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을 기준으로 가장 주목받는 그리스 감독은 <더 랍스터>(2015)와 <킬링 디어>(2017)를 연출한 요르고스 란티모스다. 풍부한 상상력으로 관객을 사로잡은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이전 세대로서 그리스를 대표하는 두 감독이 있으니, 바로 코스타 가브라스와 테오 앙겔로풀로스다.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코스타 가브라스와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작품은 그리스 신화만큼이나 흥미롭게 느껴진다. 코스타 가브라스는 여러 국가를 배경으로 사회에 대한 날 선 비판이 담긴 영화를 만들었고, 테오 앙겔로풀로스는 그리스의 현실을 롱테이크로 응시하는 작품을 연출해왔다. 그리스 영화의 신전을 지탱하는 두 기둥처럼 느껴지는, 코스타 가브라스와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작품을 살펴보자.

 

<제트>

1963년의 그리스, 집회 현장에서 연설을 마친 야당의 국회의원 ‘Z’(이브 몽땅)가 교통사고로 죽는다. 경찰과 여당 인사들이 개입한 정치적 암살로, Z는 머리를 가격당해 죽은 거지만 은폐된다. 사건은 맡은 검사(장 루이 트린티냥)는 조사를 하던 중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사건을 마무리하자는 주변의 압박에도 조사를 이어간다.

<제트>(1969)는 칸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을 받으며 코스타 가브라스의 존재를 전 세계에 알린 영화다. 그리스의 그리고리스 램브라키스 교수 암살을 다룬 바실리스 바실리코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그리스 정권을 비판하는 영화이기에 그리스에서 20년 가까이 상영 금지를 당했다. 영화의 제목 ‘Z’는 그리스어로 ‘그는 아직 살아있음’을 뜻한다.

<제트> 트레일러

세상 모든 사람이 정의를 말한다. 문제는 정의의 의미가 잘못 쓰일 때가 많다는 거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득을 위해서, 자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 정의롭지 못한 짓을 정의로 포장하기도 한다. 정의를 말하는 건 쉬운 일이지만, 모든 이해관계에서 벗어나서 자신에게 떳떳할 수 있는 정의를 행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진짜 정의를 행하는 이의 행보를 바라보는 일이 영화를 넘어 현실에서도 잦아지길 바라게 된다. 정의를 유지하는 게 손해라는 인식이 팽배한 사회는, 죽은 사회나 다름없을 테니까.

 

<안개 속의 풍경>

‘볼라’(타냐 파라올로구)와 ‘알렉산더’(미칼리스 제케) 남매는 역에 나가서 아버지를 기다리지만 아버지는 오지 않는다. 둘은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지만, 아버지가 독일에 있다는 말만 듣고 무작정 독일행 기차를 탄다. 무임승차인 걸 들킨 남매는 기차에서 쫓겨나고, 둘은 자신들의 힘으로 아버지를 찾아간다.

<안개 속의 풍경>(1988)은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작품으로, 테오 앙겔로풀로스는 아버지를 찾아 나선 남매의 여정을 통해 그리스의 풍경을 보여준다. 여행지로서 그리스를 떠올리면 맑은 날씨와 푸른 바다, 진한 색감의 벽돌로 지어진 휴양지의 건물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안개 속의 풍경>는 맑은 날씨 대신 눈과 비가 함께 하며, 아무도 없는 겨울 바다와 황량한 도시를 보여준다.

<안개 속의 풍경> 트레일러 

볼라와 알렉산더 남매에게 아버지는 본 적도 없는 이상적인 세계에 가깝다. 아버지를 찾아가는 여정은 좌절의 연속이다. 이들이 보게 되는 그리스의 풍경도, 기댈 곳 없는 현실도 회색빛에 가깝다. 그럼에도 이들은 계속해서 전진하는 것에 의미를 두고, 마음으로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며 앞으로 나아간다. 보이지도 않는 희망 때문에 삶을 견뎌내는 건 무모함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다. 안개 속을 지나 남매가 보게 될 풍경은 어떤 모습일까? 남매의 눈 앞에 펼쳐질 풍경이 무엇이든, 그들 뒤에 찍힌 발자국은 관객들의 마음에 오랜 기간 사라지지 않고 새겨져 있을 거다.

 

<뮤직박스>

변호사 ‘앤 탤버트’(제시카 랭)는 자신의 아버지 ‘마이크 라즐로’(아민 뮬러 스탈)가 나치 전범으로 고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이 직접 변호를 맡기로 한다. 검사 ‘잭 버크’(프레드릭 포레스트)는 마이크 라즐로가 미국으로 오기 전 헝가리에서 ‘애로우 크로스’라는 비밀조직의 일원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했다고 주장한다. 잭 버크는 증인들을 불러오고, 앤 탤버트는 아버지를 변호하기 위해 노력한다.

<뮤직박스>(1989)는 코스타 가브라스가 <의문의 실종>(1982)으로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이후 또 하나의 국제영화제 그랑프리를 안겨준 작품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받았다. 코스타 가브라스는 그리스, 칠레, 우루과이 등 국가를 가리지 않고 그곳에서 생기는 역사, 정치 문제를 주로 다뤘고, <뮤직박스>에서는 미국을 배경으로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나치 문제에 대해 말한다.

<뮤직박스> 트레일러 

<뮤직박스>는 관객들에게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라고 묻는 작품이다. 내게는 분명 좋은 아버지인데, 과거에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가족과 관련된 문제 앞에서는 평소에 쉽게 답했던 질문 앞에서도 고민에 빠지곤 한다. <뮤직박스>의 주인공이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영원과 하루>

그리스의 시인 ‘알렉산더’(브루노 간츠)는 삶의 마지막을 앞두고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알렉산더는 길에서 만난 알바니아 소년(아칠레아스 스케비스)을 구해주고, 소년과 시에 대해 이야기하며 동행한다. 알렉산더는 여행하는 동안 19세기의 시인 ‘솔로모스’(파브리지오 벤티보글리오), 세상을 떠난 자신의 어머니(데스피나 베베델리), 아내 ‘안나’(이자벨 르노)를 마주하는 상상을 한다.

<영원과 하루>(1998)는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작품으로, 테오 앙겔로풀로스와 꾸준히 호흡을 맞춘 요르고스 아르바니티스 촬영 감독과 엘레니 카라인드루 음악 감독이 참여했다. 시인 알렉산더는 여행하는 동안에, 왜 사랑을 배우지 못했는지, 내일은 얼마나 지속되는 지에 대해 묻는다. 알렉산더의 질문은 테오 앙겔로풀로스가 영화를 찍는 동안 품었던 질문처럼 보인다. 해결이 어려워도, 사는 동안 품고 갈 수밖에 없는 질문들.

<영원과 하루> 트레일러 

알렉산더는 알바니아 소년에게 단어를 사겠다고 말하고, 소년은 몇 가지 단어를 가져온다. 시인은 단어를 수집하고, 시인이 아니어도 모든 이들은 각자의 말을 수집하며 살아간다. 어머니와 아내 등 사랑했던 이의 말은 가까운 만큼 기억에 더 선명하게 남는다. 알렉산더는 자신에게는 늘 선명한 기억으로 남은 아내 안나를 떠올린다. 내일은 얼마나 지속될지 묻는 알렉산더에게 안나는 ‘영원과 하루’라고 답한다. 내일 죽는다면, 내일의 단위는 ‘하루’가 아니라 ‘영원’이 되는 걸까? 죽음을 품고 사는 우리는 결국 내일이 영원할 것처럼, 또 다른 하루인 것처럼, 영원과 하루를 동시에 품은 채 살아갈 뿐이다.

 

Writer

에세이 <나만 이러고 사는 건 아니겠지>, <달리다 보면> 저자. 좋아하는 건 영화, 여행, 음악, 문학, 음식. 특기는 편식. 꾸준한 편식의 결과물을 취향이라고 부르는 중. 취향을 바탕으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김승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