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리감이 느껴질 정도로 마른 체형의 모델과 ‘FREE’ 사이즈로 통일된 프리하지 않은 옷은 머지않은 미래에 사라질지도 모른다. 최근 몇 년 동안 기존의 패션계에서 그려내는 정형화된 여성의 모습(‘깡마른 모델’, ‘화려한 메이크업과 스타일링’)을 탈피, 다양성에 초점을 맞춘 브랜드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들은 어떤 성별의 모양을 규정하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구태의연한 경계를 허문다. 또한 옷이라는 소비재와 환경이 상생 가능한 미래에 대한 고민 역시 놓치지 않았다. 패션계에서 제시하는 익숙한 이미지에 권태로움을 느낀 적 있다면, 새로운 양식을 제안하는 브랜드 세 곳을 만나 보자.

 

 

PALOMA WOOL
‘브랜드’라 불리는 것을 거부하다

바르셀로나 지역을 베이스로 한 ‘팔로마울(PALOMA WOOL)’은 패션 산업에 무한한 애정을 품고 있던 ‘팔로마 라나(paloma lanna)’에 의해 시작된 ‘프로젝트’이다. 팔로마 라나가 팔로마울을 시작하기까지는 무엇보다 부모님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팔로마 라나의 부모님은 80년대 스페인에서 명성을 얻었던 패션 브랜드 ‘글로브(Globe)’를 운영했다. 놀라운 예술적 비전을 가진 어머니와 활기찬 세일즈맨 아버지에게 영향을 받아 아티스틱한 팔로마 라나만의 패션 세계를 구상하게 된다. 이후 디자이너이자 포토그래퍼였던 팔로마 라나는 팔로마울을 런칭하며 첫 번째 제품으로 자신이 촬영한 작품이 인쇄된 한정판 스웨트셔츠를 출시한다. 옷을 입는 행위에 전혀 다른 세계로 이끌 예술을 접목해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는 것. 여기서부터 팔로마 울의 철학이 시작된다.

 

“모든 사람에게 편안하고, 계절에 상관없이 입을 수 있는 옷만 생산합니다”

시작은 팔로마 라나의 사진이었지만 추후에는 다양한 아티스트와 협력해 다채로운 컬렉션을 선보인다. 이를 두고 팔로마 라나는 한 인터뷰에서 “기존의 패션 산업의 규칙과 규정에서 팔로마 울을 분리하기로 한 후에야 앞으로 어떻게 이끌어가면 될지 명확히 알게 됐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팔로마울에는 S/S와 F/W처럼 계절을 가르는 시즌이 없다. 블랙 프라이데이 같은 행사도 진행하지 않는다. 이는 팔로마울의 신념인 ‘가치는 시간이 지나도 바뀔 수 없다’와 맞닿아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통상적인 흐름을 깬 팔로마울은 대부분의 패션 회사를 담는 그릇인 ‘브랜드’라는 규정보다 ‘프로젝트’로 분류되고자 한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부분은 팔로마울 프로젝트 속 모든 사진과 동영상의 주체가 모두 여성이라는 점이다. 팔로마 라나는 팔로마울과 개인 작업을 통해 꾸준히 여성의 모습을 작품에 녹여냈는데, 자연스러운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팔로마울의 사진 속 여성들은 전문 모델이기도 하고, 팔로마 라나의 일반인 친구이기도 하다. 팔로마울은 ‘여성 커뮤니티, 단단한 협업, 공동체’라는 키워드에 집중한다. 이러한 철학은 프로젝트 전반에 반영된다. 특히 지구 공동체라는 지점에서 남다른 감수성을 보여준다. 지속 가능한 환경에 대해 탐구하며 소규모 지역 생산 방식을 추구한다. 이러한 시스템을 유지하는 이유는 과잉 생산을 차단하고 윤리적인 사이클을 위함이라고 밝혔다.

PALOMA WOOL 홈페이지

 

 

NU SWIM
전 세계 바다를 누비는 모험가를 위하여

기존의 수영복은 스포츠와 복식이 혼합된 이름과 달리 ‘수영’에 최적화돼 있는 게 아닌 착용하기 불편하기만 한 스트랩과 장식으로 가득하다. 불필요한 사탕 껍질 같은 수영복이 흔해진 요즘, 기본에 충실한 수영복 브랜드 누스윔(NU SIWM)은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 요소로 가득하다. 담백한 디자인과 다채로운 컬러, 감각적인 콘셉트 이면에 브랜드 철학이 존재한다. 누스윔의 디렉터인 지나 에스포지토(Gina Esposito)는 늘 캘리포니아 해변을 가까이 두고 생활했으며 ‘수영하기 위해 태어났다’라고 할 만큼 바다를 사랑하는 인물이다. 10년 동안 패션 기업에서 디자인하면서 수영복 시장의 빈틈을 발견했고, 기존의 수영복에 불편을 느끼던 지나는 결국 2015년 네 가지 모델로 누스윔을 런칭한다. 초창기 제품 역시 지금의 누스윔 컬렉션처럼 장식을 배제한 디자인으로 수영하기에 거슬리지 않고, 바다 수영을 마치고 나온 뒤에도 여전히 편안하게끔 설계돼 있다. 계절에 상관없이 수영을 즐기는 모험가를 위한 수영복이라니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다.

 

해양 쓰레기로 만든 수영복

지나의 바다 사랑은 수영복을 만드는 모든 공정에서도 엿볼 수 있다. 누스윔의 수영복은어망과 같은 해양 폐기물을 재가공한 섬유와 천연고무, 재활용 폴리에스터 실을 주로 사용한다. 직물 낭비를 줄이기 위해 재단하는 방식을 바꾸기도 하고, 100개 이상의 비건 수영용 직물을 소싱, 지속 가능함은 물론 오랫동안 곁을 지킬 수영복을 생산한다. 뿐만 아니라 수영복 라이너 및 더스트 백 역시 100% 퇴비화 가능한 소재를 사용해 지속 가능성에 대한 약속 꼼꼼히 지켜내고 있다. 또한 누스윔의 수영복이 쉽게 버려지지 않기 위해,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구매한 수영복을 오래 착용할 수 있도록 돕는 가이드 ‘스윔 케어’를 제공하고 있다. 이런 기업이야말로 오래도록 자연과 상생하기 위해 골몰하는 브랜드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누스윔은 모든 여성의 신체 사이즈를 아우르는 수영복을 제작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기존의 수영복 브랜드처럼 마른 모델을 담는 방식이 아닌, 다양한 사이즈를 아우르는 레퍼런스를 제공한다. 실제 누스윔의 수영복 사이즈는 6가지로 가장 흔히 사용되는 3가지 사이즈의 정형화된 틀을 벗어난 점이 인상적이다.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 인위적이지 않은 편안함을 추구하며 다양성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지점은 컬렉션 안과 밖에서 확인할 수 있다. 누스윔의 컬렉션을 통해, 반대로 기존 패션계에서 여성의 모습을 얼마나 규격화하고 있는지에 대해 실감하게 된다.

NU SWIM 홈페이지

 

 

Extreme Cashmere
동물을 착취하지 않는 캐시미어

익스트림 캐시미어(Extreme Cashmere)는 2016년 디자이너 사스키아 다익스트라(Saskia Dijkstra)와 카밀 세라(Camille Serra)가 만나 설립한 니트 브랜드이다. 25년 동안 패션 산업에서 커리어를 쌓아온 두 디자이너는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탄탄한 만듦새의 캐시미어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캐시미어’, ‘니트’ 같은 키워드가 동물을 착취하는 방향이 아닌지 우려될 텐데, 이들이 캐시미어를 수확하는 과정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가죽을 벗겨내거나 털을 뽑는 방식이 아닌, 염소가 털갈이를 시작하는 늦봄 시즌, 오직 빗질을 통해 염소의 털을 모아 섬유를 길이에 따라 분류 후, 가장 긴 섬유를 솎아내 내구성 좋은 캐시미어 소재로 탄생시킨다. 가학적인 생산 방식을 벗어난 지속 가능한 구조를 통해 완성도 높은 캐시미어 니트를 제조하는 것. 동물권을 고려하면서도 후차적으로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오래 사용할 수 있는) ‘착한 소비’가 대두되고 있는 요즘 같은 때에 꼭 필요한 브랜드 아닐까?

 

하나의 소재, 하나의 크기, 모든 사람

지속 가능한 공정이 시사하듯 익스트림 캐시미어가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움’이다. 이들은 세대와 성별, 계절을 초월해 오래도록 옷장에 남을 옷을 짓는다. 제품의 카테고리 또한 무척 담백하다. 성별과 나이를 포괄하는 제품군과 모든 제품의 사이즈는 동일하다.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는 것. 한국의 FREE 사이즈와는 달리 정말 모든 사람에게 프리한 사이즈를 제안한다. 이런 방식이 가능한 이유는 디자인 단계에서부터 다양한 사이즈를 고려한 디자인, 신축성을 지닌 소재와 여유 있는 사이즈 혹은 밴딩이 더해졌기 때문. 마른 체형이라면 오버사이즈 실루엣을 연출할 수 있고, 같은 옷을 남자가 착용해도 편안하게 착용할 수 있게끔 설계됐다. 오히려 선택지를 파격적으로 좁힌 것이 무엇도 배제하지 않겠다는 브랜드의 신념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계절을 넘어, 10년 후에도, 운이 좋다면 다음 세대에게도 전해줄 수 있는 옷이 있다면 이런 모양일 거라 추측해 본다.

Extreme Cashmere 홈페이지

 

 

이 글에선 해외 패션 브랜드만을 다루고 있지만, 한국 역시 다양성을 고려한 브랜드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특히 언더웨어, 액티브웨어 브랜드를 중심으로 조금씩 증가세를 보인다. 앞으로 한국에도 다양성을 보장하면서도 지속 가능함에 대한 고민 또한 놓지 않는 브랜드가 많이 탄생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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