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분짜리 단편영화 <The Nostalgist>(2014)는 고딕풍의 운치 있는 집에서 한 남자와 그의 아들이 평온하게 체스를 두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체스 도중 문득 시력에 이상을 느낀 남자는 안경을 교체하기 위해 따라가겠다는 아들을 만류하고 홀로 문밖을 나선다. 하지만 평화로운 집 안과는 달리, 남자가 마주하는 바깥세상은 폭력적이고 암울한 디스토피아(dystopia)다. 남자가 쓰고 있었던 것은 안경이 아니라 ‘ImmerSyst Eyes & Ears’ 즉, 착용자가 원하는 가상현실을 보여주는 인공지능 시스템일 뿐이다.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는 디스토피아 세계에서 남자는 새로운 인공지능 시스템을 구할 수 있을까. 그리고 아버지를 기다리던 아들에게는 어떤 일이 생길까.

단편영화 <The Nostalgist>. CC 버튼을 누르면 영어 자막으로 감상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카네기멜론대학(CMU) 로봇공학 박사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다니엘 윌슨(Daniel H. Wilson)과 이탈리아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하는 영화감독 지아코모 치미니(Giacomo Cimini)가 온라인을 통해 교류하면서 시작한 프로젝트다. 다니엘 윌슨이 Tor.com에 게재한 단편소설 <The Nostalgist>를 원작으로 하여 영화 제작에 들어갔고, 후반 작업에 필요한 3만 파운드(약 4천 2백만 원)는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인 킥스타터(Kickstarter)를 통하여 성공적으로 모을 수 있었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탄탄한 플롯,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구축한 자금으로 구현해 낸 SF적 미장센 등 영화 자체의 완성도도 매우 훌륭하지만, 극을 이끄는 배우들의 연기 또한 이채롭다. <매트릭스> 시리즈에서 악역 메로빈지언(Merovingian) 역을 맡았던 프랑스 배우 랑베르 윌슨(Lambert Wilson, 1958~)을 아버지 역으로, 아들 역에는 재난영화 <더 임파서블(The Impossible)>(2012)에서 인상적인 아역 연기를 펼친 사무엘 조슬린(Samuel Joslin)을 캐스팅해 탄탄한 진용을 갖추었다.

영화 <매트릭스> 시리즈에서 메로빈지언 역을 맡았던 랑베르 윌슨

2014년 팜 스프링 단편영화제에 첫선을 보인 이 영화는 좋은 평가를 받으며 유수의 단편영화제에서 수상했다. 유토피아 세계와는 달리, 첨단 테크놀로지의 이면에 존재하는 어둡고 암울한 미래 사회를 그리는 디스토피아 영화의 의도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1982),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에이 아이(A.I. Artificial Intelligence)>(2001) 처럼, 인간과 사이보그 사이의 비극적 트라우마를 마지막 장면에서 아들과 아버지가 흘리는 눈물을 통해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The Nostalgist> 메이킹 영상

 

<The Nostalgist> 공식 사이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