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로맹 가리, 로알드 달. 세 작가는 모두 상상력 넘치는 이야기를 써낸 작가이면서 동시에 파일럿으로 전장을 누빈 경력이 있다. 적막한 이른 아침 비좁은 조종석에 앉아 어둠이 깔린 산등성이를 타고 비스듬히 비행하는 그들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세상에 유일무이한 이야기를 써내야 한다는 강박을 뒤로하고 강 위를 활강하며 내려오는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그려진다. 오늘은 낮엔 비행하고 밤엔 글을 썼던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려고 한다. 20세기의 낭만과 스릴을 동시에 품었던 비행 청년들의 모험담을 들어보자.

* 소설 줄거리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자기 앞의 생>(1975)

로맹 가리는 러시아 유대인 집안 태생이다. 그는 홀어머니에 의해 길러지다 14살에 프랑스로 이주하고 나서 두각을 보인다. 파리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법학을 전공한 직후 프랑스 공군에 입대한다. 나치의 프랑스 점령 기간에 일급 조종사로 승전에 이바지한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로는 공적을 인정받아 프랑스의 훈장 중 가장 명예롭다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상한다. 이런 이력을 바탕으로 세계 각지에서 프랑스 외교관으로 근무하던 로맹 가리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다. <자기 앞의 생은>은 로맹 가리의 대표작이자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발표했던 소설로 1975년 공쿠르상을 받기도 했다. 아랍인 소년 모모와 그를 돌봐주는 유대인 여성 로자의 이야기를 다룬 <자기 앞의 생>은 어린 시절부터 홀어머니와 가난과 핍박에 시달리며 자라온 자신의 삶을 자전적으로 담은 소설이다. 러시아 태생 유대인으로 늘 프랑스 내에서도 이방인처럼 살아왔던 로맹 가리는 늘 비주류의 삶에 관심이 많았다. 여러 작품을 통해 인종과 종교가 다른 인간들이 서로 베풀고 위하며 살아가는 공동체를 그리는 데 공을 들였다. 여전히 세계는 내전이 횡횡하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서로에 총구를 겨누고 있지만, 소설에서만큼은 나아지려고 노력했다.

주인공 ‘모모’는 열 살 소년으로 1970년대 전후로 추측되는 프랑스 빈민가에 산다. 여러 민족이 엉켜있는 후진 동네엔 가난의 냄새가 폴폴 풍긴다. 친부모에게 버려진 모모는 위탁모에게 맡겨진 신세다. 그렇다고 모모가 우려처럼 어둡게만 자라는 건 아니다. 음습한 환경에서도 제 나름대로 천진하고 기발한 상상으로 독자를 무장 해제한다. 나이답지 않게 차분한 표정을 하고선 불가해한 세상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장면들엔 위트와 페이소스가 짙게 드리운다. ‘로자’는 모모뿐만이 아니라 마을의 여러 창녀의 아이를 키운다. 과거엔 로자 역시 매춘부였지만 이제는 시들어진 육체를 추스르기에도 버겁다. 뒤를 보자니 참혹한 과거가 산재하고 옆으로 눈을 돌려봤자 벌거숭이 아이들뿐이다. 그녀는 큰 덩치를 가누기도 힘든데 매일 7층 건물을 낑낑대며 올라야 한다. 오로지 통증만이 생의 감각을 일깨우고, 주렁주렁 달린 일거리들이 그녀를 괴롭힌다. 로자의 절뚝이는 삶은 모모에게 심각한 불안을 자아내는데, 모모야말로 로자가 죽으면 갈 곳 없는 아이이기 때문이다. 모모는 종종 로자 아줌마가 지하 창고로 들어가는 걸 목격한다. 그녀는 어두운 동굴에서 잠을 자는 곰처럼 그 안에서 고개를 묻고 육체의 통증과 불안을 달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다녀온 적이 있는 그녀는 제 삶의 최저점을 불러들이며 생의 밑바닥을 견디는 셈이다. 이와 비슷한 장면으로 가끔 히틀러의 사진을 보며 마음을 다잡는 그녀의 뒷모습이 그려진다. 거기엔 더 나빠질 것도 없다는 바닥의 정서가 있다.

소설은 유대인, 회교도, 성 소수자, 흑인, 이민자, 매춘부, 빈민층 등 이른바 레미제라블이 모여 만든 공동체의 삶을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다. 절망을 예감한 이들이라고 보기엔 옹기종기 모여 활기에 찬 소리를 지껄인다. 어떤 교훈도 의미도 없는 생계를 비관하기보다는 억척스럽게 끌고 가는 힘이 인상적이다. 바닥을 친 존재는 더 내려갈 곳 없다는 데 위안을 삼기 마련인 걸까? 생계 이외엔 아무것도 개의치 않은 자에겐 꿈틀거림이야말로 걸음을 뗄 수 있는 원동력일 지도 모른다.

로맹 가리는 끝내 로자의 생을 파괴한 후 모모를 홀로 남겨둔 채 끝을 맺었다. 이제 이 아이는 흘러 넘치는 여생을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모모는 전과 같이 근사한 숙녀의 모습을 한 엄마를 상상할 수 있을까? <자기 앞의 생>은 우리가 기피하는 현실의 구렁텅이를 비춤과 동시에 그 와중에도 더러운 손톱으로 흙구덩이를 기어오르는 자의 존엄을 그려내는 작품이다. 거기엔 한 치의 빛도 없지만 그렇다고 값싼 동정도 찾아볼 수 없다.

 

<야간비행>(1931)

생텍쥐페리는 스무 살 남짓 결혼과 동시에 작가로 등단했다. 그리고 얼마 못 가 어릴 적 꿈이었던 프랑스의 파일럿이 되었다. 그는 조종사와 작가라는 이질적인 두 직업을 완벽히 수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44살의 젊은 나이에 정찰기를 타고 프로방스 해변을 비행하다 영영 증발해 버린다. 그의 소설 <야간비행> 속 파비앵이 임무 중 교신이 끊겨 낯선 상공에서 자취를 감춘 것과 유사한 생애다. 생텍쥐페리는 자신의 비행 경험을 여러 작품에 녹였는데, 1931년 발표한 이 소설은 아르헨티나 야간비행 항로 개척에 참여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쓰였다. 이처럼 생텍쥐페리는 조정과 창작을 하나의 궤적처럼 끌어안고 산 사람이다.

야간비행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 건 조종사 파비앵이지만, 서문을 쓴 작가 ‘앙드레 지드’의 말처럼 눈길을 끄는 건 회사의 책임자 리비에르의 존재다. 전형적인 제국주의 독재자를 연상케 하는 이 캐릭터는 전 생애를 걸쳐 전쟁의 가치를 숭상했던 작가와 겹쳐 보이는 바가 크다. 요즘이라면 꼰대 소리나 들을 마초지만, 회사 차원에서는 돈 되는 일에 대의명분을 건 충직한 하수인이다. 조직의 이익과 인생의 가치를 동일시하고 이에 부합하지 않으면 내모는 게 그의 방식이다. 놀라운 점은 생텍쥐페리가 리비에르의 운영 방침을 비판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치 그런 외골수적인 면모가 혹독한 시대를 버텨나갈 수 있는 영웅의 길인 것처럼 숙명적인 뭔가를 포장한다. 개인주의와 삶의 자그마한 행복을 찾아 나선 요즘 독자들에겐 의심스러운 구석이 한두 개가 아니지만, 넓게 펴진 대지와 캄캄한 하늘을 날다 추락하는 탐미적인 죽음이 자아내는 이미지에 매혹된 채 책을 읽다 보면 그들이 왜 맹목적으로 비행이라는 수단에 집착했는지 상상해 볼 수 있다.

 

<맛>(1958)

얼굴이 딱 봐도 고약해 보인다. 키는 2미터가 넘고, 구부정한 어깨로 타자기를 두드리는 폼이 동네 꼬마들한테 으스스한 얘기를 꾸며내 잡아먹을 것처럼 구는 동네 아저씨 같다. 작가 '로알드 달'은 어른들을 위한 동화작가로 유명하다. 그의 독특한 세계관은 널리 인정받아 '에드거 앨런 포 상'을 두 차례, '전미 미스터리 작가상'을 세 차례나 수상했다. 무엇보다 그의 동화들을 각색한 무수한 영화들이 세계적으로 흥행을 하면서 그는 사후에 더 유명한 작가가 되었다.

오늘 소개할 로알드 달의 소설은 어른을 위한 동화집으로 불리는 <맛>이다. 그의 소설들은 당시나 지금에나 수많은 어른의 편안한 잠자리를 위해 마련한 푸짐한 상차림과 같다. 현실에 지친 샐러리맨이 넥타이를 느슨하고 풀고 잠시 의자를 젖히고 편안하게 취할 수 있는 소설들이다. 로알드 달은 생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내 등장인물들을 흥미롭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이 가진 좋은 성격이나 나쁜 성격을 과장해서 보여주는 것이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심술궂거나 못됐거나 혹은 잔인하다면, 그를 매우 심술궂고, 아주 못되고, 아주 잔인하게 그려야 한다네. 그래야 아주 재미있고,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줄 수 있다네." 그의 말처럼 로알드 달은 단순하지만, 극단적인 상황을 만드는 것을 좋아했고, 애정을 듬뿍 준 캐릭터들이 그 속에서 어떤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는지 세밀하게 묘사했다. 표제작 <맛>도 마찬가지로 주인공은 포도주 맛을 감별하는 내기를 하는데, 황당하게 이 어려운 감별에 무려 결혼을 걸고 내기에 임한다. 판돈이 커질 대로 커져 패배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때, 독자는 이 내기가 미리 포도주의 정보를 훔쳐낸 사기꾼의 범행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로알드 달은 이 단순한 이야기 속에도 속도가 붙은 대화들에 서스펜스를 주고, 예측하기 어려운 반전까지 심어놓았다. 무엇보다 능청스러운 풍자를 통해 지식인의 허영을 비꼬아 댄다.

로알드 달은 2차 세계대전에 공군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한 이력이 있다. 거친 전투에도 여러 번 참전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작가가 되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는 리비아 사막에 불시착했다가 가까스로 구조됐다고 한다. 이후 몇 달간 실명 상태로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했다니 부상 정도를 짐작게 한다. 하지만 사고를 계기로 지상 근무로 임무를 전환한 로알드 달은 본격적으로 글을 쓸 수 있었다. 큰 사고가 전화위복이 되어 그의 극적인 삶을 모든 독자가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실제 뛰어난 유머 감각의 소유자로 알려졌으며, 이런 입담으로 꺽다리에 못생긴 외모에도 오스카 여우주연상에 빛나는 퍼트리샤 닐을 꼬셔 결혼했다. 또한 그의 유머는 미국에서도 잘 먹혔는지 근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과 파티에서 만나 절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의 작품집 <맛>을 읽다 보면 그가 샴페인 잔을 들고 고개를 뒤로 젖힌 채로 코가 빨개져서는 온갖 괴담을 늘어놓는 광경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메인 이미지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1996) 스틸

 

Writer

영화와 책, 그리고 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쓴다. 지은 책으로는 <우리 각자 1인분의 시간>, <보내지 않을 편지>가 있다. 염세주의자가 되고 싶으나 하루 세끼 먹을 때마다 행복하다.
박민진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