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되면 각종 매체에서 베스트 영화 목록을 발표한다. 코로나19로 영화 시장의 침체가 크게 느껴진 2020년, 여러 매체에서 최상위로 뽑은 작품이 있으니 바로 <퍼스트 카우>(2019)다. <퍼스트 카우>의 감독은 켈리 라이카트로, 미국 인디 영화계에서도 가장 뚜렷한 스타일을 가진 감독 중 한 명이다.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는 로드 무비로 분류되기도 할 만큼, 전진의 이미지가 강하다. 다만 성공을 위해 전진하라고 말하는 세상과 다르게, 켈리 라이카트는 열심히 걸어도 세상으로부터 이탈되고 도태되는 이들의 모습에 집중한다. 세상이 주목하지 않는 이들의 삶을 아주 천천히 응시한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미국의 단면을 보여주는 켈리 라이카트의 작품들을 살펴보자.

감독 켈리 라이카트(오른쪽)와 배우 크리스틴 스튜어트(왼쪽), 이미지 출처 – ‘imdb

 

<웬디와 루시>

‘웬디’(미셸 윌리엄스)는 ‘루시’라는 이름의 개와 함께 일자리를 찾아 알래스카로 가는 중이다. 차에서 잠을 자고, 공중화장실에서 씻으며 생활 중인 웬디는 가진 돈도 얼마 없고, 알래스카까지는 갈 길이 멀다. 오리건 주의 작은 마을에 잠시 머무는 웬디는 식료품점에서 강아지 사료를 훔치다가 걸려서 경찰서에 다녀오고, 그 사이에 루시가 사라진다. 게다가 유일한 자산인 차의 시동이 멈추며 고장 난다. 웬디는 수리비가 걱정되지만 정비소에 차를 맡기고, 루시를 찾아 나선다.

켈리 라이카트를 말하려면 반드시 말해야 할 존재가 있는데, 바로 영화 속에 등장하는 개 루시다. <올드 조이>(2006), <웬디와 루시>(2008), 두 편의 작품에 모두 루시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실제로 켈리 라이카트의 반려견이다. <어떤 여자들>(2016)은 영화가 끝난 뒤에 ‘FOR LUCY’라는 말로 세상을 떠난 루시를 추모한다.

영화 <웬디와 루시>(2008) 예고편

식료품점에서 강아지 사료를 훔친 웬디에게 점원은 ‘모든 규칙은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점원에게는 퇴근 후 자신을 데리러 차를 끌고 올 어머니가 있지만, 웬디에게는 차도, 집도, 핸드폰도, 연락할 사람도 없다. 웬디가 살기 위해 노력할 때는 남 이야기 같던 사회의 규칙은 범죄를 저지르는 순간에만 동등하게 적용된다. 왜 열심히 살고 있는데 더 가난하고 힘들어지는 것일까? 웬디의 상황에 대해 아무도 답해주지 않는다. 웬디의 행복한 후일담을 기대하기에는, 현실은 더욱 빠르게 나빠질 뿐이다.

 

<믹의 지름길>

1845년, ‘솔로몬’(윌 패튼)과 ‘에밀리’(미셸 윌리엄스), ‘윌리엄’(닐 허프)과 ‘글로리’(셜레 헨더슨), ‘토마스’(폴 다노)와 ‘밀리’(조이 카잔), 세 가족이 정착할 곳을 찾아 오리건 주의 사막을 건넌다. 아무리 가도 정착할 만한 곳이 나타나지 않자, 이들은 안내를 위해 고용한 ‘믹’(브루스 그린우드)을 불신하기 시작한다. 물과 식량이 떨어져 가는 가운데, 솔로몬과 믹은 인디언 한 명을 생포하고 길을 안내하게 만든다. 인디언을 믿을지 말지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믹은 인디언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고 에밀리는 인디언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믹의 지름길>은 오리건 주의 사막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이는 켈리 라이카트의 가장 중요한 조력자 조나단 레이몬드의 영향 때문이다. <올드 조이>(2006), <웬디와 루시>(2008), <믹의 지름길>(2010), <어둠 속에서>(2013), <퍼스트 카우>(2019) 등 켈리 라이카트는 조나단 레이몬드와 대부분의 작품에서 각본 작업을 함께 했다.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 대부분이 오리건 주를 배경으로 하는 이유는 조나단 레이몬드가 오리건 주에 거주하며 그곳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쓰기 때문이다.

영화 <믹의 지름길>(2010) 예고편

<믹의 지름길>은 4:3의 화면비로 진행되고, 4:3은 흑백 무성영화 시절에 사용되던 화면비다. 켈리 라이카트는 서부극에서 늘 외면받던 여성들에 집중하며, 영화의 역사 초기에 등장한 서부극에 말을 건다. 여성이 등장하지 않는 서부영화에도 늘 여성은 어딘가에 존재해왔고, 켈리 라이카트는 카메라를 돌려서 여성의 표정과 말을 담는다. 누군가는 서부영화에서 남성이 주인공인 게 당연한 지름길처럼 말하겠지만, 켈리 라이카트는 묵묵하게 여성의 삶을 응시한다.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누군가를 바라보는 일이 가치 있는 일이라는 믿음과 함께.

 

<어떤 여자들>

첫 번째 여자, 로라. 변호사 ‘로라’(로라 던)는 산재를 겪고 회사에 보상을 요구하는 ‘풀러’(자레드 해리스)에게 보상을 받지 못할 거라고 설명하지만, 몇 달 동안 같은 말을 해도 풀러는 납득하지 않고 고집을 피운다. 두 번째 여자, ‘지나’. 지나(미셸 윌리엄스)는 남편 ‘라이언’(제임스 르 그로스)과 새집을 짓기 위해서 이웃 ‘앨버트’(르네 오베어저누아)의 마당에 있는 사암 덩어리들을 사려고 한다.

세 번째 여자들, 제이미와 베스. 목장에서 일하며 말을 돌보는 ‘제이미’(릴리 글래드스톤)는 혼자 일하느라 하루 종일 말을 나눌 사람도 없다. 제이미는 우연히 학교 야간 수업에 갔다가 강사 ‘베스’(크리스틴 스튜어트)를 만나고 수업이 끝나고 함께 밥을 먹는다. 베스는 왕복 8시간이 걸리는 수업이 힘들다고 하소연하고, 제이미는 베스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기다려진다.

<어떤 여자들>(2016)은 몬태나 출신의 작가 마일리 멜로이의 단편소설을 각색한 작품이다. 켈리 라이카트의 작품 대부분이 오리건 주를 배경으로 하는데, <어떤 여자들>은 원작 소설에 맞게 오리건이 아닌 몬태나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다.

켈리 라이카트의 필모그래피에서 낯익은 이름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건 바로 배우 미셸 윌리엄스와 감독 토드 헤인즈다. 미셸 윌리엄스는 <웬디와 루시>(2008), <믹의 지름길>(2010), <어떤 여자들>(2016)까지 세 편에 출연하며 켈리 라이카트 감독과 가장 많이 호흡을 맞춘 배우다. <벨벳 골드마인>(1998), <캐롤>(2015)의 감독 토드 헤인즈는 켈리 라이카트와 사적으로도 절친한 사이로 <올드 조이>(2006)부터 <어떤 여자들>(2016)까지 다섯 작품에 제작으로 참여했다.

<어떤 여자들> 트레일러 

<어떤 여자들>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공통점이라면 주로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거다. 로라는 풀러가 고집을 부리는 걸 들어주고, 지나는 앨버트가 사암에 대해 가지고 있는 사연을 듣고, 제이미는 베스의 걱정을 듣는다. 영화는 주로 ‘액션’을 취하는 이들에 주목하고, ‘리액션’을 취하는 이들을 조연으로 치부하지만 <어떤 여자들>은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액션인지 주목한다. 세상이 유지되는 건 모두들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가운데, 그것을 들어주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켈리 라이카트는 ‘들어주는 일’의 가치에 대해 말하고, 그것이 삶에서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를 주목한다.

 

<퍼스트 카우>

오리건 주에서 사냥꾼 일행과 함께 생활하며, ‘쿠키’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요리사 ‘오티스 피고위치’(존 마가로)는 우연히 숲에서 숨어있는 중국인 ‘킹 루’(오리온 리)를 만난다. 쿠키는 킹 루에게 입을 옷과 잘 곳을 챙겨주고, 얼마 지나서 둘은 재회한다. 쿠키는 킹 루의 집에서 지내게 되고, 우유를 넣어서 비스킷을 만들면 맛있겠고 생각한다. 마침 마을에 처음으로 젖소가 들어오고, 쿠키와 킹 루는 밤에 몰래 젖소의 우유를 짜내고 비스킷을 만들어 팔기 시작한다. 비스킷은 맛있다는 소문과 함께 기대 이상으로 많이 팔린다.

<퍼스트 카우>(2019)는 조나단 레이몬드의 소설 <the half life>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켈리 라이카트는 자신의 작품에서 중요한 키워드인 ‘전진’을 연상시키는 오프닝으로 영화를 시작할 때가 많다. <웬디와 루시>(2008)은 도시 속 화물열차가 지나가는 모습, <믹의 지름길>(2010)은 강을 건너는 사람과 마차, <어떤 여자들>(2016)은 멀리서부터 들어오는 기차, <퍼스트 카우>는 거대한 증기선이 강을 지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켈리 라이카트는 모든 것이 전진하는 가운데, 전진이 쉽지 않은 이들의 삶에 집중한다.

<퍼스트 카우> 트레일러

<퍼스트 카우>는 ‘새에겐 둥지를, 거미에겐 거미줄을, 인간에겐 우정을(the bird a nest, the spider a web, man friendship)’이라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인용하며 시작된다. 일확천금을 꿈꾸며 경쟁하는 시대가 배경이지만, 켈리 라이카트 감독은 총으로 사람을 위협하는 대신 손으로 버섯을 채집하는 요리사와 백인들과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없는 중국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이들의 우정을 보여준다.

켈리 라이카트의 차기작이 무엇이 될지 알 수 없지만, 세상이 주목하지 않는 이들의 일상을 보여줄 거라는 사실은 확실해 보인다. 인물이든 사건이든 특별하게 포장하는 데 공을 들이기 바쁜 영화들 사이에서, 켈리 라이카트는 주류가 아닌 인물들의 평범한 삶을 느리게 응시한다.

 

Writer

에세이 <나만 이러고 사는 건 아니겠지>, <달리다 보면> 저자. 좋아하는 건 영화, 여행, 음악, 문학, 음식. 특기는 편식. 꾸준한 편식의 결과물을 취향이라고 부르는 중. 취향을 바탕으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김승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