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판원인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벌레가 된 채 깨어난다. 지인과 회사 동료, 가족까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한다. 1915년에 출간한 <변신>은 독일에 살았던 유대인이자 체코인이었던 카프카가 자신의 정체성이 결여된 것을 괴로워하며 쓴 소설로 알려졌다. 외모의 변이는 한 인간을 지워낸다. 그가 이룬 모든 사회적 성취가 증발한다. 단지 겉모습이 변한 것뿐인데 어쩌면 그게 다일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농담이다. 어떤 이유나 맥락을 찾을 수 없는 자기부정의 현장에서 현대인의 불안이 드러난다. 타인을 통하지 않고는 어떠한 자기동일성을 찾을 수 없다는 섬뜩한 이야기다. 그 밖에도 도시가 주는 소외감, 주류가 되지 못함 박탈감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이처럼 오늘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괴로워하는 인간을 비춘 소설을 세 편을 소개한다. 마치 증발한 것처럼 정체성을 잃어버린 인물들의 선택을 눈여겨보자.

* 아래 본문에 스포일러가 일부 있습니다.

 

밀란 쿤데라 <정체성>(1998)

‘장 마르크’라는 남자는 노르망디 해변에 있는 연인 ‘샹탈’을 찾아 헤맨다. 멀리서 샹탈를 발견하고 다가가지만 정작 뒤돌아선 이는 샹탈이 아니다. 장 마르크는 혼자 되뇐다. “그녀와 다른 여자들의 차이가 그렇게 미미한 것일까?” 나의 그녀가, 내가 늘 품던 샹탈의 몸이 달라지면 난 그녀를 알아볼 수 있을까? 장 마르크는 어느 요란한 파티에서 타인과 어울리는 샹탈을 낯설게 느낀다. 내 앞에서 손을 괴고 미소 짓던 얼굴이 그들 앞에선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그 생경함에 진위를 알 수 없는 이물감이 느낀 장 마르크는 샹탈의 존재에 의구심을 품는다.

뉴스에선 결혼 15년 만에 이혼을 결정한 연예인 부부가 인터뷰한다. “내가 알던 그가 아니었어요. 그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지독하게 날 괴롭혔어요.”한 인간의 절단면엔 얼마나 다른 층위가 있을까? 심리학의 ‘역할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행동은 어떤 내적인 소질, 재능, 욕망 등의 표현이 아닌 집단 속에서 차지하는 포지션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맡느냐’에 따라 우린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 사이의 관계는 서로가 의식하지 못한 다른 결을 드러낸다. 쿤데라의 소설 <정체성>은 나를 규정하는 정체성이 어떻게 변모할 수 있는지 사색하는 작품이다.

샹탈은 다섯 살 난 아이를 잃고 전 남편과 이혼한다. 아이가 죽자마자 다시 임신하기를 촉구하는 시댁에 혐오를 느낀다. 죽은 아이를 부정하려는 태도에 두려움을 가진다. 엄연히 존재했던 내 아이를 쉽게 잊는 이들이 역겹다. 샹탈은 그 속에 설 자신이 없다. 사실 알고 보면 샹탈의 속내는 좀 더 복잡하다. 샹탈에겐 혹독한 슬픔 외에도 아이가 사라짐으로써 은밀한 기쁨을 느끼기도 한다. 그 어느 곳에서도 말로 꺼내기 어려운 환희와 자유를 느낀다. 결혼과 아이로 인해 가로막혔던 또 다른 삶이 샹탈을 찾아온 셈이다. 샹탈은 결혼 전 다녔던 광고회사에 다시 취업한다.

샹탈은 거리를 걷다가 문득 남자들이 더는 자신에게 눈길을 주지 않음을 깨닫는다. 그들의 무관심에 자신이 말라가고 있음을 느낀다. 우주 속으로 영원히 사라지는 장미처럼 늙음은 곧 소멸 아닌가. 매끈하던 살이 늘어지고 맑은 침에선 악취가 난다. 작가 필립 로스의 말처럼 노년은 대학살이다. 그렇게 낙담하는 샹탈을 보는 연인 장 마르크는 안타깝다. 이름도 진부한 ‘시라노’라는 필명으로 샹탈에게 연서를 부친다. 타인을 가장하여 샹탈에게 절절한 구애를 바친다. 샹탈은 난데없이 도착한 의문의 편지에 깊은 감명을 받는다. 자신에게 관심을 주는 미지의 존재에 떨림을 느낀다. 샹탈은 남편 몰래 편지를 숨기고, 거들떠보지도 않던 진주 목걸이를 차고 거리에 활보한다. 낯선 시선을 의식하며 걷는 샹탈의 발걸음이 가볍다. 이를 바라보는 장 마르크의 마음은 착잡해진다. 다른 존재가 되지 않고는 샹탈에게 매혹이 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샹탈은 타인의 시선을 통해 다른 존재가 되었고, 그 과정에서 시간은 장 마르크를 구시대의 유물로 치부했다. 과연 내가 알던 샹탈은 어디에 있는가?

 

모니카 마론 <슬픈 짐승>(1996)

때는 독일 통일 직후, 동독 출신의 화자 '나'는 서독에 살던 남자 ‘프란츠’와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은 모두 아내가 있지만 우연한 만남 이후 불타오른다. 차이가 있다면 여성화자 '나'는 사랑을 위해 가정을 포기했는데, 프란츠는 두 집 살림을 오가며 그녀를 만난다. 멀티태스킹을 하는 쪽은 늘 사랑을 나눠줘야 하기에 남겨진 화자는 불행할 수밖에 없다. 소설의 제목처럼 짐승이 왜 슬픈지 알만 했다. 화자에겐 인생을 건 사랑이지만 프란츠에겐 그저 외도에 불과하다. 관계의 농도가 다른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끝내 파국으로 치닫는다.

소설의 시점은 두 사람의 사랑이 소멸하고 한참의 세월이 지난 뒤다. 여성 화자는 노년이 되어 알츠하이머병에 시달리고 있다. 그는 미약한 기억을 붙잡고 자신의 마지막 사랑이었던 프란츠를 회고한다. 소설은 대놓고 파편적이며, 불분명한 기억과 망상을 뒤섞어 도통 진위를 알 수 없게 만든다. 이런 실험적인 형식은 점점 기억이 소멸해가는 화자를 영원한 사랑 안에 가둔다. 강렬했지만 실패한 사랑이기에 결코 미소 지을 수 없는 구렁텅이에서 신음한다.

소설을 다 읽고 한숨을 푹 쉬었다. 실패한 사랑은, 아니 버려진 연인은 날 뒤흔들고 가만히 놔두질 않는다. 책을 다시 펼쳐보니 내가 친 무수한 밑줄이 마치 폭격의 잔해처럼 나뒹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떠올릴 수밖에 없는 회한이 모니카 마론의 문장 곁에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다. 화자를 짓누르는 처절한 감정 묘사가 내 시뻘건 밑줄과 함께 파괴적인 기억을 뱉어냈다. 작가 모니카 마론은 '나'가 홀로 신음하고 고통받는 대목을 마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지휘자처럼 거칠면서도 섬세하고 묘사했다. 속내를 조각칼로 오려낸 것처럼 날이 서 있어서 자꾸만 책장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

<슬픈 짐승>에서 가장 마음이 저리는 대목은 프란츠가 화자와 섹스만 하고 바로 옷을 챙겨 입고 나가는 순간이다. 화자는 버려지기 싫어서 조르고 달래고 화를 내며 온갖 수를 써서 그를 붙잡지만, 프란츠는 무심하게 등을 돌린다. 자신의 견고한 삶 속으로 복귀하기 위해 막차도 끊긴 어두운 거리로 나선다. 한 번 정도는 그녀의 곁에서 자고 갈 법도 한데, 대충 둘러대고 하룻밤은 그녀의 몸에 자신을 맡길 법한데 매정하게 떠나버린다. 쾅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이제 공백이 그녀를 흔들어 놓는다. 그녀는 이제 모든 걸 잃은 망자에 불과하다.

 

뮤리얼 스파크 <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1961)

<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는 1930년대 스코틀랜드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에든버러 마르시아 블레인 사립 여자중학교 한 교실, 담임인 ‘진 브로디’는 아이들에게 일갈한다. 자신은 전성기를 보내는 중이며 내 지시를 따르지 않은 이는 나락으로 떨어질 거라고. 선생은 일부 아이들을 ‘브로디 그룹’이라 명하며 특권을 부여하고 학생들을 권위를 통해 굽어본다.

학창 시절엔 울타리가 작아 매일 만나는 친구와 교사가 가진 영향이 상당하다. 진 브로디는 누구나 한 번쯤 겪은 바 있는 학창 시절의 절대자를 형상화한 캐릭터다. 진 브로디는 세계대전 후 연인을 잃었으나 마땅한 보상을 받지 못해서 사회에 반감을 품은 교사다. 그의 급진성은 성향은 가뜩이나 보수적인 사립학교에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킨다. 이는 기존 가치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회 흐름과 맥을 같이한다. 여성에 대한 차별 대우, 약자에 대한 처우 개선이 사회적 화두로 떠오르던 시절 아닌가. 진 브로디는 영국 중산층 가정 학생을 대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종교 갈등, 교육 보수화가 가진 병폐를 자연스럽게 끄집어낸다. 하지만 역사 개혁이 늘 그랬듯이 위태로운 면이 속속 드러난다. 가령, 옳은 길을 위해서 속임수 정도는 눈감을 수 있다고 말하는 태도 하며, 무솔리니 파시즘에 대한 찬양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폭력을 통해 세상을 구출할 수 있다고 믿는 선동가의 목소리가 라디오, 텔레비전, 거리의 벽보마다 시끄럽게 쏟아지고 있다. 진 브로디는 이른바 큰 가치를 위해서라면 작은 가치는 희생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예를 들면, 자신이 운영하는 브로디 그룹에 일부러 열등한 학생을 끼워 넣고 우월감을 즐기는 방식은 나치의 우생학을 떠올리게 할 만큼 섬뜩하다. 계급투쟁이 발발하고 그 여파로 희생된 무고한 이들을 외면하는 꼴은 단상 위의 선동가 못지않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세상을 위해 거치적거리는 눈엣가시는 치워 마땅하다. 진 브로디는 시대의 이념 투쟁에 정체성을 잃고 휩쓸려간 무수한 이들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보아왔던가 일그러진 영웅의 몰락, 참호 속에 파묻힌 가치들. 이 소설은 처절한 실패담으로 읽어야 마땅하다.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됨을 알렸던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암호명은 ‘리틀 보이’였다. 어린아이, 꼬맹이, 꼬마라는 뜻이다. 이보다 부드럽고 감동적인 단어가 어디에 있을까? 황금빛 얼굴로 대지 위를 향해 날아간 쇳덩이의 구호다. 그 일촉즉발의 시간, 누군가는 이 폭탄이 휩쓸어버릴 땅 위의 아이를 떠올렸을까? 타인의 고통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메인 이미지 르네 마그리트 ‘The Son of Man’(1964)

 

Writer

영화산문집 <우리 각자 1인분의 시간> 저자. 영화와 책, 그리고 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쓴다. 염세주의자가 되고 싶으나 하루 세끼 먹을 때마다 행복하다.
박민진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