다. 루벤스는 단순히 콘셉트와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역할에 불과했고, 호사가는 그의 축소된 역할을 흠잡으며 그를 깎아내렸다. 하지만 현재의 미술사조와 이어서 보면 예술가가 기획에 집중하는 작업 방식은 개념 미술의 시초로 볼 수 있다. 제프 쿤스, 데미언 허스트, 앤디 워홀과 같은 대형 스타들이 자신들의 작업실을 아예 'Art Factory'라고 명하기에 이른 요즘 상황과 다를 게 없다. 장인의 손끝으로 창조력을 발휘하던 고전 미술이 기획과 마케팅의 영역으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가치판단의 기준이 달라졌다. 미니멀리즘 작가 댄 플래빈은 말한다. "작품 자체와 그 구현은 순간적인 쾌락에 불과하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아이디어를 적어 서랍에 넣어둔 종이 한 장이다." 미술이 오직 작품 한 점이라는 고유성을 벗어나서 대량생산 시대를 통과하면서 특권층이 아닌 대중에게로 다가선다. 레디메이드, 팝아트, 설치미술, 관객 참여형 작품은 언뜻 보면 그 맥락을 이해할 수 없지만, 과거부터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뭔가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이어져 온 미술사의 흐름이 오늘날의 현대미술에 물줄기를 대었음은 분명하다.

 

<위작의 미술사>(2017)

미술은 단 하나뿐이라는 절대성으로 관람객을 유혹했다. 소더비와 크리스트에서 수백억을 호가하는 작품이 오르내리는 것도 다 그 고유함 때문이다. 세상에 하나뿐인 작품을 소유한다는 것은 특권이므로 예부터 귀족과 부호가 고가의 예술품을 소유했다. 그래서인지 하나뿐인 진품은 세월을 이겨내며 그 가치를 높여왔고, 여전히 세계의 미술관을 오가며 관람객의 지갑을 열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명성이 높아질수록 그 절대성을 허물고자 하는 시도는 계속됐다. <위작의 미술사>는 위작의 세계를 조망하며 작품 그 자체보다는 미술사가 지닌 메커니즘을 이해하게 도와주는 책이다. 왜 잊을만하면 가짜 미술이 판을 치고,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위작 논란은 끊이질 않을까?

예나 지금이나 미술계는 공공연하게 위작을 용인해왔다. 고객은 실제 진품보다 싸게 살 수 있다는 점에 끌렸고, 파는 쪽은 실패한 미술가를 이용해서 저렴한 제작비용으로 큰돈을 벌어 공생관계를 맺었다. 때로는 위작이 유명세의 증거로 여겨져 진품 작가도 묵인할 때가 많았다. 작가 본인도 분간하지 못할 만큼 정밀한 위작은 원작보다 더 높은 가치를 부여받고 대중에 공개됐다. 이는 구조는 가장 순수한 예술로 불리면서도 그 어떤 예술보다 돈 냄새가 나는 미술계의 생리를 잘 보여준다.

이 책에 소개된 대표적인 위작가 파벨 제르다노비치는 1920년대, 막 인상주의가 태동하고 살바도르 달리가 초현실주의로 미국에서 날리던 시절에 활동했다. 파벨은 자신의 고상한 아내가 미술계에서 냉대를 받는 것에 화가 나 직접 작가가 되기로 한다. 그는 제르다노비치라는 러시아식 가명을 만들고, 폴 고갱의 작품에 장난을 쳐서 디섬브레이셔니즘이라는 엉터리 사조를 꾸며낸다. 하지만 장난이 너무 진짜처럼 보이면서 모두를 속이며 큰 명성을 얻는다. 모든 게 파벨의 의도대로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장난을 폭로하면서 미술계가 얼마나 허황한 곳인지 지적했다. 파벨은 허영과 사치스러움이 가득한 그들만의 세계에 조롱 어린 비웃음을 남기고 떠났다. 파벨의 사례는 현대미술이 처한 난해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됐다. 파벨 이후에 보란 듯이 세기의 장난꾸러기들이 현대미술을 장식했다. (변기통을 들고 전시회에 들어선 한 남자의 만연한 미소를 떠올려 보라) 주류 가치를 부정하고 조롱하며 종국에는 판도를 바꾸려는 현대미술의 특징은 파벨 제르다노비치의 위작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방구석 미술관>(2018)

<방구석 미술관>은 야화 위주로 작가와 작품을 소개하는 교양서다. 마치 타블로이드지의 자극적인 머리기사처럼 작가의 뒷얘기를 통해 독자를 미술로 유인한다. 예술가의 사생활은 그림만 보고서는 알 수 없는 작품 이해의 실마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시종 흥미롭다. 특히 연애와 가족 문제를 예술가의 작품과 연관 지으면서 극적 효과를 자아내는 서술이 인상적이다. 고흐의 알코올 중독이나 칸딘스키의 바람기, 피카소의 여성 편력과 세잔의 기행이 대표적이다.

19세기 러시아 화가 칸딘스키와 가브리엘레 뮌터의 연애가 흥미롭다. 동료이자 나이 많은 유부남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와 사랑에 빠진 가브리엘레는 불륜녀 딱지를 달고 8년간 그와 사귄다. 칸딘스키는 러시아에 있는 본처와의 이혼을 약속하고 가브리엘레를 계속 만났지만, 끝내 가브리엘레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재혼했다. 가브리엘레는 이 당시의 절망을 편지로 남겼다. "나는 경험을 형상화하는 작업을 해왔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던가? 여기에 쏟은 노력과 작업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두 사람이 뮌헨 남부의 작은 작업실에서 보냈던 꿈결 같던 시간도 그렇게 빛이 바랬다. 이제 한때는 인생의 전부였던 경험들이 지하창고에 처박혀 녹이 슬어간다. 인생에서 버림받은 사람이 미술로부터도 버림받았다." 가브리엘레는 사랑을 잃고 더는 붓을 잡기 어려웠고, 죽을 때까지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새들의 아침 식사>는 눈 내린 추운 겨울, 아침에 차 한잔을 따라놓고 생각에 빠진 가브리엘레의 복잡한 속내를 비친다. 스산하고 처연한 뒷모습의 여인은 아무 말없이 테이블 위에 올려진 빵 한 조각만 지그시 바라본다.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2019)

줄리언 반스의 첫 미술 에세이다. 그의 현학적이고 감각적인 소설을 좋아하는 팬들에겐 생활인 줄리언을 엿볼 좋은 기회다. <아주 사적인 미술산책>의 특징은 경계 없는 미술 관람의 방식이다. 제리코에서 들라크루아, 마네, 세잔을 거쳐 마그리트와 올든버그, 하워드 호지킨까지 낭만주의부터 현대 미술을 아우르는 17편의 작품을 바라보는 방식이 저마다 다 다르다. 이 책은 결국 하나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다방면의 지식이 얼마나 폭넓은 이해를 제공하는지 보여준다. 무엇보다 유머와 통찰이 적절하게 버무려진 스토리텔링 능력이 마음의 문턱을 가뿐하게 넘어선다. 철저한 사전 조사와 집요한 묘사, 세밀한 구성까지 늘 배우는 자세로 미술을 접해왔던 관람객에게 미술이라는 자기만의 방을 제공한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다. 줄리언 반스의 사적인 취향인 셈인데 그중에서도 스페인 화가 펠릭스 발로통의 작품을 보는 시각이 흥미롭다. 작가는 볼티모어 미술관에서 발로통의 작품을 보고 "처음에는 마티스나 다른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에 정신이 팔렸지만, 끝까지 나를 가장 충실하게 붙잡아둔 것은 스위스 화가 펠릭스 발로통이 그린 '거짓말'이라는 제목의 작고 강렬한 유화였다." 이 그림에서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를 감싼 정장 차림의 남자의 모습은 통속 소설을 떠올리게 한다. 여자는 남자의 귀에 뭔가 달콤한 말을 속삭이는 것 같지만 남자는 그걸 귀담아듣지는 않는다. 남자는 되려 딴생각에 젖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거짓말은 누구의 입에서 나오는 걸까? 줄리언 반스는 누가 일류 소설가 아니랄까 봐 온갖 상상을 덧붙이며 그림을 풍성하게 덧칠한다. 시간의 더께를 털어내고 자유자재로 뻗어 나가는 태도는 미술 산책이라는 제목과 퍽 잘 어울린다.

 

메인 이미지 펠릭스 발로통 ‘거짓말’

 

Writer

영화산문집 <우리 각자 1인분의 시간> 저자. 영화와 책, 그리고 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쓴다. 염세주의자가 되고 싶으나 하루 세끼 먹을 때마다 행복하다.
박민진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