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가 탄생할 무렵의 뉴올리언스(New Orleans)에는 크레올(Creole, 프랑스인과 흑인 혼혈)과 흑인의 혼합 밴드가 있었다. 이들은 유럽과 아프리카의 음악적 요소를 결합했고, 이는 새로운 장르의 음악이 탄생하는 배경이 되었다. 굳이 컨버전스(Convergence), 퓨전(Fusion), 크로스오버(Crossover) 같은 용어로 설명하지 않더라도, 새로운 음악의 탄생에 다양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재즈가 한 단계 혁신을 거치던 시기도 마찬가지다. 이때도 어김없이 흑인과 백인으로 구성된 혼합 밴드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그 시대를 지배하는 사회적인 편견을 거부하는 파이오니어(pioneer)들이 있었다.

스윙 시대 인기 밴드 리더인 베니 굿맨(중간)과 스윙 피아니스트 테디 윌슨(좌)

스윙 시대 최고의 스타였던 클라리넷 주자 베니 굿맨(Benny Goodman)은, 1935년 백인 드러머 진 크루파(Gene Krupa)에 이어 흑인 피아니스트 테디 윌슨(Teddy Wilson)을 영입함으로써 유명한 베니 굿맨 트리오(BGT)를 이룬다. 곧이어 흑인 비브라폰 연주자 라이오넬 햄프턴(Lionel Hampton)을 영입해 2대2 흑백 조화를 이룬 쿼텟을 만들었고, 이는 역사상 최초의 흑백 혼합 밴드로 기록되었다. 메이저리그에서 역사상 첫 흑인 야구선수를 기용한 해보다 10년 이상 빨랐고, 남부에서는 법으로 혼합 밴드 자체를 금지하던 때였다. 물론 베니 굿맨이 ‘스윙의 왕(King of Swing)’이라 불릴 만큼 인기와 영향력이 대단했고, 인종 간 통합을 관철하려는 강한 의지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할리우드 호텔에서 연주하는 베니 굿맨 쿼텟(1937)

이와는 정반대 상황이 1958년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의 유명한 섹스텟(Sextet)에서 있었다. 당시 뉴욕의 비밥(Bebop) 연주자들은 서부 지역 백인들이 주도하는 웨스트 코스트 재즈(West Coast Jazz)의 인기에 대해 은근히 경시와 질투를 느끼던 때였다. 이때 동부의 재즈 리더로 올라선 데이비스가 쟁쟁한 비밥 피아니스트들을 제쳐 두고 별로 알려지지 않은 백인 피아니스트를 고용한다.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던 동부의 터프한 재즈맨 이미지와는 달리, 아이비리그 모범생 이미지의 빌 에반스(Bill Evans)였다. 에반스는 데이비스와 깊은 음악적 대화를 나누며 쿨 재즈(Cool Jazz)의 탄생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나, 신입을 들볶는 데이비스의 짓궂은 성격과 흑인 청중의 야유로 고민하다 9개월 만에 팀을 떠나고 만다.

왼쪽부터 존 콜트레인, 캐논볼 애덜레이, 마일스 데이비스, 빌 에반스

후일 한 인터뷰에서 왜 마일스 데이비스를 떠났느냐는 질문에 에반스는 “그와 있을 때면 매우 불편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시점엔가 떠날 때가 되었다고 느꼈다. 마일스에게 얘기했더니 그가 동의했다. 우리는 지금도 좋은 친구 관계로 지내고 있다.” 또 다른 인터뷰에서는 마일스 데이비스가 아닌 흑인 팬들의 문제라고도 말하기도 했다. 흑인 클럽에서 연주할 때면 청중들이 “백인이 여기서 뭐 하냐?”라고 야유하곤 했다는 것이다. 데이비스도 ‘쿨’의 탄생에 에반스의 공헌이 지대했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1989년의 인터뷰에서 역사적 명반 <Kind of Blue>(1959) 탄생에 관한 질문을 받은 데이비스는 “그 앨범은 애초에 빌 에반스의 피아노에 맞출 계획이었어요(I Planned that album around the piano playing Bill Evans)”라고 답하며 빌 에반스의 능력을 인정한 바 있다.

<Kind of Blue>에 수록한 다섯 곡 중 ‘Freddie Freeloader’는 빌 에반스 대신 윈튼 켈리(Wynton Kelly)가 피아노를 쳤다. 백인은 블루스 연주에 약하다는 의견이 작용한 것이다 

비슷한 시기 서부 지역의 재즈는 데이브 브루벡(Dave Brubeck), 스탄 게츠(Stan Getz), 제리 멀리건(Gerry Mulligan) 같은 백인 아티스트들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중 데이브 브루백은 인종 분리 정책에 절대 타협하지 않은 인물로 유명하다. 그는 재즈 아티스트 중 루이 암스트롱에 이어 두 번째로 <타임(Time)> 지 표지 인물이 되었으나, 스스로 백인이기 때문에 불합리한 호의를 받은 것이라 생각했다. 이후 그는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을 만나 “당신이 나왔어야 했어요(It should have been you)”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네 명의 백인으로 구성된 초기 데이브 브루벡 쿼텟. 캠퍼스 순회공연으로 대학생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자랑했다

그는 여러 명의 백인 베이시스트를 계속 교체하다가, 1958년 진 라이트(Gene Wright)라는 흑인 베이시스트를 고용하면서 명반 <Time Out>(1959)의 토대가 되는 쿼텟 진용을 갖춘다. 그리고는 당시를 지배하던 흑백 분리 정책에 맞서 개인적인 투쟁을 시작한다. 1960년 남부 지역 대학 순회공연 때는, 백인 베이시스트로 교체하라는 대학 측의 요구를 거절해 25건의 연주회 중 23건를 취소했다. 이 일로 그는 4만 달러(당시 연간 가계소득 평균 5천 달러)의 손해를 감수하여야 했다.

1962년의 데이브 브루벡 쿼텟. 맨 우측이 베이시스트 진 라이트다

한 대학에서는 공연을 원하는 학생들의 요구가 폭동 일보 직전까지 가자, 진 라이트가 무대 뒤편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연주하는 조건으로 당국이 공연을 허용했다. 그러나 브루벡은 무대에 오르기 전 라이트에게 베이스 솔로를 연주할 시점에 밴드 전면으로 나오라고 주문하였고, 결과적으로 이날 공연은 대성황을 이루었다. 방송 출연 때도 마찬가지였다. 베이시스트를 백인으로 교체하라는 PD의 최후통첩을 거절하였고, 베이시스트에게 카메라를 비추지 않으려는 낌새를 보이자 아예 출연을 포기하였다. “재즈는 자유를 의미한다(Jazz stands for freedom)”는 그의 유명한 어록은 이 시기에 나온 것이다.

<Take Five>에 수록한 터키 리듬의 ‘Blue Rondo à la Turk’를 연주하는 데이브 브루벡 쿼텟 

베니 굿맨의 <1938 Carnegie Hall Jazz Concert>, 마일스 데이비스의 <Kind of Blue>, 데이브 브루벡의 <Time Out> 앨범은 하나같이 재즈 역사에 있어 명반 중의 명반으로 손꼽힌다. 음악적 완성도나 혁신성에 있어서도 뛰어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당시 사회의 인종 편견을 극복하고 음악적 통합을 이루려 했던 강한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베니 굿맨이 한 측근으로부터 “흑인 피아니스트를 왜 고용했냐?”는 흑인을 지칭하는 경멸적 단어를 포함한 질문을 받고, “다시 한번 그 단어를 쓰면 턱을 부숴 버리겠다”고 말하며 분개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