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매일 카페에 간다. 날씨는 덥고 몸은 축축 처지니 카페만 한 곳이 없다. 에어컨 빵빵하지 와이파이 잘 터지지 맛있는 커피까지 내어주니 낙원과 같다. 요즘은 카페에서 오랫동안 추리 소설을 읽는다. 이야기에 푹 빠져서 산다. 그러다가 밤이 오면 열대야를 피해 동네 극장을 찾는다. 객석에 앉아 긴장감 넘치는 영화를 보면 불쾌지수는 현저히 낮아진다. 가끔은 내가 직접 이야기를 짓기도 한다. 잠이 못 드는 밤, 현실과 허구가 뒤섞인 기상천외한 줄거리를 만드는 게 내 나름의 피서다. 이처럼 이야기는 코로나와 불볕더위에 지친 사람들의 버팀목이다. 주위에 물어보면 OTT 서비스나 소설책과 같은 이야기 속에 은거하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래서 오늘은 ‘이야기’가 그 자체로 주인공인 영화를 세 편을 골라봤다.

 

<인 더 하우스>(2012)

프랑수아 오종의 2003년 작 <스위밍 풀>의 포스터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다. “아무 일도 없었다. 그녀가 나타나기 전까진...” 영화는 조용하게 살던 노작가의 집에 의문스러운 여성이 방문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다. 잠잠하기만 할 것 같았던 노인의 순탄한 일상에 차츰 균열이 생기면서 뜨거워진다. 프랑수아 오종은 수영장에서 비키니를 입고 누운 관능적인 여성과 그 젊음을 시기하는 노작가의 시선을 교차시키며 이야기를 비틀기 시작한다. 마치 우리는 왜 늘 이야기를 빠져 지내는가에 대한 답을 구하듯 작화증에 빠진 인물을 앞세워 욕망과 상상이 뒤얽힌 양상을 자아낸다. 오늘 소개할 영화 <인 더 하우스>도 유사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화자는 작가가 되길 희망했지만, 지금은 평범한 문학 교사로 사는 ‘제르망’이다. 제르망은 학생들의 성의 없는 작문 과제를 보며 혀를 끌끌 찬다. 지난 주말에 뭘 했는지 묻는 과제에 단 두 줄로 답한 녀석도 수두룩하다. “지난 일요일, 나는 피자 먹고 TV 보고 놀았다.” “토요일 부모님에게 스마트폰을 빼앗겨 화가 났다.” 이런 무성의한 글을 보며 제르망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누르지 못한다. 그는 문학이 안중에 없는 요즘 세대가 못마땅하다. 책을 멀리하고 오직 자극적인 영상에만 빠진 애송이들이 지겹다. 그런 와중에 제르망을 완전히 사로잡는 글을 발견한다. 늘 교실 뒷자리에서 조용히 수업을 듣는 학생 클로드의 과제다.

클로드는 친구 ‘라파’의 집을 방문했던 경험을 과제로 적었다. 언뜻 평범해 보이지만 글 속에는 클로드가 그려낸 라파의 부유한 집에는 친절하고 아름다운 라파의 엄마가 있다. 그리고 금기를 허무는 일이 발생한다. 클로드는 한창 이야기를 절정으로 치닫다가 숙제의 끝에 ‘다음에 이어진다’라는 문장을 덧붙이고 끝을 낸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인 제르망은 자신이 클로드의 이야기에 완전히 매료되었음을 깨닫는다. 제르망은 우습게도 한낱 고등학생의 어쭙잖은 성적 욕망에 완전히 사로잡힌 것이다. 클로드의 과제는 누가 봐도 윤리적인 결함이 있다. 교사가 학부모를 욕망하고 학생이 한 가정을 파괴하는 이야기는 불편하다. 하지만 제르망은 이야기가 흥미진진하다는 이유로 이 모든 걸림돌을 무시한다. 창작의 영역만큼은 그 어떤 제약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 교사로서의 정체성을 앞지른다. 제르망의 아내는 최근 들어 변해버린 남편에게 이렇게 묻는다. ‘당신 그거 알아? 그 아이의 글을 읽은 후부터 나랑 섹스를 안 하기 시작했어.’ 제르망은 이야기로 관능을 느끼며 전에 없는 열기에 휩싸인다. 미스터리 한 이야기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스위밍 풀>에서 비키니를 입은 묘령의 여인과 다를 바 없다.

프랑수아 오종은 한 소년의 욕망 어린 상상을 통해 이야기의 파장을 보여준다. 이는 우리가 왜 그토록 긴 시간 문학을 읽고, 많은 돈을 지불하며 영화를 보는가에 대한 대답이다. 카페를 찾아 소설을 읽으면서도 옆자리에 앉은 이를 모를 타인을 흘깃 보면서 우린 어떤 상상을 하는가? 어쩌면 우리는 더 좋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삶을 이어나가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늙고 죽어 없어질 몸이라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이야기에 매달리는 게 인간의 본능 아닐까? 이런 과장된 생각은 프랑수아 오종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실마리가 된다. 제르망은 평생 독서와 창작에 힘써왔으나 작가로서의 꿈은 이루지 못한 남자다. 제르망은 모처럼 발견한 도발적인 이야기를 읽으며 권태롭기만 했던 삶이 점차 부풀어 오르는 걸 느낀다. 이와 같이 좋은 이야기에는 언제나 인간의 심연을 건드리는 뭔가가 있다. <인 더 하우스>는 결핍한 인물에게 좋은 이야기를 선사하며 삶이 전과는 달라졌다고 선언한다. 커튼이 드리운 창 너머에 어떤 존재가 있을까? 한적한 공원 벤치에서 낯선 집의 창을 뚫어지라 쳐다보는 제르망은 이제 더는 늙어 보이지 않는다.

 

<그녀에게>(2002)

간호사 ‘베니그노’는 평소 짝사랑했던 발레리나 ‘알리샤’가 식물인간으로 입원하면서 ‘그녀’를 돌보기 시작한다. 알리샤에게 벌어진 최악의 사건이 베니그노에게는 범접할 수 없었던 그녀에게 다가가는 계기가 된 셈이다. 아마도 알리샤가 사고를 당하지 않았다면 베니그노와 만날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베니그노는 숨 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알리샤를 바라보며 행복을 느낀다. 대답 없는 그녀에게 지속해서 말을 걸며 점점 더 다가선다. 옆 병실에는 한 연인이 있다. 기자인 ‘마르코’는 연인 ‘리디아’를 돌보고 있다. 투우사인 리디아는 황소에 받히는 큰 사고를 당해 코마 상태에 빠졌다. 마르코는 이도 저도 못 하는 복잡한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며 그녀를 원망한다. 답 없는 애인을 바라보는 그의 속은 타들어 가고, 그렇다고 그녀를 버리고 떠날 수도 없다. 마르코는 리디아가 사고를 당하지 않았으면 이별을 통보할 예정이었다. 불의의 사고가 그의 모든 앞길을 막은 셈이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처지인 베니그노와 마르코는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속내를 이해한다.

베니그노 의식이 없는 알리샤에게 자신이 경험을 들려준다. 간접적으로나마 알리샤에게 추체험을 제공한다. 미동조차 없는 그녀에게 온갖 이야기를 들려주는 베니그노의 모습은 영화를 대표하는 이미지다. 알리샤가 만약 의식을 차린다면 즉시 베니그노를 멀리할 테지만,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알리샤 안에 머물 것이다. 베니그노로서는 그녀가 깨어날 때까지 온 힘을 다해서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비록 일방적이지만 그녀와 통할 수 있다면 지어내서라도 말을 걸 것이다. 영화는 조바심 나고 위태로운 순간을 간신히 피해 가며 이 위태로운 사랑이 어디까지 가는지 지켜본다. 마르코는 베니그노처럼 신나게 리디아를 돌볼 수 없다. 마르코는 이제 리디아를 지우고 제 갈 길을 떠나려고 결심했다. 제 처지에 언제까지 그녀에게 매달릴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문제는 리디아에 직접 이별을 고할 수 없는 상황이다. 베니그노가 끊임없는 대화를 시도하며 알리샤와 이어지려 한다면, 마르코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지금 상황에 절망한다. 통하지 않아도 말을 거는 자와 통하지 않아서 말을 할 수 없는 마르코는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두 사람의 사랑은 어떻게 막을 내릴까. 영화 <그녀에게>는 원제 'Talk To Her'처럼 대답 없는 이를 향한 주문이다.

 

<러시안 소설> (2012)

<러시안 소설>은 문학을 향한 자기 고백적 성격이 짙다. 영상 언어인 영화가 문학에게 바치는 숭배처럼도 보인다. 영화 이미지가 문장의 여파를 더 확장하고, 시청각의 묘사로 문장에 생명력을 불어넣기도 한다. 이런 효과의 핵심은 러닝타임 내내 등장하는 나지막한 내레이션에 있다. 영화의 분위기를 쥐고 가는 목소리는 분투하는 청년의 굽은 등을 위무하고, 두꺼운 소설을 끼고 자는 문학도의 가난을 응원한다. 외로운 타지에서 잠도 없이 톨스토이만 생각하는 소녀, 27년 만에 깨어나서 자신의 기원을 찾아 떠나는 러시안 소설 같은 남자, 문학적 상징을 낚으려고 온 세상을 헤매는 낚시꾼까지. 영화는 과거와 현재, 인생과 소설 사이를 넘나들며 삶과 예술을 구획 짓는 경계를 지워낸다. 추상적이고 복합적인 주제를 섬세하게 풀어낸 신연식 감독의 연출력이 빛을 발한다.

 

Writer

영화와 책, 그리고 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쓴다. 지은 책으로는 <우리 각자 1인분의 시간>, <보내지 않을 편지>가 있다. 염세주의자가 되고 싶으나 하루 세끼 먹을 때마다 행복하다.
박민진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