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골든 라즈베리 시상식’은 최악의 영화를 뽑는 시상식이다. 풍자의 의미가 큰 시상식으로,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주연상을 받은 할리 베리와 산드라 블록 등 배우들이 직접 시상식에 참여하기도 했다. 

골든 라즈베리 시상식에서 최악의 배우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가 재평가받은 배우들이 있다. 골든 라즈베리 시상식은 최악의 배우상 외에도 이전에 최악의 배우상 후보였으나 좋은 활약을 보여주는 배우들을 위해 ‘만회상’을 시상하고 있다. 만회상 후보에 오른 배우들 목록을 보면, 키아누 리브스부터 벤 에플렉, 크리스틴 스튜어트 등 화려한 명단을 자랑한다.

영화와 배우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달라지고, 특히 배우들은 어떤 영화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평가가 자주 바뀌곤 한다. 최악의 배우란 없고, 절대적으로 나쁜 연기도 없다. 시대의 평가는 바뀌기 마련이고, 관객의 취향은 늘 제각각이니까. 과거에는 최악의 배우상 후보에 주로 이름을 올렸지만, 그를 만회할 만큼 좋은 연기를 보여주며 재평가받은 배우들이 존재한다. 최악의 배우라는 말이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혹평을 호평으로 바꾼 배우들의 만회작을 살펴보자.

 

멜리사 맥카시의 <날 용서해줄래요?>

‘리 이스라엘’(멜리사 맥카시)은 유명인들의 전기를 쓰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작가다. 집 월세가 밀리고 유일한 식구인 고양이까지 아픈 상황이지만, 리 이스라엘의 아이디어를 반기는 출판사가 없다. 리 이스라엘은 우연히 도서관에서 유명작가의 사적인 편지를 갖게 되고 이를 서점에 판다. 이후 리 이스라엘은 대담하게 유명작가의 편지를 위조해서 서점에 팔기 시작한다.

멜리사 맥카시는 2019년에 열린 골든 라즈베리 시상식에서 최악의 여우주연상과 만회상을 동시에 받는 기록을 세웠다. 멜리사 맥카시를 코미디 연기로만 기억하는 관객들이 많겠지만, <내 여자친구의 결혼식>(2011)과 <날 용서해줄래요?>(2018)로 각각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조연상과 주연상 후보에 올랐을 만큼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다. 멜리사 맥카시는 <내 여자친구의 결혼식>처럼 관객에게 웃음을 주는 영화부터 <날 용서해줄래요?> 같이 시종일관 진지한 분위기의 영화까지 모두 소화하며, 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증명 중이다.

<날 용서해줄래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멜리사 맥카시가 연기한 리 이스라엘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는 걸 두려워한다. 자신의 이야기 대신 타인의 전기를 쓰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결국에는 유명인의 편지를 위조한다. 결국 리 이스라엘이 자신의 삶을 이야기로 써서 세상에 공개했기에, 우리는 스크린을 통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야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멜리사 맥카시가 연기한 리 이스라엘 캐릭터는 세상으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을지 두렵더라도, 결국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세상과 마주한다는 게 중요하다는 걸 느끼게 해준다.

 

에디 머피의 <내 이름은 돌러마이트>

‘루디 레이 무어’(에디 머피)는 가수, 코미디언으로 활동하지만 무명으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어느 날 자신이 일하는 레코드 가게에 부랑자가 들어와서 ‘돌러마이트’라는 가상 인물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루디 레이 무어는 여기서 영감을 얻는다. 루디 레이 무어는 돌러마이트 캐릭터를 활용해서 선정적인 이야기로 가득한 개그를 선보이고, 처음으로 열광적인 반응을 얻고 음반으로도 발매된다. 루디 메이 무어는 여기서 더 욕심을 내고, 돌러마이트 캐릭터를 활용해서 영화를 찍기로 결심한다.

에디 머피는 가장 잘 알려진 코미디 배우 중 한 명이다. 골든 라즈베리 시상식에서 최악의 배우상에 자주 이름을 올렸지만, 평단의 혹평과 달리 그의 필모그래피에는 관객들로부터 사랑받은 흥행작들이 많다. 그의 출연작에 대한 호불호는 있을지라도, 지금까지 오랜 기간 배우로서 사랑받을 수 있었던 건 그가 결국 좋은 연기력을 지닌 배우이기 때문일 거다. <대역전>(1983), <비버리 힐스 캅>(1984), <너티 프로페서>(1996) 등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주며 미국 골든 글로브 시상식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고, 결국 <드림걸즈>(2006)로 남우조연상을 받기도 했다.

<내 이름은 돌러마이트>(2019)으로 에디 머피는 자신을 최악의 배우상 후보로 올렸던 골든 라즈베리 시상식에서 만회상을 받는다. <내 이름은 돌러마이트>는 에디 머피가 제작과 주연을 함께 맡아서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영화로, 루디 레이 무어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에디 머피는 자신이 직접 연기한 루디 메이 무어와 마찬가지로 코미디언, 가수, 배우로 모두 활동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고 전진하는 루디 메이 무어 캐릭터와 그를 연기한 에디 머피는 삶 자체가 이미 영화에 가깝게 느껴진다. 에디 머피는 골든 라즈베리 시상식이 뭐라고 하든 자신의 길을 꿋꿋하게 갈 게 분명한 배우이기에, 세상의 평가를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방식을 고수한 루디 메이 무어를 더 잘 연기할 수 있지 않았을까?

 

제니퍼 로페즈의 <허슬러>

스트립 클럽의 댄서 ‘데스니티’(콘스탄스 우)는 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뉴욕의 클럽으로 왔지만 여전히 자기 손에 쥐어지는 돈은 많지 않다. 데스티니는 클럽에서 가장 인기 많은 ‘라모나’(제니퍼 로페즈)와 가까워지고, 라모나로부터 폴댄스 추는 법부터 월 스트리트의 상류층 고객으로부터 어떻게 인기를 얻을 수 있을지 배운다. 두 사람은 완벽한 호흡으로 많은 돈을 벌지만 미국의 금융위기로 인해 클럽도 위기를 겪는다. 데스니티와 라모나는 떨어져 각자 살길을 찾다가 다시 재회하고, 돈을 벌 방법을 찾다가 위험한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제니퍼 로페즈를 가수로 기억하는 이도, 사업가로 기억하는 이도 있겠지만, 제니퍼 로페즈의 시작은 배우였다. <셀레나>(1997)로 평단의 호평을 받았던 제니퍼 로페즈는 어느새 흥행하는 로맨틱 코미디의 주역이자 골든 라즈베리 시상식 최악의 배우상 단골 후보가 되었다. 가수이자 사업가, 배우로서 쉴 틈 없이 달려온 제니퍼 로페즈에게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허슬러>(2019)는 특별한 작품이다. 제작자이자 주연배우로서 흥행에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제니퍼 로페즈의 연기에 대한 호평이 쏟아진 영화이기 때문이다.

<허슬러>는 스트립 클럽이 배경이고 케이퍼 무비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보고 나면 캐릭터들의 연대가 가장 크게 남는 작품이다. 특히 제니퍼 로페즈와 콘스탄스 우가 각각 연기한 데스티니와 라모나의 관계는 척박한 세상에서 의존할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글로벌 스타로서 화려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게 익숙한 제니퍼 로페즈이지만, <허슬러> 속 제니퍼 로페즈는 누군가의 삶을 지탱해주는 인자한 모습도 함께 보여준다. ‘우리가 서로 더 일찍 알고, 힘든 시절에 서로를 돌봐 주었다면 삶이 바뀌었을까’. 라모나가 남긴 대사는 제니퍼 로페즈의 필모그래피를 통틀어서도 가장 따뜻한 대사로 기억될 거다.

 

아담 샌들러의 <언컷 젬스>

‘하워드’(아담 샌들러)는 여러 곳에 빚을 진 채, 빚을 갚기보다 도박할 궁리를 하는 유대인 보석상이다. 하워드는 경매에 올려서 비싸게 팔 수 있을 만한 오팔을 사고 기뻐한다. 가게에 고객을 데려오는 역할을 하는 ‘드마니’(키스 스탠필드)는 농구선수 ‘케빈 가넷’(케빈 가넷)을 데려오고, 케빈 가넷은 오팔을 보고 반해서 경기 때까지 빌려달라고 한다. 하워드는 케빈 가넷에게 빌려준 오팔을 돌려받고, 자신에게 빚을 갚으라고 재촉하는 ‘아르노’(에릭 보고시안)를 떨쳐내기 위해 정신없는 며칠을 보낸다.

2012년 골든 라즈베리 시상식은 아담 샌들러가 주연한 <잭 앤 질>(2011)에게 모든 부문 상을 다 주었다. 흥행을 보증하지만 혹평받는 작품이 많았던 아담 샌들러지만,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펀치 드렁크 러브>(2002), 노아 바움백 감독의 <더 마이어로위츠 스토리스>(2017) 등 좋은 평가를 받은 작품들이 존재한다. 작품에 대한 호평에 더불어 아담 샌들러의 연기에 대한 좋은 평으로 가득한 영화가 있으니, 바로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언컷 젬스>(2019)다. 아담 샌들러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빛나는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의 진가가 드러난 영화다.

<언컷 젬스>는 영화 제목처럼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보석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영화는 보석을 중심으로 흘러가지만, 영화 내내 관객들이 목격하는 건 제련되지 않은 가넷처럼 정제되지 않은 욕망이다. 욕망과 욕망이 충돌하는 가운데 아담 샌들러가 연기한 하워드는 자신의 욕망이 자신과 타인을 해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담 샌들러가 자신의 욕망을 좇아 질주할 때 짓는 표정은 아이처럼 순수한데, 그 순수함이 파멸로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순간 영화는 섬뜩해진다. 코미디 영화 속에서 볼 수 있던 아담 샌들러의 해맑은 표정은 <언컷 젬스>으로 옮겨오면서 불안함을 증폭시키는 아이러니를 만들어낸다.

 

Writer

에세이 <나만 이러고 사는 건 아니겠지>, <달리다 보면> 저자. 좋아하는 건 영화, 여행, 음악, 문학, 음식. 특기는 편식. 꾸준한 편식의 결과물을 취향이라고 부르는 중. 취향을 바탕으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김승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