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실체를 잡으려는 책을 무수히 읽었다. 어떤 건 좋았고 간혹 자국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연애소설은 대체로 고만고만한 탓에 즐겨 읽지는 않는다. 가끔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후 나온 연인의 밀담이란 게 어쩌면 다 동어반복에 불과한 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늘 비슷한 문제로 골머리를 앓다가 얼토당토않은 일로 헤어지는 식이다. 우리의 연애는 모두 제각각인데 소설 속 연애담은 지나치게 획일적인 탓이다. 그래서 오늘은 기존의 연애소설과 한끝 다른 스타일로 독자들에게 사랑받은 세 작품을 소개한다.

 

<나는 너를 왜 사랑하는가>(1993)

주인공 '나'는 런던 행 항공기 기내 옆자리에서 ‘클로이’를 만난다.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영화 <비포 선라이즈> 식 만남이다. 그들의 연애는 낭만적인 만남으로 시작해서 행복의 로열로드를 타고 일사천리로 나아간다. 하지만 하늘을 붕붕 나는 듯했던 관계도 어느새 권태기에 접어든다. <나는 너를 왜 사랑하는가>의 화자는 까칠하고 오만하며 이해할 수 없는 변덕을 반복하는 우둔한 남자다. 당신이 이 어리석은 남자에게 이입했다면 그건 우연이 아니다. 그가 하는 짓 대부분이 우리가 연애하며 반복적으로 저지르는 실수를 총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주인공에게 '나'라는 호칭 외에 이름을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아주 보통의 연애를 그려내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낸다.

이 작품의 특징이라면 이야기에 등장하는 연인들의 사정에 날카로운 주석을 덧붙이는 구조에 있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줄거리만 읽으면 통속극이지만, 조금만 더 자세히 보면 우리가 그 통속에 말려들고야 마는 이유를 분석해낸 심리 철학서로 읽히기도 한다. 스토리 상으로는 한 여성을 만나 성장을 하고 새로운 만남에까지 이르는 영화 <500일의 썸머>와 유사하며, 연애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분석해내는 작법은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떠올리게 한다. 이 책을 집필할 당시 스물아홉 살이었던 철학도 알랭 드 보통은 세상 남녀가 가진 통념에 각을 세우며 이 소설을 쓰기로 작정한 듯 보인다. 인류가 쌓아 올린 지성을 발판 삼아 연애가 지극히 구태의연하게 돌아가는 이유를 제시한다. 연애를 시작한 사람만큼 통념에 휘둘리기 쉬운 환경이 없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사랑이라는 현상을 해독해낸다. 그 결과 소설에는 플라톤, 니체, 마르크스, 융, 벤담 등 일류 학자들의 이론이 적재적소에 등장한다. 그때 왜 우리는 마음에 없는 말을 했을까? 헤어지고 싶지 않은데 헤어지자 말을 못 하고, 붙잡고 싶은데 왜 붙잡지 못했을까? 사실 이런 행동 하나하나엔 이유가 딱히 없을 수도 있지만, 알랭 드 보통의 책엔 다 이유가 있다. 사랑할 때 느끼는 감정의 씨실과 날실을 하나씩 꼬아가며 우리의 연애를 근사한 기성품으로 만들어낸다.

<왜 나는 너를 왜 사랑하는가>엔 노스탤지어란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한 남자가 헤어진 연인을 떠올리며 중얼거리는 미련의 감정이다. 지나간 일에 연연하는 지질한 주인공은 끝없이 자신의 과오를 찾아내고 복기한다. 만약 내가 그때 그렇게 행동했더라면 헤어짐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난 이런 회한의 정서가 알랭 드 보통을 연애소설과 순수문학의 점이지대에 안착시킨다고 생각한다. 사랑의 스펙터클에 주목하기보다 이별 후에 오는 감정을 세밀하게 그렸다는 점에서 이 책은 여타 다른 연애소설과 선을 긋는다.

 

<모순>(1998)

진진은 나영규의 안정적이고 균일한 삶에 거부감을 가진다. 그저 남들이 다 훌륭하다고 칭송하는 그럴싸한 길을 따르는 나영규가 못 미덥다. 그건 진진에게 배움 없는 삶이자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을 일축하는 태도에 가깝다. "마치 평생 똑같은 식단으로 밥을 먹어야 하는 식이요법 환자의 불행과 같은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김정우의 지독한 가난도 싫다. 진진은 엄마의 억척스러운 삶을 증오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25살이라 남자들이 들러붙지만, 과연 엄마처럼 늙는다면 누군가 자신을 사랑해줄지 의문스럽다. 가족을 버리고 새 삶을 찾아 떠난 진진의 아버지처럼 가난한 놈과 결혼했다가 외톨이가 되는 건 아닐까? 엄마처럼 평생 돈에 절절매며 살면 어쩌지. 소설은 점차 선택의 갈림길에 선 진진을 부모 세대의 삶에 투영하며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누구와 남은 삶을 꾸려갈 것인가?

<모순>이 생을 도식화하는 방식은 자칫 단순해 보여 시시할 수 있다. 양면적인 선택으로 인생을 재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남자를 선택하는 것이 진진의 인생을 바꾼다는 식의 설정도 고루하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의 삶이 그렇게 복잡해 보이는 까닭은 질문을 던지지 못해서일지도 모른다. 제대로 된 질문이 없으니 적절한 선택지도 마주할 수 없다. 진진은 주도적으로 삶을 부여잡는 능동적인 캐릭터다. 그리고 결국 한 남자를 택함으로써 자신이 던진 질문에 답을 한다. 이 소설은 연애야말로 이성과는 가장 먼발치에서 노니는 불가지론에 가깝다는 것을 보여주고 끝을 맺는 셈이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전화하지 않는 남자 사랑에 빠진 여자>(2019)

<전화하지 않는 남자 사랑에 빠진 여자>의 주인공 ‘사라’는 겉보기엔 도시의 성공한 전문직 여성으로 보이지만, 속내를 들춰보면 이혼을 앞두고 외로움에 시달리는 마흔 목전의 여성이다. 날씨가 지독하리만치 화창한 6월 어느 날, 사라는 우연히 에디라는 남자를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우리의 연애가 다 비스름한 것처럼 주인공 사라와 에디도 우연히 마주쳐놓곤 서로가 운명이라고 확신한다. 이동진 작가는 한 사랑 영화에 대해 “사랑은 꼭 그 사람일 필요가 없는 우연을 반드시 그 사람이어야만 하는 운명으로 바꾸는 것”이라는 평을 남겼다. 상대가 이제껏 살아온 삶이 순전히 내게 수렴하기 위한 공식으로 느껴지는 순간이다. 그렇게 아름답기만 두 사람의 관계는 예측대로 위기에 봉착한다. 에디가 느닷없이 연락을 끊고 잠적해버린 것이다. 소설은 두 사람의 꼬여버린 운명을 비극의 재료로 씀으로써 흔한 사랑 이야기를 극적으로 빚어낸다. 에디의 부재를 견디다 못한 사라는 그를 찾아 나서고, 그 과정에서 요즘 연애 소설답게 SNS부터 뒤지기 시작한다. 최근 게시글과 팔로워들을 토대로 추적해나가는 과정이 스릴러 영화처럼 흥미진진하다.

소설가에게 있어 상대의 안위와 근황을 살피는 데 전화나 편지가 아니라, 즉시 소통 가능한 휴대전화기라는 건 어쩌면 비극일 것이다. 첨단 통신 기기는 기다림이 주는 애달픔과 발품을 파는 간절함을 앗아갔다. 하지만 작가 로지 월시는 이런 페널티를 오히려 서스펜스의 장으로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페이스북, 메신저를 소설 속에 끌어들여 문자와 이미지 형태의 날렵한 대화 장면을 만든다. 상대의 온라인 프로필로 근황을 살피며 메시지를 ‘읽씹’한 상대에게 분노한다거나, 쓰다 말기를 반복해서 속내를 예측할 수 없이 몰아가는 연출은 리듬감이 뛰어나다. 마치 요즘 연애 풍속도를 소개하는 용례집처럼 보일 정도다. 최근 로맨스 영화나 웹툰이 이모티콘과 세로로 긴 화면으로 연출하는 방식을 소설에 차용한 것처럼 느껴진다.

<전화하지 않는 남자 사랑에 빠진 여자>는 상황마다 실감 나는 대사가 일품이다. 어색한 미팅에서 위트 하나로 너스레를 떠는 김 대리처럼 달변이다. 저자는 마치 탁구를 하는 것과 같은 날렵한 구어체를 구사한다. 무엇보다 사라의 친구들과 나눈 메신저 대화들엔 생생한 유머가 가득하다. 그들만 있다면 그깟 운명의 연인 따위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웃기다. 내가 추측하기론 저자 '로지 월시'는 실제로도 좋은 대화 상대일 것이다. 그녀가 쓴 실감 나는 대화들 덕분에 소설의 분위기가 한껏 다정하고 따듯해 보인다.

실연은 사람을 도시 변두리로 몰아낸다. 사라는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어느 공원의 가장자리에서 비척거린다. 무작정 연락이 끊긴 실연을 당해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마음이 쓰였던 부분도 사라가 묵묵부답인 그를 견디는 순간이다. '1'이 지워지길 기다리고, '1'이 지워지면 더 절박해지는 우리 모습과 다르지 않다. 서툰 감정과 섣부른 분노를 썼다 지웠다 반복하고, 검색창에 '헤어진 연인에게서 연락 오는 방법'을 넣고야 만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연이 모두 밝혀지며 오해가 풀리자 운명에 다시 불이 붙는다. 순간 나는 이 소설이 연애소설이라는 것을 실감하고, 연애소설이야말로 유일하게 우연을 수용하는 문학이라는 걸 깨닫는다. 사랑마저 미화할 수 없다면 당신의 낭만을 어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우리에겐 모두 그라는 오직 한 사람의 존재만으로 완전했던 순간이 있었다. 온 세포가 봉기한 채 절절맸던 시공간을 '필연'이라는 말로는 설명해낼 수 없을 것이다.

 

Writer

영화와 책, 그리고 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쓴다. 지은 책으로는 <우리 각자 1인분의 시간>, <보내지 않을 편지>가 있다. 염세주의자가 되고 싶으나 하루 세끼 먹을 때마다 행복하다.
박민진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