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 없는 바이러스로 인해 마스크가 지구인의 필수품이 됐고, 감염자는 통신에 의한 통제를 받고 있으며, 백신은 해답이 되지 못하고 있다. 요즘 세태를 보고 있자니 디스토피아 소설 속 이야기와 다를 바 없다. 절멸의 위기를 기회로 환기하기 위한 바람일까? SF의 전성기라 불러도 좋을 만큼 평대를 가득 채운 장르 소설은 많은 이들이 미래에 대한 상상을 키우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 글에서는 미래에서 온 위로를 찾기 위해 책을 펼치는 이들에게 다정한 인사를 건네는 작품을 모았다. 재앙에 대비한 염려 혹은 경고가 아닌, 우리가 걱정하는 것보다 미래는 조금 더 따뜻할 거라 말한다. 인류는 이런 사람들로 인해 따뜻함을 영위할 거라고.

 

 

천선란 <천 개의 파랑>

자본주의의 현현이라 할 수 있는 경마장이 인간의 욕심에 맞게 개조된다면 어떤 모습일까? 작가 천선란이 그린 미래의 경마장은 비효율적인 사람을 대체할 휴머노이드와 스크린 속 평야로 질주하는 경주마로 이뤄져 있다. 기수 휴머노이드 로봇 ‘콜리’는 제작 과정에서 인간의 실수로 인해 인지와 학습 능력이 부여된 칩을 장착하게 된다. 이 덕분에 세상의 채도를 바라보며 ‘찬란하다’고 느끼며, 낙엽이 밟히는 소리를 따라 하고, 말의 갈기를 만지다 낙마할 뻔하는 둥 어딘가 ‘이상한’ 휴머노이드이다. 콜리는 파트너 ‘투데이’와 교감하기 위해 마사 관리인 ‘민주’에게 투데이가 어떨 때 즐거워하는지 학습하면서 함께 ‘호흡’을 맞춘다. 탁월한 성과를 올리는 투데이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자 성치 않은 관절에도 불구하고 시합에 나가게 되고, 콜리는 괴로워하는 투데이를 느끼며 스스로 낙마한다.

 

우리는 모두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

낙마한 콜리는 다른 기계의 부품이 될 운명이었지만, 우연히 콜리를 마주한 ‘연재’에 의해 다시 동작할 수 있게 된다. 이후 함께 한 지붕 아래에 살게 되면서 가족들의 이야기가 교차한다. 휠체어를 탄다는 이유로 세상에서 배제된 것만 같을 때마다 몰래 마방을 오가는 연재의 언니 ‘은혜’, 발전된 문명으로부터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뒤 자신의 꿈마저 떠나보낸 연재의 엄마 ‘보경’. 이들 모두 하나둘 품고 있는 흉터를 콜리에게 드러내면서 한 발짝씩 나아가기 시작한다. 소설의 큰 맥은 가족의 치유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머지않아 닥칠 기술의 발전 속 인간의 위치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인류가 이룩한 기술적 발전은 사회 구조적 발전과 함께 가는가? 연재의 말처럼 ‘문명이 계단을 없앨 수 없다면, 계단을 오르는 바퀴를 만들’ 수는 없을까? 때론 빨리 달리려는 욕심 때문에 너무 많은 걸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켄 리우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

<종이 동물원>으로 한국 독자들에게도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켄 리우의 12편의 작품이 수록된 단편집은 곳곳에 꺼지지 않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넘쳐흐른다. 아득한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도 자행되는 익숙한 불평등과 소외, 경제적 착취 등 사회 문제들을 넌지시 드러낸다. 과학의 도약이 ‘더 인간적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작가는 이야기에서 싱귤래리티, 포스트 휴머니즘 같은 소재를 통해 다룬다. 특히 이번 단편집에 수록된 싱귤래리티 3부작은 작가가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어하던 주제를 응집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싱귤래리티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뇌를 초월하는 기술로, 이야기에서는 육신을 벗어나 영원히 살아갈 수 있게끔 만드는 기술로 해석된다. <카르타고의 장미>에서는 기술의 발전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인물을, <뒤에 남은 사람들>에서는 싱귤래리티를 통해 의식 업로드를 하지 않고 육신을 가진 소수의 인간에 대해,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는 업로드된 의식으로 다차원을 오가는 인류에 관한 이야기이다. 미래의 인간은 지상에 꼿꼿이 발붙이고 살아가는 존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상상은 기이하기도, 한 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한다. 인류는 언제나 영생을 꿈꿔왔으니까.

 

인간이라는 종의 기원

이 밖에도 시신을 조각하는 플라스티네이션 작업자가 노화를 멈추는 재생 신약을 투여하다 죽음이 삶에 의미를 부여함을 깨닫는 <호>, 이름 모를 행성에 불시착한 우주인이 낙후한 문명 속에서 인간의 구조를 학습하는 <심신 오행>, 실존했던 고대 매듭 문자를 이용해 의사소통하는 소수 민족이 별안간 들이닥친 현대 문명에 착취되는 과정을 그린 <매듭 묶기> 등. 죽음에 대한 고찰과 그런데도 지지 않은 인간의 지혜와 이기에 관해 이야기한다. 작가의 머리말에서처럼, 우리는 인류 역사상 어느 세대에서도 누리지 못한 지식에 간단히 접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통제 없는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하지만 과거보다 더 혼란스럽고, 더 불안하며, 더 고립되었다고 느낀다. 반면 이야기는 현실에 항변하듯 살아있는 한 희망을 만들어갈 수 있다고 전한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고 말하는 작가의 굳건한 목소리는 우리가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품위에 대한 고민을 수면 위로 띄운다. 단편집을 덮으면서 느낀 것은 미래에 대한 걱정이라기보다, 밝은 확신에 가까웠다.

 

 

내일의 풍경, <SF2021: 판타지 오디세이>

SF 소설은 한 번도 맞닥뜨린 적 없는 일렉트로닉한 배경과 화자의 이미지를 연상케 한다. 무채색이기만 했던 상상 속 미래에 색채가 흩뿌려졌다. 미래의 모습을 낚아채 예술로 변모한 작품을 모은 전시 <SF2021: 판타지 오디세이>가 북서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열 명의 국내외 작가와 네 명의 SF 소설가로 이뤄진 이번 전시는 회화, 디지털페인팅, 사진, 설치, 텍스트 등 다양한 작품을 선보인다. 무엇보다 글과 이미지를 결합한 시도가 돋보이는데, 가상현실, 디스토피아, 포스트 휴머니즘 등을 주제로 구성돼 있다. 특히 오프라인 전시라는 영역을 넘어 관객과의 실험적인 소통을 이어가는 점 또한 눈여겨볼 요소이다. SF 소설가 정지돈과 관객이 함께 소설을 창작하는 전시 연계 프로그램 <글과 이미지의 연재/대>는 ‘자신이 미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24시간 안에 증명하지 못하면 죽는 사람의 이야기’를 주제로 하나의 소설을 공동 창작하는 프로젝트이다. 전시뿐만 아니라 SF 작가와 이야기로 교감할 수 있다니 SF를 탐독하는 이들에게는 매력적인 기회가 아닐 수 없다. 미래를 골몰하는, 새로운 사유를 원한다면 미래와의 접속을 시도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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