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쓸 때 언어의 한계를 절감한다. 백스페이스를 연타하며 한숨을 쉬기 일쑤다. 그럴싸한 착상도 막상 글로 풀면 볼품없이 흩어지고 만다. 삶은 쉴 틈 없이 이어지는 데 반해 글은 더디고 미진해서 힘에 부친다. 하루는 눈 깜빡할 새 흘러가지만, 내 글은 수 없는 마침표를 찍고서도 깜깜무소식이다. 벌건 눈으로 커피를 들이켜며 조잡한 초고를 만져봐도 패배감만 베어진다. 인식의 끄트머리에 매달려 작가 흉내라도 내보려 아등바등하는 꼴이다. 그래서 소설가 커트 보니것이 이런 말을 남겼나 보다. “나는 글을 쓸 때, 입에 크레용 하나를 물었을 뿐 팔도 다리도 없는 사람처럼 느낀다.” 나는 이렇게 사지가 절단되어 나뒹굴 때 서점으로 향한다. 나를 온전히 이해해주는 일급 작가가 쓴 문장에 밑줄을 치며 안식을 찾는다. 나도 언젠가는 그들처럼 쓸 수 있기를 소망하며 힘을 낸다. 오늘은 치밀한 문장으로 저만의 둑을 쌓은 작가들의 대표작을 소개한다.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2003)

전 국민이 사진작가인 요즘 시대에는 사진 한 장이 온 사회를 뒤흔들기도 한다. 사진을 그만큼 빼도 박도 못하는 팩트로 여긴다. 하지만 작가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을 읽고 나면 사진은 편집된 사실일 뿐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에서 수전 손택은 사진엔 맥락이 거세되어 있으며, 사태를 호도하는 거짓 헤드라인 그 이상이 될 수 없다고 힘주어 강조한다. 사진이 샷(shot)을 통한 프레이밍으로 피사체를 조정할 때 수많은 정보가 소실되기 때문이다. 대중은 사진을 철석같이 믿지만, 오직 제한된 정보만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단편적인 사실에 불과하다. 당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라간 사진이 진짜 당신이 아닌 것처럼 사진은 곧이곧대로 모든 걸 보여주지 않는다.

사진작가 ‘케빈 카터’의 <수단의 굶주린 소녀>는 저널리즘 윤리를 말할 때 주로 인용되는 사진이다. 독수리가 굶주린 흑인 소녀를 노려보는 이 사진은 언론인에겐 최고 영예인 퓰리처상을 안겼다. 하지만 대중의 심판대에 오른 그는 몇 달 후 자살한다. 대중은 사진만 보고 왜 아이를 먼저 구해내지 않았냐고 비난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정치적 혼란으로 곤궁했던 수단 문제를 국제사회에 환기했고, 더 나아가 아프리카 전체가 직면한 식량난을 알리는 데 기여했다. 이로써 다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사진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과연 우리는 사진 한 장으로 얼마만큼 진실에 다가설 수 있을까?

​수전 손택은 사진 그 자체가 아닌 콘텍스트를 보려고 한다. 저널리즘에 입각해서 사진이 미처 포착하지 못한 프레임 밖 현상을 파악하려는 태도를 강조한다. 고로 사진은 진실에 다가설 수 있는 매개에 불과할 뿐 단일 정보로 설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이처럼 수전 손택은 복잡하고 강퍅해 보이더라도 글이란 촘촘한 사유를 통해 진실에 다가서야 하는 매체임을 강조한다. 수전 손택의 대표작 <타인의 고통>은 그녀가 사회의 폭력과 싸워간 투쟁의 기록이며, 매 문장 누군가의 고통을 상상하는 힘을 만들어낸다. 저 사진 속 목숨이 위태로운 아이가 내 삶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걸 증명해낸다.

<타인의 고통>을 읽으며 줄곧 생각했던 건 지식인의 책무다. 수전 손택은 글 곳곳에서 회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지속해서 생각을 허물고 새로 세우는 작업을 반복한다. 자신이 썼던 문장이 틀렸음을 인정하고, 다시 새로운 논지를 세워나간다. 그러면서 원칙에 붙잡혀 게으른 주장을 반복하는 학자엔 각을 세운다. 그를 보고 있으면 지식인이란 늘 다시 생각해보고 항상 '새로고침'을 준비하는 사람이라는 걸 생각하게 된다. 결국, 좋은 글이란 원칙의 단단한 암석 아래 놓이는 게 아니라 늘 부수고 다시 세울 수 있는 벽돌과 같은 게 아닐까?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며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놓는 고통스러운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

 

앤 라모트<쓰기의 감각>(1994)

앤 라모트의 에세이 <쓰기의 감각>의 원제는 'bird by bird'다. 앤 라모트가 어릴 때 일이다. 그의 오빠가 새에 관한 리포트 쓰는데 도무지 풀리지 않아 애를 먹고 있었다. 그때 신문을 읽던 아버지가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다. "얘야 한 마리씩 차근차근 잡으면 된단다." 앤 라모트는 이 말이 무척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그 후 이십 년 후에 글쓰기 코치가 된 라모트는 'bird by bird'라는 구호를 수업에 가져왔다. 글쓰기도 새를 잡는 포수처럼 한 마리씩 해치우면 된다는 말로 작가 지망생을 독려했다. 말 그대로 아무리 어려운 소설도 처음 백 페이지를 꾹 참고 읽으면 궤도에 오를 수 있는 것처럼, 글쓰기도 차근차근 문장에 징검다리를 놓다 보면 마침표를 찍게 된다고 얘기해준다. 이처럼 앤 라모트는 글쓰기에 열의를 갖고 있지만, 막상 노트북만 켜면 어안이 벙벙해지는 이들을 위해 <쓰기의 감각>을 썼다. 서두를 거 없다고, 다들 그렇게 노트북에 이마를 찧어가며 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책을 여러 권 쓴 자신도 여전히 녹록지 않다고 다독인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저 프로 작가도 여태 애를 먹는다는데 내가 뭐라고 영감 운운하며 게으름을 피울 수 있을까 절로 자세를 고쳐 앉게 된다. 그렇다고 <쓰기의 감각>이 무슨 자기계발서처럼 글쓰기는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식으로 호도하는 책은 아니다. 오히려 헛된 희망을 경계하고 글쓰기엔 다른 방도가 없으니 엉덩이가 뜨거워질 때까지 쓰라고 재촉한다. 일상다반사에서 소재를 발굴하고, 인생을 다 털어먹더라도 나만의 얘깃거리를 만들라고 부추긴다.

<쓰기의 감각>이 돋보이는 점은 재치 있는 문장에 있다. 딱딱한 글쓰기 책도 유머를 탑재하면 에스프레소 위에 휘핑을 얹은 듯 절묘한 맛을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살면 살수록 점점 더 유머가 중요한 세상을 살고 있다. 어릴 때야 종일 비관적인 소리만 늘어놓고도 제멋에 취해 살았지만, 나이가 들고 보니 염세적인 비관론자는 어디서든 환영받지 못한다. 이제 유머는 미덕이 아니라 삶의 핵심이자 불가결한 요소다. 앤 라모트는 탁월한 유머 감각으로 글에 활기를 불어넣는 특별한 재능을 지닌 작가다. 메이저리그 마지막 4할 타자 테드 윌리엄스처럼 정곡을 찌르는 어휘를 조탁해서 무릎을 치게 만든다.

앤 라모트는 무엇보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고치고 또 고치라고 강조한다. 초고를 아무리 재빨리 완성해봤자 그건 중고 침수차처럼 손봐야 할 곳투성이다. 시간을 들여 마치 새를 한 마리씩 사냥하는 것처럼 여러 번 퇴고를 거쳐 글을 고쳐보라고 속삭인다. 무엇보다 <쓰기의 감각>을 읽으면 좋은 글보다는 글쓰기 자체에 의욕이 붙고 더 잘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긴다.

"종일 쓴 것이 읽고 보니 엉망진창일 수도 있다. 하지만 좀 그러면 어떤가. 하던 대로 계속 밀어붙이고, 커다란 실수와 시행착오를 범하라. 많은 종이를 다 써버려라. 완벽주의는 졸렬하고 냉혹한 형태의 이상주의이다. 반면 뒤죽박죽 무질서야말로 예술가들의 진정한 친구이다. 우리가 아이였을 때 어른들이 부주의하게도 말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즉 우리가 누구인지, 왜 태어났는지를 깨닫기 위해서는 실패해 볼 필요가 있다는 사실 말이다. 한 걸음 나아가, 우리가 무엇을 써야 할지를 깨닫기 위해서도 실패는 필수다."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2018)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의 가장 빛나는 성취는 심오하고 적나라하며 정교한 문장이다. 정확하기 위해 숙고한 작가의 공력이 느껴진다. 오래 생각하고 고민한 문장에서 빚어지는 곡진함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흔한 글이 되지 않으려고 읽고 또 읽은 이의 글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예술에 대한 감상이 이모티콘으로 대체되는 시대에 이렇게까지 공들여 비평을 적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큰 감명을 받았다. 신형철의 글은 아름답지만 단정하지 않다. 너클볼을 던지는 투수처럼 갈피를 못 잡고 모호하다. 그의 글을 몇 줄만 읽어봐도 삶이라는 건 대체 종잡을 수 없을뿐더러,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모호해짐을 느낄 수 있다. 그렇게 신형철은 잡히지 않는 상념 덩어리를 여러 겹으로 접는다. 비등점을 넘은 소재만 다뤄지는 입들을 뒤로한 채 발품을 판다. 어쩐지 답답해서 하품이 나올라치면 문학이 원래 그런 거라며 고개를 수그린다. 신형철의 산문엔 문학을 향한 구애가 빼곡하고, 타인의 사정을 내 일처럼 돌보려는 노고가 담겨있다. 그 결과 문학이 결코 삶과 동시에 사람과도 멀지 않다는 걸 몸소 증명해낸다. 순수한 미문이 주는 감응을 뛰어넘어 나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품게 만든다.

난 어릴 땐 통찰을 뱉는 사람을 따랐다. 죽비를 내리치는 선승처럼 서슴지 않고 정답을 말해야 끌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세상엔 정답이란 게 애초부터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점점 더 모르는 채 살아감을 실감한다. 세상을 깨우쳐 이끌 수 있다 이의 글은 화끈하지만 겨우 알싸한 뒷맛만 남긴다. 세상을 향한 일갈이 젊음의 특권이라며 경외하던 기억은 그렇게 사라졌다. 난 신형철 작가를 읽으며 내가 좋아하는 인간상이 뭔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섣부른 단정을 내뱉지 않는 사람. 한마디를 던지고도 자신이 놓친 예외에 마음을 쓰는 사람. 그렇게 주저하다 무엇 ‘일 것이다’ 혹은 ‘일지도 모른다.’고 말해버리는 사람. 그래서 난 신형철 작가를 동경한다. 특히 그의 문장을 시샘한다. 때론 그를 모방하며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토라져 그 한없이 비대한 격차에 절망하곤 했다. 신형철은 쉼 없이 에두른다. 표지 속 주저앉은 남자처럼 진실에 베이는 순간을 포착하려 적는다. 얼핏 스쳐 가는 상처를 놓칠세라 유심히 바라본다. 내가 그의 문장을 신뢰하는 이유다.

"나는 ‘소설적인 문장’이라는 것이 따로 있다고 믿는 편이다. 그저 아름답게 쓰면 된다는 뜻이 아니다. 요령부득의 문장을 써놓고 폼을 잡아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동어반복처럼 들리겠지만, 소설적인 문장은 ‘소설적인 문장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속에서 고뇌한 흔적을 품고 있는 문장이다."

 

Writer

영화와 책, 그리고 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쓴다. 지은 책으로는 <우리 각자 1인분의 시간>, <보내지 않을 편지>가 있다. 염세주의자가 되고 싶으나 하루 세끼 먹을 때마다 행복하다.
박민진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