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무거워질 때가 있다. 내 질량은 한결같은데 세상이 날 자꾸 바닥으로 끌어 내린다. 삶의 무게가 중력가속도를 곱한 것 이상으로 짓눌러온다. 배워온 것과 달리 돌아가는 직장. 날 눌러 앉히려고 혈안이 된 사내 정치. 누가 보지 않으면 갖다 버리고 싶은 가족들까지. 군데군데 도사린 위기가 날 가만히 내버려 두는 법이 없다. 잊을만하면 모욕을 주는 놈들이 태반이라 하루에도 몇 번씩 미간을 찌푸린다. 어쩌면 삶이라는 건 순수한 호의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과정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퇴근 후에 노곤해진 다리를 뻗고 부엌에서 새어 나오는 생선 굽는 냄새를 맡으며 행복을 느낀다. 손과 발을 대충 씻고 벌게진 눈을 비비며 위기에 봉착한 인물을 그린 소설을 편다. 그들이 수세에 몰린 꼴을 보고 가당찮은 위로를 받기도 한다. 생의 불가해함을 몸소 증명해내는 그들의 사정에 난 깊이 통감한다. 오늘은 끝 모를 추락으로 위기에 빠진 인간을 다룬 소설을 소개한다. 국적도 나이도 직업도 각기 다른 세 인물이 어떻게 위기를 극복하는지 지켜보자.

* 스포일러가 다소 있습니다.

 

<추락>(1999)

‘루리’ 교수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 혼자 사는 영문학 교수다. 실패한 결혼 이후에 줄곧 혼자다. 그는 일찌감치 양육권도 포기했다. 그의 삶에 있어서 유일한 관능이라면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창부 ‘소라야’ 뿐이다. 그에게 연인 비슷한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소라야가 갑자기 일을 그만두고 그를 떠난다. 루리의 균일한 삶에 미세한 균열이 생긴다. 그와 주고받던 농담, 농밀한 살내를 잊기 힘들다. 늘그막 한 삶, 확고하게 혼자임을 외쳤건만 삶은 직선이 아닌 곡선 주로로 휘어지는 중이다.

소라야를 잃은 후에 고독에 몸서리치던 루리는 또 다른 곤경을 마주한다. 소라야의 상실이 잽이었다면 이번엔 스트레이트 훅이다. 루리는 어느 날 집 앞에서 마주친 제자 멜라니와 잠자리를 갖게 된다. 이후 그와 몇 번의 데이트를 즐기면서 루리는 회복하기 시작한다. 학처럼 긴 다리와 따듯한 숨결이 그를 살아 숨 쉬게 한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루리는 학생들의 시선이 차가워진 것을 느끼게 된다. 누군가가 자신을 모함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고 한 동료 교수로부터 멜라니의 부모가 자신을 고발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루리는 하루아침에 교수라는 지위로 여학생을 희롱한 무뢰한으로 몰린다. 거리낄 게 없었던 루리는 사과를 거부하고 교직을 스스로 내려놓지만, 사람들은 그가 파면됐다고 수군거린다.

루리는 평생 교수 직함을 유지했지만, 선생질이 영 체질에 맞지 않았다. 그저 윤택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는 교수보다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작가에 더 가까웠다. 루리는 은퇴를 계기로 본격적인 집필에 들어간다. 그가 요즘 관심을 두는 작가는 '바이런'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바이런의 삶이다. 말년에 스캔들을 피해 이탈리아로 도망간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의 삶은 루리와 닮아있다. 아니 그는 바이런을 자신과 동일시하며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하려고 한다. 이 도시에서 일어나는 추문, 매춘, 성 유린, 인종차별, 야만의 범람에 그는 지쳐있다. 그는 변명하듯 자조적인 말을 남긴다. "지금은 청교도적인 시대야. 사생활은 공적인 일이 되지. 사람들은 성적인 만족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사생활을 엿보는 거야. 그들은 가슴을 쥐어뜯고, 뉘우치고, 가능하면 눈물까지 흘리는 것을 구경하기 원했지. 사실상 TV쇼를 원한 거지." 이런 넋두리를 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지만. 소라야도 없고 직장도 없는 케이프타운은 그에게 텅 빈 폐허에 불과하다. 루리는 미련 없이 도시를 떠나 그동안 왕래가 없던 딸의 집으로 향한다. 흑인들의 거주지인 아파르헤이트의 바깥쪽으로 도피한다.

루리의 딸은 개와 가축을 키운다. 안 본 사이에 딸은 살이 많이 쪘고, 그는 아비와 달리 배운 게 없는 하층민에 불과하다. 생각보다 처참한 환경에서 자란 딸을 보고 루리는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그의 오해와 달리 그는 행복하다. 근처에 사는 흑인 일꾼에게 일정 부분 의지하고, 수다스러운 친구들과 유쾌한 시간을 보낸다. 루리는 그게 영 못마땅하다. 그는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지만, 흑인들이 위험하다는 건 안다. 아니 그가 두려운 것은 무지의 심연이다. 지식이 없는 야만의 땅에 버려진 딸을 지금이라도 구출하고 싶다. 하지만 딸은 자신의 말을 무시하고, 어이없게도 키우는 가축과 더 깊은 교감을 느끼는 것 같다. 보다 못한 루리는 딸에게 케이프타운에서 같이 살자고 제안한다. 그는 딸이 문명인이 되길 원하지만 딸은 한심하다는 듯 아버지에게 따져 묻는다. 지금까지 뭘 하며 살다가 인제 와서 참견이냐고. 제 삶은 아버지와 다른 곳에 있다며 선을 긋는다. 이제 평온할 줄 알았던 그의 노년은 처참하게 무너지고 있다.

딸은 얼마 못 가 흑인 강도들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설상가상으로 가해자의 아이를 밴다. 가해자는 옆집에서 버젓이 살며 그를 조롱한다. 딸은 자신이 당한 강간을 삶의 통과의례라고 말한다. 이 땅에서 저들과 공존하려면 낼 수밖에 없는 '세금'이라고 말한다. 백인은 흑인들의 룰에 적응해야 한다며 체념하듯 되뇐다. 비문명의 세계, 야만의 도시, 흑인들의 거주지, 남아공의 아파르헤이트가 가진 어둠. 딸의 고통을 바라보는 루리의 애처로움. 루리는 이 모든 위기가 왜 자신에게 닥쳐왔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남아공은 긴 세월 외부 세력의 지배를 받아왔다. 그것은 곧 인종차별의 역사와 맥을 같이한다. 이는 지금까지 대표적인 인종차별 법으로 기억되는 아파르헤이트의 역사이기도 하다. 아프리칸스어로 '분리, 격리'를 뜻하는 이 법은 J. M. 쿳시의 문학세계, 좁게는 추락의 흑인과 백인의 갈등을 묘사하는 근원을 살펴보는 일이기도 하다. 아파르헤이트 철회 이후에 흑인과 백인의 어색한 동거 그리고 그로 인해 벌어지는 혼란은 작품을 복잡한 층위로 가져다 놓는다. 작가 J. M. 쿳시는 인생의 절반 이상을 남아공을 떠나 살았다. 그는 아파르헤이트 이후의 남아공 사회를 견디지 못해 도망친 유럽인인 셈이다. 그래서 작품의 루리 교수를 J. M. 쿳시에 삶과 대입시키면 흥미롭다. 그가 딸을 바라보는 시선엔 뭐가 있는가? 남겨진 세대를 근심하는 작가의 한숨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화장>(2004)

김훈의 단편 <화장>은 J. M. 쿳시의 <추락>처럼 늙수그레한 남자의 위기를 다룬 작품이다. 김훈의 소설집 <강산무진>에 담겨있다. 소설의 내용은 이렇다. 화장품 대기업 중역인 오상무는 뇌종양을 앓고 있는 아내를 간병하는 데 정성을 쏟는 헌신적인 남편이다. 독한 약물에 의존하며 삶의 종료 신호를 기다리는 아내를 간호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상무는 퇴근하고 메마른 아내의 몸을 닦아내고 기저귀를 간다. 시도 때도 없이 병원에서 호출하는 통에 일도 제대로 못 한다. 그는 아내의 몸 상태가 조금이라도 괜찮아 보이면 근처 별장으로 함께 가서 시간을 보낸다. 전립선 비대증에 시달리는 오상무는 비아그라를 먹고 병든 아내를 안기도 한다. 이제 그와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오상무는 젊은 여사원 ‘추은주’에게 홀딱 빠져있다. 아내와 잠자리를 하면서도 붉은 원피스를 입은 그를 떠올린다. 여전히 남편에게 여자이길 바라는 아내는 안간힘을 쓰지만, 그는 상상 속의 추은주에게 사정한다. 소설은 내내 근심한다. 어디까지 존엄을 지키고, 어디까지 나로서 살아갈 수 있을까? 체면을 지키는 삶은 관능적인 욕구보다 우위에 있을까? 김훈은 지속해서 죽은 아내를 화장(火葬)한 광경과 추은주가 화장(化粧)한 이미지를 겹쳐내며 비통한 삶의 민낯을 시위한다. 병든 남자는 아내의 처참한 몰골에 거부감을 느끼고, 젊은 여직원 추은주는 결코 다가설 수 없는 금기다. 그는 아무런 일탈도 할 수 없는 어른이기에 모든 욕구 앞에 무능하다. 책임감이라는 인간적인 덕목과 남자라는 남근을 가진 동물의 딜레마가 노골적인 어휘로 독자를 압박해온다. 세속적인 세상이 적으로 느껴지는 오상무의 삶이 더는 견디기 어려워 보일 때 아내가 죽어버린다. 납골당에 아내를 맡기고 오는 차 안에서 오상무는 추은주의 퇴사 소식을 듣는다. 그는 눈을 한 번 감아볼 뿐 이내 내색조차 못 하고 옅은 숨을 내쉴 뿐이다.

 

<싱글맨>(1964)

<싱글맨>은 앞선 두 작품처럼 혼자가 된 50대 후반 남자의 일과를 다룬 작품이다. 1960년대 미국의 어느 소도시, 케네디 정부는 카스트로 지배하의 쿠바를 상대로 전운에 휩싸인다. 냉전 시대는 대국들이 핵미사일을 조준한 일촉즉발의 시기였다. 하지만 이런 위기와 무관하게 조지 팔코너는 고작 연인의 죽음에 신음하고 있다. 외로움과 상실은 덧없이 그를 옥죄어 온다. 지금 이 순간 더딘 초침이 고통스러울 뿐이다. 일과는 견딤 없이 무심코 흘러가지 않고, 그는 저명한 교수이자 누군가의 동료로서 체면치레해야 할 어른이다.

그는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기가 버겁다. 몸을 움직일 이유를 찾지 못한다. 또 똑같은 하루가 시작된 참이다. 출근 준비를 하는 게 버겁다. 변기에 앉아서 바깥소리를 듣는 게 끔찍하다. 점심시간도 목구멍에 뭐 하나 넘기기가 고역이다. 독자는 조지와 함께 비탄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 죽어가는 육신은 그를 더는 일깨우지 못한다. 그는 이 위기를 떨쳐낼 수 있을까?

<싱글맨>은 작가 크리스토퍼 이셔우드가 환갑이 넘어서 쓴 작품이다. 배경이 1962년이라는 점, 주인공 조지의 나이가 58세인 점, 작가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까지 일치한다. 무엇보다 한치의 빛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감각적인 필치가 그 시절 성소수자의 심정을 직감케 한다. 소설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사랑이 사라진 노년을 어떻게 버텨낼 수 있을까? 슬퍼한다면 어디까지 슬퍼하고, 쓸쓸하다면 어디에 이르러야 할까? 또 다른 만남을 위해 나서는 게 맞을까? 질문의 연쇄에 대답은 요원하고 자꾸만 살아갈 수 있을지 의구심만 든다.

우린 이제 동성애에 관한 편견을 어느 정도는 덜어낸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조지의 시대엔 명백한 범죄였다. 이제 막 비틀스가 미국에 온 1964년 아닌가. 우드스톡과 록 페스티벌도 열리지 않았던 시기다. 그렇다면 독자는 조지의 고독을 달리 보게 된다. 늙은 게이가 할 수 있는 게 뭐란 말인가? 연인 없는 삶이 가당키나 한가? 자기를 버리고 다른 여자랑 여행을 간 애인 놈이 죽은 게 뭐 그리 대수라고. 목소리 하나 높이기 어려운 무기력은 연민을 보내기도 어렵다. 총체적 고독 앞에서 독자는 할 말을 읽고 책장을 덮을 수밖에.

 

이상으로 세 편의 소설을 통해 위기에 빠진 남자들을 마주했다. 어느 하나 명쾌한 해결책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일종의 예행연습으로서 봐줄 만했다. 언젠가 내 삶을 뒤흔들 위기가 찾아올 걸 알기에 남 일 같지 않은 마음으로 살폈다. 부지불식간에 찾아올 허무, 죽음을 상기하는 유한한 삶, 일상을 가득 채울 무력감, 책장을 덮어도 해결되지 않는 하루가 있었다. 어쩌면 삶의 위기라는 건 뻐근해진 어깻죽지처럼 늘 같이 가야 할 운명인지도 모른다.

 

메인 이미지 영화 <싱글맨> (A Single Man, 2009) 스틸

 

Writer

영화와 책, 그리고 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쓴다. 지은 책으로는 <우리 각자 1인분의 시간>, <보내지 않을 편지>가 있다. 염세주의자가 되고 싶으나 하루 세끼 먹을 때마다 행복하다.
박민진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