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 저먼 시네마(New German Cinema)의 찬란한 시대가 지나고, 2000년대를 전후로 한 독일의 젊은 작가들은 이른바 ‘베를린 학파’라 불리는 새 흐름을 만들어가고 있다. 크리스티안 펫졸드는 이 그룹에서도 선배 영화감독에 속하지만, 그의 근작들이 한국을 비롯한 세계 곳곳의 관객들에 소개되기 시작하면서 모던 시네마의 꺼지지 않는 가능성을 입증한 작가로 부상했다. 2020년 <트랜짓>의 개봉에 연이어 지난해엔 그의 차기작 <운디네>가 한국 관객들을 만났다.

 

멜로드라마라는 도식

기본적으로 그의 영화들은 고전적인 형태의 멜로드라마 서사를 따른다. 이야기만 따른다면 적어도 그렇게 보인다. 물의 정령 ‘운디네(Undine)’ 설화에 기반한 영화 <운디네>는 지난 작품들보다 좀 더 본격적인 멜로드라마의 꼴을 갖추고 있는데, 연인과 이별하는 장면으로 문을 연 영화는 상실과 동시에 찾아온 새로운 만남을 일종의 ‘사고’로 그리면서, 이별을 고한 남자를 죽여야 한다는 설화의 사명을 실현하는 귀결로 나아간다.

<트랜짓>의 주인공 ‘게오르그’는 지켜야 할 사랑도, 신념도 없던 자포자기 상태의 불법체류자였다. 하지만 어느 작가의 신분을 훔치게 되면서부터(자의와 타의가 섞여 있다), 우연한 마주침이 반복되던 여성 ‘마리’와의 탈출을 꿈꾼다. 그러나 보통의 영화 속 인물들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목적같은 것은 여기 인물들과 어울리지 않는다. 정말 게오르그가 원한 것이 탈출이었는지, 사랑이었는지는 모호하게 그려지고 있다. <유령> 속 퀴어 서사도, <옐라>의 비즈니스적 사랑도, <피닉스>에 담긴 비극적 재회도 일견 멜로드라마의 서사를 취하고 있지만, 정작 펫졸드의 영화는 관객을 절절한 에로스적 감수성에 가두기를 거부하는 듯 보인다.

 

뒤를 돌아보는 사람들

인물들은 자꾸만 누군가를 찾아 헤매거나, 뒤를 돌아 무언가를 보려 한다. <운디네>의 포스터에 실린 스틸은 현재의 연인과 더없이 행복한 때에 마주친 과거의 연인을 돌아보는 운디네의 시선을 보여준다. <트랜짓>의 마리는 남편과 닮은 게오르그의 뒷모습을 마주칠 때마다 환희와 좌절의 쓴맛을 삼킨다. 게오르그는 줄곧 그 감정의 급변을 목격하는 자가 되고,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 그녀를 기다리며 뒤를 돌아보는 사람이 되며 막을 내린다. 이따금 나타난 마리의 환영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은 남편을 찾아 헤매는 굴레 속에 있다.

<유령>의 ‘프랑수아즈’도 실종된 딸을 찾아 거리를 헤맨다. 딸과 거의 흡사한 고아 ‘니나’를 찾게 되지만 니나는 프랑수아의 딸이 되지 못하고, 남편은 아이가 이미 죽었다 말하지만 프랑수아즈의 딸 찾기는 아마도 영영 계속될 것이다. 펫졸드의 영화에서 뭔가를 찾거나 뒤를 돌아보는 행위는 이미 감각하고 있는 빈자리를 재차 확인하는 아픈 수사다. 그것은 결코 채워지지 못한다는 점에서(영화 속에서 이 욕망은 한 번도 충족되지 않는다) 자기 파괴적인 욕망의 수사라고 말할 법하다.

 

교란된 시간

펫졸드는 시간성이 해체되는 순간들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기존 멜로드라마의 관성을 거부한다. 이따금 두 개의 시간(시대)를 한 스크린 속에 구현하면서, 현실적 공간에 존재할 수 없는 아나크로니즘적 시간을 생성한다. 이를테면 <트랜짓>의 무대가 최신식 자동차와 의복, 현란한 그래피티, 네온사인 전광판, CCTV 화면이 등장하는 ‘21세기의 현실’, 그리고 수용소, 파시스트, 대청소라는 용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2차 세계대전 시기의 ‘20세기 현실’이 중첩된 시공간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그런가하면 <운디네>의 어느 대목에서는 연인 ‘크리스토프’의 전화를 받은 ‘운디네’가 그를 찾아가자 이미 전날 사고로 뇌사 상태에 빠진 크리스토프의 정지한 얼굴만이 버티고 있다. 경제적 욕망으로 점철된 건조한 멜로드라마의 끝에 <옐라>의 라스트신은 초반부에 이미 제시되었던 교통사고 장면의 새로운 전개를 들이민다. 이 대목에서 관객은 영화가 지금껏 쌓아온 시간성이, 그간의 전조들(간혹 옐라가 듣게 되는 물과 바람의 불길한 환청)에 힘입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을 목격한다. 멈추지 않는 역사와 정치의 흐름 속에서, 펫졸드의 영화는 차곡차곡 쌓아온 서사를 교란된 시간으로 열어버린다. 우리는 이토록 대범한 시간성 앞에서 무엇을 감각하게 되는가?

바이러스가 창궐한 시대에, 시네마의 운명은 가장 위태로운 순간에 와 있는 듯하다. 필연적으로 공동의 작업과 다수의 관객을 도모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영화 매체는 이미 여러 차례의 위기를 맞닥뜨리고도 쉬이 저물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의 영화광들은 밋밋해진 상영 시간표를 들여다보기보다 과거의 정전을 돌아보는 데 더 많은 공을 들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여전히 시네마의 운명을 긍정할 기회는, 세태의 황폐함과 무관하게 묵묵히 자기 표현의 길을 걷는 창작자를 만나게 될 때 불현듯 주어진다.

 

<옐라>(2007)

‘옐라’는 남편을 피하고, 남편은 그런 옐라의 주변을 맹목적으로 뒤쫓는다. 그는 실패한 사업을 타개하려는 급박한 욕망을 옐라를 향해 폭력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급기야 핸들을 꺾어 호수 속으로 뛰어들고, 추락한 차를 빠져나와 눈을 뜬 옐라는 쓰러진 남편을 그대로 두고 기차에 몸을 싣는다. 낯선 곳에서 우연히 어느 남자의 비즈니스를 돕게된 옐라는 그의 경제적 야심과 결탁한 파트너이자 연인이 된다. 욕망에 다가설수록 희망은 보이지 않고, 영화는 사고의 현장을 다시금 보여주며 눈을 뜨는 옐라의 선택에 질문을 던진다.

 

<피닉스>(2014)

수용소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넬리’는 얼굴을 잃었다. 성형수술로 새 얼굴을 찾은 넬리는 사랑하는 남편 ‘조니’를 찾아가지만 그는 넬리를 알아보지 못한다. 도리어 조니는 아내를 닮은 그녀에게 아내의 걸음걸이, 말투, 글씨체를 익혀 넬리처럼 행동할 것을 요구해온다. 넬리 앞으로 상속된 유산을 되찾기 위해서다. 넬리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그가 원하는 넬리를 연기한다. 잃어버린 얼굴로, 조니의 기억 속에 박제된 과거의 자신을 재현해야 하는 딜레마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은 물론, 자신이 믿어왔던 남편의 정체도 흔들린다.

 

<트랜짓>(2018)

불법체류자 ‘게오르그’는 친구의 부탁으로 편지를 전해주러 소설가 ‘바이델’의 숙소를 찾는다. 그러나 이미 바이델은 죽고 없다. 대신 그의 유품을 전달하러 찾은 영사관에서 그를 소설가 바이델로 오인하고, 얼결에 게오르그는 바이델의 신분을 도용하기로 한다. 탈출의 기회를 잡게된 이때, 낯선 여자가 자꾸만 게오르그를 자신의 남편으로 착각해 온다. 게오르그는 함께 탈출할 계획을 세우지만 여자는 형체없는 바이델의 흔적만을 연신 뒤쫓고, 게오르그는 진실을 말할 수 없다. 20세기와 21세기의 현실이 맞물린 시공간 속 엇갈림을 반복하는 로맨스.

 

<운디네>(2020)

‘운디네’는 연인의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에 세상을 잃은 듯한 좌절감에 빠진다. 그러나 절묘하게도 새로운 인연 ‘크리스토프’와의 만남이 시작된다. 산업잠수사인 크리스토프와 역사학자인 운디네는 더없이 행복한 나날을 보내지만, 운디네는 다리에서 마주친 과거의 연인을 지나치는 순간 고개를 돌려 그를 본다. 운디네는 물의 정령 운디네 설화의 사명을 따르듯, 이별을 통보한 연인을 죽이고 크리스토프를 깨워낸다.

 

Writer

예측 불가능하고 아이러니한 세상을 닮은 영화를 사랑한다. 우연이 이끄는 대로 지금에 도착한 필자가 납득하는 유일한 진리는 '영영 모를 삶'이라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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