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은 <기생충>(2019)이 주요 부문을 휩쓸며 화제가 되었다. 역사를 쓴 <기생충>만큼 인상적인 수상 결과가 있으니 바로 <주디>(2019)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르네 젤위거다. 르네 젤위거는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과 여우조연상을 모두 받은 몇 안 되는 배우가 되었다. 메릴 스트립, 케이트 블란쳇, 잉그리드 버그만, 제시카 랭, 매기 스미스 등이 포함된 기록에 르네 젤위거도 자신의 이름을 나란히 하게 되었다.

여우주연상과 여우조연상을 모두 받았다는 건, 다르게 말해서 주연, 조연에 상관없이 좋은 연기를 보여줬다는 뜻이기도 하다.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과 조연상을 모두 받은 배우들의 대표적인 수상작을 살펴보자.

 

잉그리드 버그만의 <가스등>

잉그리드 버그만은 스웨덴 배우임에도 불구하고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세 차례나 수상하는 기록을 세운다. <가스등>(1944)과 <아나스타샤>(1956)로 여우주연상을 받고,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1974)으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외에도 TV드라마로 에미상, 연극으로 토니상을 받는 등 매체를 가리지 않고 좋은 연기를 보여줬다. <가스등>은 잉그리드 버그만에게 처음으로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트로피를 안긴 작품이다.

‘폴라’(잉그리드 버그만)는 유명 오페라 가수인 이모가 런던의 저택에서 살해당한 후 충격에 빠진다. 범인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폴라는 끔찍한 기억을 남긴 영국 런던을 떠나 이탈리아에서 음악 공부를 시작한다. 이탈리아에서 폴라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그레고리’(샤를로 보와이에)와 사랑에 빠져 음악 대신 결혼을 택한다. 폴라는 그레고리의 요청으로 런던의 저택에서 머물게 된다. 그레고리는 폴라에게 건망증과 착각이 점점 심해진다고 말하고, 폴라는 처음에는 이를 부정하지만 점점 그레고리의 말을 믿게 된다.

<가스등> 트레일러

<가스등>은 패트릭 해밀턴의 연극을 원작으로 한 영화로, ‘가스라이팅’이라는 말의 유래가 된 작품이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정신적으로 몰아세워서 피해자로 하여금 자신에 대한 제대로 된 판단을 못하게 만들고, 결국 가해자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과정이 <가스등>에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잉그리드 버그만은 가스라이팅을 당하면서 점점 자신에 대해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게 되는 폴라를 연기한다. 잉그리드 버그만의 연기는 가스라이팅의 현장을 목격하는 관객에게 정신적인 혼란을 경험하게 만든다.

 

메릴 스트립의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의 수상 기록을 말하면서 반드시 말해야 할 배우가 메릴 스트립이다. 많은 이들이 존경을 표하는 메릴 스트립은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 후보로 21번 지명되었고, 수상도 3번 하였다. 미국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도 31회 지명되어 8번 수상했는데 거의 매해 작품에 출연하는 메릴 스트립이기에 기록은 앞으로도 계속 갱신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소피의 선택>(1982)과 <철의 여인>(2011)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1979)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는 메릴 스트립의 초기 출연작 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회사 업무가 늘 우선순위인 ‘테드’(더스틴 호프만)는 회사에서 큰 프로젝트를 따내고 기뻐하며 집에 오는데, 아내 ‘조안나’(메릴 스트립)는 자신의 길을 찾아 집을 나가겠다고 선언한다. 조안나가 집을 나간 뒤 테드는 처음으로 아들 ‘빌리’(저스틴 헨리)의 등교 준비를 하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못하고 서툴다. 테드는 일과 육아를 병행하며 여러모로 노력하지만, 빌리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호소한다. 테드가 빌리와 시간을 보내는 것에 점점 익숙해질 때쯤, 조안나는 양육권을 갖기 위해 테드에게 소송을 건다.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트레일러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는 1979년에 개봉한 작품으로, 테드에 좀 더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조안나를 통해 사회적 편견에 경고를 날리고 있는 영화다. 양육이나 직장생활에 있어서 적합한 성별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회에서, 육아를 전담하느라 자신을 잃어간다고 느끼다가 결국 집을 나가는 조안나에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개봉 당시에도 양육은 엄마의 몫이라는 편견이 여전했지만, 메릴 스트립이 복잡한 감정의 인물을 연기해내며 관객들이 조안나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다.

 

르네 젤위거의 <콜드 마운틴>

르네 젤위거는 가장 최근에 열린 2020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주디>(2019)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르네 젤위거의 활약이 돋보였던 시기는 2000년대 초반이다. <너스 베티>(2000)로 미국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받고, <브리짓 존스의 일기>(2001), <시카고>(2002)로 2년 연속으로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 후보에 이름을 올리고, 다음 해에 결국 <콜드 마운틴>(2003)으로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받는다. <콜드 마운틴>은 찰스 프레이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르네 젤위거는 실제로 원작 소설의 팬이었는데 영화에 캐스팅되었다.

콜드 마운틴에 사는 청년 ‘인만’(주드 로)은 ‘아이다’(니콜 키드먼)와 몇 번 만나지 않았지만 사랑에 빠졌음을 알게 된다. 둘은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되었지만, 인만은 남북전쟁에 참전한다. 아이다는 아버지를 잃고 힘들어하며 인만에게 돌아와달라는 편지를 보내고, 인만은 아이다를 위해 탈영을 결심한다. 혼자 어떻게 삶을 꾸릴지 걱정인 아이다에게 ‘루비’(르네 젤위거)가 찾아오고, 아이다는 루비와 함께 농장을 꾸리면서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콜드 마운틴> 트레일러

<콜드 마운틴>에서 르네 젤위거가 연기한 루비는 영화에서 가장 개성 강한 캐릭터다. 아이다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걱정이던 차에, 루비에게 농사부터 가축을 돌보는 일 등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배운다. 루비는 아이다에게 자신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고백하고, 루비와 아이다는 서로에게 새로운 가족이 되어준다. 남북전쟁 속 사랑이라는 <콜드 마운틴>의 거대한 테마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법을 알려주는 루비의 모습은 소박해 보이지만 차가운 영화의 분위기에 온기를 불어넣는다.

 

케이트 블란쳇의 <블루 재스민>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가장 많은 수상 기록을 가진 배우는 여우주연상을 4번 받은 캐서린 헵번이다. 케이트 블란쳇은 <에비에이터>(2004)에서 전설적인 배우 캐서린 헵번을 연기하며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케이트 블란쳇은 앞에서 언급한 배우들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해왔는데, 특히 <아임 낫 데어>(2007)에서는 밥 딜런을 연기하며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기도 했다. <블루 재스민>(2013)은 케이트 블란쳇에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을 안긴 작품으로,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연상시키는 영화다.

‘재스민’(케이트 블란쳇)은 남편 ‘할’(알렉 볼드윈)과 뉴욕에서 호화로운 삶을 누리다가, 남편과 재산을 모두 잃고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여동생 ‘진저’(샐리 호킨스)의 집에 간다. 재스민의 눈에는 진저의 삶이 형편없어 보이고, 자신에게 당장 남은 돈은 없지만 무작정 아무 일이나 시작하고 싶지는 않다. 재스민은 신경쇠약으로 약을 먹고, 화려했던 과거를 회상하며 혼잣말이 늘어간다. 재스민은 온라인으로 인테리어를 배울 생각에 컴퓨터 학원에 다니고, 그곳에서 만난 지인에게 괜찮은 사람을 만날 기회를 묻다가 파티에 가게 된다.

재스민은 결혼을 계기로 상류층의 삶을 살게 되고, 사람들의 계급을 나누고 판단하는 데 익숙해진다. 모든 것을 잃고 난 뒤에도 재스민의 기준은 바뀌지 않는다. 자신이 나눈 계급의 기준으로 봐도 현재의 자신은 형편없지만,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어서 과거를 상상하며 혼잣말을 한다. 재스민의 화려했던 과거와 모든 것을 잃었지만 자존심을 버리지 못한 현재를 교차하는 <블루 재스민>의 편집 방식은 비루한 현재를 더욱 부각시킨다.

<블루 재스민> 트레일러

케이트 블란쳇은 과거에 취한 채 현재를 받아들일 수 없는 재스민의 심정을 관객도 그대로 느낄 만큼 현실적으로 연기한다. 과거의 영광을 붙들고 살거나 속물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건 재스민뿐만 아니라 현실 속 사람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재스민에게 연민을 느끼는 이도 있을 거고, 오만하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 거다. 영화 속 캐릭터라고 할지라도 단순하게 해석할 수 없는 건, 인간이 너무나 많은 층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존재라는 걸 관객도 알기 때문이다. 시나리오 속 복잡한 캐릭터를 표현해야 하기에 연기가 힘든 일이고, 배우라는 직업이 어려운 동시에 매력적인 이유 또한 그 때문이 아닐까.

 

Writer

에세이 <나만 이러고 사는 건 아니겠지>, <달리다 보면> 저자. 좋아하는 건 영화, 여행, 음악, 문학, 음식. 특기는 편식. 꾸준한 편식의 결과물을 취향이라고 부르는 중. 취향을 바탕으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김승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