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출처 - 닐스 아커만 홈페이지(링크)

우리 마을이 최소 2만 2천 년 이상 인간의 거주지로 적합하지 않음을 판정받는 일은 무엇을 의미할까? 1986년에 발생한 7등급 원전 사고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붕괴 사건 이후 36년이 흘렀지만 사고 여파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사건이 발생한 지역 프리피야티는 원자력 발전소 건설 계획에 맞춰 만들어진 도시로, 허허벌판에 단단한 콘크리트 몇 개가 세워지고 건설업자 및 경영진이 살기 시작하면서 규모가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당시 프리피야티 주민들의 평균 연령은 26세로 역동적인 기운이 가득한 도시였다. 하지만 1986년 4월 27일 오후 1시 10분, 주민들의 일상은 거대한 재앙 앞에 처참히 무너지고 만다. '방사선으로 인한 비상상황이 발생하고 있다'는 방송 이후, 같은 날 오후 5시 1,225대의 버스와 250대의 트럭에 실린 주민들은 집을 떠나 알 수 없는 곳으로 가야 했다. 잠시간의 이별인 줄 알았지만, 영영 집으로 돌아올 수 없음을 의미했다.

가장 치명적인 피해를 본 건 체르노빌 원전의 인접국인 벨라루스이다. 인구 1천만 명의 작은 나라에서 방사선 피폭으로 150만 명이 사망했으며, 200만 명이 오염된 땅에서 거주하고 있다. 또한 국민들의 사망률, 암, 지적 장애, 돌연변이와 각종 질환 발병률이 급증했다는 사료가 속속히 등장하면서 영구적 재앙을 실감하게 했다. 이렇듯 체르노빌 원전 재난의 여파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으며 끔찍한 일상의 붕괴 속에 남겨진 이들은 여전히 고통받는다. '체르노빌의 목소리'는 계속 기록되어야 하기에, 원전 재난 이후 사람들의 외로움을 시각적으로 담아낸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의 작품을 소개한다.

 

체르노빌에 대한 독백 <Raúl Moreno>

스페인 사진작가 라울 모레노(Raúl Moreno)는 체르노빌 지역을 청소하는 이들에 대한 다큐멘터리에서 영감을 받아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에서 체르노빌 모노로그 시리즈를 제작한다. 체르노빌 원전과 몇 킬로미터 떨어지지 않은 지역에서 작업한 라울의 사진은 스베트라나 알렉세이비츠의 <체르노빌의 목소리>만큼이나 '체르노빌레츠'(체르노빌의 피해자)의 현실을 증언하는 작품으로 많은 이들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볼 수는 없지만 직감할 수 있는 방사성 대기가 존재하는 곳, 위험이 따르는 프로젝트였음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기록해낸 체르노빌의 독백. 라울은 해당 프로젝트를 통해 핵 재앙 이후 남겨진 인류의 고독을 시각적으로 표현했으며 지역 주민들의 영양 섭취, 포기 혹은 체념할 수밖에 없는 문제를 다루고자 했다. 그뿐만 아니라 원전 사고 이후 전 세계적으로 증가한 방사능 수치, 유럽의 일부 지역 역시 감염되고 있는 현실을 꼬집으며 잊어서는 안 될 체르노빌레츠의 모습을 담고자 했다.

'라울'은 지역 주민들의 인터뷰를 통해 그들이 자원 부족으로 인해 오염되지 않은 제품을 구매할 수 없었고, 결국 지역에서 파종된 식량을 섭취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작품에서 등장하는 기이하게 변한 물고기, 어그러진 사과, 변색된 육류 등 방사능을 품고 있는 식품이 주민들의 식탁에 그대로 올라간다는 점은 다시 한번 되짚어볼 문제이다. 방사능에 취약한 환경은 이뿐만이 아니다. 벨라루스는 1986년 이래로 아이들의 정신 병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라울은 벨라루스 남부 고멜 지역에 위치한 정신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돌보는 보육원에서 작업을 이어가기도 한다. 라울은 프로젝트를 통해 체르노빌레츠를 만나면서 슬픔과 무력감을 느꼈지만, 그들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알게 된 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을 꾸려나가는 모습에 깊은 존경심을 품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어디에나 생명은 존재한다. 어디에나 희망이 있다는 뜻이다.

 

체르노빌에서 집을 제건하는 일 <Ilir Tsouko>

알바니아 출신 일라이르 츠우코(Ilir Tsouko)는 정치적 결정/사건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과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사진작가다. 그의 작품 중 <새로운 시작: 돈바스에서 체르노빌로(Starting Over: From the Donbas to Chernobyl)> 시리즈는 더 나은 삶을 구축하고자 하는 이들에 대한 기록으로, 이주민 '알렉세이'(Alexeij)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알렉세이는 우크라이나의 돈바스에서 40㎢ 토지와 200명의 직원, 5,000마리의 돼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농업을 통해 안정적으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하지만 2014년 돈바스 지역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알렉세이의 땅은 한순간 전쟁터의 최전방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후 집을 잃은 알렉세이와 가족들은 다른 지역의 값싼 땅을 찾아 헤매게 되고 결국 방사능 위험 지역인 체르노빌에 당도하게 된다. 방사능으로 인해 대부분의 농경지에서 작물을 재배할 수 없는 환경이었지만, 알렉세이 가족은 농업이 생계 수단이었기에 가까스로 농사가 허용된 'zone 3' 토지에서 경작을 시작하고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다.

일라이르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체르노빌 지역 주민들이 겪는 심각한 문제를 포착했다. 바로 1986년 이후 체르노빌 원전 주변 지역에 견고히 정착되어버린 경제적 침체. 화제가 된 2019년 HBO 미니 시리즈 <체르노빌>이 방영된 이후 체르노빌 지역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와 관광객이 급증했지만, 지역 주민들의 삶은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일라이르가 포착한 체르노빌 이주민 알렉세이,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본 체르노빌 지역은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이주민의 일상도 녹록치 않은데 재난의 전과 후로 꿋꿋이 집을 지키고 있는 이들의 삶은 어떨까. 그는 한 인터뷰에서 "저는 이 사진으로 미래에 대한 슬픔과 걱정뿐 아니라 공존하는 희망, 기쁨, 어떤 종류의 자유를 말하고자 했습니다"라고 밝혔다. 이처럼 일라이르는 체르노빌의 그림자와 적요를 조금은 낙관적인 시선에서 그려냈다. 마냥 암울하게 세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 재난 속에서 집을 재건하듯 일상을 짓는 이들을 축복하는 것처럼.

 

재앙에서 탄생된 마을의 청년들 <Niels Ackermann>

콘크리트를 뚫고 무성하게 자란 식물, 음산한 기운이 감도는 버려진 아파트, 녹슨 관람차 등 사람이 살 수 없을 것만 같은 황무지 땅. 체르노빌 사건 이후 황폐해진 도시 프리피야티의 모습을 본 적 있을 것이다. 과연 그곳에 살던 주민들은 어디로 갔을까? 원전 붕괴 2년 후인 1988년 체르노빌에서 64㎢ 떨어진 곳에 있는 특수 목적 마을, 슬라부티치(Slavutych) 지역이 프리피야티 주민들을 수용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스위스의 사진 기자인 닐스 아커만(Niels Ackermann)은 슬라부티치 지역을 두고 '도시가 얼마나 깨끗하고 순수한지, 타임머신을 타고 구소련 시대로 건너간 기분이었다. (전광판 같은) 광고나 공공장소가 없고, 차도 거의 없었다'고 회상한다. 닐스는 3년 동안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어린 마을인 슬라부티치를 관찰하며 체르노빌 사건 이후, 구소련 이후 세대를 포착한다.

닐스의 <화이트 엔젤(White Angel)> 시리즈는 슬라부티치의 일상적인 지루함, 십 대들의 반란과 젊은 사랑이 넘실거리는 평범한 일상을 오롯이 담아냈다. 닐스가 슬라부티치에서 만난 '키릴'은 친구의무덤을 가리키며 "여기에는 방사능보다 마약과 술 때문에 사망하는 사람이 더 많다"라고 설명했다. 다른 도시와 비슷한 청년문제를 안고 있는 듯 보이지만 이들은 어딘가 특별하다. 피폭방사선량을 측정하는 청년, 파괴된 원자로를 둘러싼 석관을 증축하는 회사에 다니는 청년, 공장에서 새로운 쉼터를 짓고 지역을 청소하는 청년 등. 이처럼 원자력 발전소가 2000년도에 폐쇄됐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젊은 사람들이 체르노빌에서 일하길 희망한다. 이전 세대가 저지른 실수를 조금씩 고쳐나가는 슬라부티치의 청년들은 고요하면서도 풍요로운 미래를 건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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