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영화’라는 단어에서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 아마도 1970년대 전후의 무협 영화나 1980년대의 누아르 영화가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혹은 오우삼 감독의 <영웅본색> 같은 작품이나 성룡, 이소룡 같은 배우가 먼저 떠오를지도 모른다. 1997년 중국에 반환되기 이전까지 홍콩은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웠고 그 중심에는 영화가 있었다. 1970, 80년대는 홍콩영화의 전성기였고 쇼브라더스의 무협영화들부터 이소룡, 성룡, 홍금보, 임영동, 주윤발, 유덕화, 왕조현, 오우삼, 그리고 주성치와 왕가위에 이르기까지 모두 언급하기도 힘들 만큼 많은 빛나던 이름들이 있었다.

홍콩영화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우리가 현재를 떠올리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한때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다가 1990년대를 지나면서 완전히 쇠퇴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천안문 사태로부터 시작된 홍콩 해방에 대한 불안감과 경제 위기는 많은 감독이 해외로 떠나는 계기가 되었다. 오우삼, 서극, 성룡을 비롯한 이들이 본토나 할리우드로 떠나갔고, 자연스레 홍콩의 영화산업도 내리막을 걸었다.

홍콩이 반환되고 영화산업도 내리막을 한참 내려온 이후, 그 시점이 바로 오늘 소개할 두기봉 감독이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순간이다. 두기봉 감독은 1970년대 말에 데뷔하여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유명한 영화들의 속편을 담당하던 그저 그런 감독 중 하나였다. 그의 무기는 꾸준함이다. 홍콩영화의 흥망과 관계없이 꾸준히 홍콩에서 영화를 찍어오던 두기봉은 1990년대 말부터 두각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21세기를 지나면서 세계적인 거장의 반열에 올라섰다. 그것도 홍콩영화 전성기를 대표했던 ‘누아르’와 함께 말이다. 이제 두기봉은 홍콩 영화를 대표하는 이름이자 홍콩 누아르의 마지막 이름이 되었다. 1980년대를 빛내던 홍콩 누아르는 현대에 어떻게 남았을까? 두기봉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대표작 다섯 작품을 소개한다.

 

<대사건>

마약 조직 일당들을 잡으려 잠복근무 중이던 ‘청 반장’(장가휘)과 경찰들은 시내 한복판에서 이들과 총격전을 벌이게 된다. 도시 한복판에서 일어난 총격전은 방송사의 카메라에 적나라하게 담기게 되고, 마약 조직은 도주에 성공한다. 홍콩 경찰의 나약한 모습이 TV를 통해 도시 전체로 송출되자 홍콩 시민들은 경찰을 불신하게 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검사관 ‘레베카 퐁’(진혜림)은 생방송을 통해 경찰이 마약 조직을 검거하는 장면을 중계하기로 한다.

영화 <대사건> 오프닝 시퀀스

7분에 달하는 롱테이크로 촬영된 오프닝 시퀀스에서 두기봉 감독의 장기가 확실히 드러난다. 두기봉은 총격 액션의 장인이다. 그의 액션이 다른 흥망과 차별화되는 점이 있다면, 좁은 공간에서 인물과 카메라의 동선이 거의 곡예에 가깝게 움직인다는 점이다. 건물 위아래와 거리 곳곳을 훑는 카메라의 동선을 보라. 이 좁은 공간을 수직 수평으로 자유롭게 쏘다니면서 두기봉은 섬세하면서도 동시에 웅장한 서커스를 연출해냈다.

오프닝 시퀀스 이후의 대부분의 장면들이 진행되는 곳은 홍콩의 한 아파트이다. 이 비좁은 공간은 아마도 액션 영화를 연출하기엔 최악의 조건을 갖춘 극한의 공간일 것이다. 두기봉 감독은 스스로에게 부여한 이 한계를 오히려 기회로 삼는다. 아파트 복도의 총격전이나 아파트 엘리베이터의 추격전 등, 다른 영화에서 만나보기 힘든 새로운 이미지들을 발견할 수 있다. 공간이 좁아지면서 그 화려함은 줄어들었을지 몰라도, 이미지는 더욱 쉽게 각인되고 동작은 더 잘 이해된다.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진 만큼 서스펜스도 더욱 강렬하다.

왜 <대사건>의 공간들은 하나같이 좁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홍콩이 좁기 때문이다. 도시가 좁기에 도시 한복판 거리에서 형사, 경찰, 마약조직과 방송사의 카메라가 우연히 마주쳐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홍콩의 높은 인구밀도와 빽빽하게 들어선 아파트들이 본작의 전개에 당위성을 부여한다. 두기봉은 홍콩의 감독이고 그렇기에 그는 아마도 가장 좁은 액션 영화를 연출하는 감독이다.

 

<흑사회>

홍콩 삼합회는 2년마다 차기 회장을 뽑는 선거가 열린다. 차기 회장 후보로 ‘록’(임달화)과 ‘따이디’(양가휘) 두 사람이 나서게 된다. 따이디는 뇌물을 통해 주요 원로들을 매수해뒀지만, 현직 회장 ‘텡’(왕천림)의 제안으로 선거에서는 록이 당선된다. 이 결정을 수락하지 못한 따이디는 회장의 상징인 용두 단장을 빼앗아가게 되고, 용두 단장을 차지하기 위한 두 사람의 거친 싸움이 펼쳐진다.

<흑사회>는 잔혹하다. 조직 간 암투의 긴장감을 밀도 있게 연출해내는 점과 잔혹한 액션 장면들은 홍콩 누아르의 전통을 훌륭히 재현한다. 하지만 본작은 남자들 간의 끈끈한 의리나 승리의 쾌감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처절하고 잔혹한 싸움들에서 유발되는 특유의 시적인 분위기는 오히려 홍콩의 무협영화들과 더욱 닮아있다. 본작은 순수한 장르적 즐거움만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았고, 장르영화로는 드물게 그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었다.

 

<흑사회 2>

회장 임기를 모두 채워갈 무렵 ‘록’(임달화)은 회장 자리를 연임하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낸다. 그러나 삼합회는 역사상 한 번도 한 사람이 회장을 두 차례 연임한 적이 없다. 반면 조직의 일원으로써 자신의 사업을 일으켜 성공가도를 달리던 ‘지미’(고천락)는 중국 본토에서 사업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조직의 회장이 되어야만 한다는 지시를 공안으로부터 전달받는다. 회장이 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참가하게 된 지미와 회장을 연임하고 싶음에도 그럴 수 없는 록, 회장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두 사람의 싸움이 펼쳐진다.

<흑사회>의 영어 제목은 ‘Election’(선거)이다. 두기봉은 두 편의 흑사회 속에 홍콩 민주주의의 위기를 담았다. 1편에서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선거를 통해 회장을 선출했으나 선거 과정에 위기를 맞는 삼합회의 모습을 1997년 이후 직접선거를 잃어버린 홍콩의 시대상황과 대조시켰다. 2편에서의 삼합회의 모습은 중국 현대사와 닮아 있다. 홍콩 삼합회 회장의 자리는 중국 공안의 지시로 좌우된다. 주변 환경에 완전히 지배당해 자신을 바꾸어야만 하는 지미의 모습이 홍콩의 현실과 그리 다르지 않다.

 

<익사일>

‘아화’(장가휘)의 집에 네 사람의 손님이 찾아온다. 두 사람은 조직의 명을 받아 그를 죽이러 온 친구 ‘포’(황추생)와 ‘페이보’(임설), 다른 두 사람은 그들로부터 아화를 지키러 온 친구 ‘타이’(오진우)와 ‘마오우’(장요양)이다. 서로를 향한 한바탕 총격전 이후 마음이 약해진 이들은 다시 과거의 우정을 되찾게 된다. 친구들은 힘겹게 살아가는 아화의 사정을 듣게 되고, 하나의 팀이 되어 아화의 아내와 아이를 위해 현상금 사냥을 나선다. 그러는 사이 조직의 두목 ‘페이’(임달화)가 이들을 쫓는다.

영국과 중국의 경계에 놓인 홍콩이었기에, 홍콩 누아르는 할리우드 고전 누아르, 70년대의 홍콩 무협영화들 그리고 할리우드 고전 서부영화들과 이탈리아 스파게티 웨스턴까지 여러 나라 장르영화들의 영향을 골고루 받아 탄생했다. 두기봉은 자신의 영화에서 의도적으로 그 뿌리들을 재연한다. <흑사회>가 홍콩 무협 영화들을 닮아 있듯이 <익사일>은 할리우드의 서부 영화들을 닮아있다.

영화 <익사일> 트레일러

이길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의리로 뭉쳐 기꺼이 죽음으로 뛰어드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홍콩 누아르의 전형적인 인물들을 연상케 한다. <대사건>이 홍콩 누아르의 인물들을 복잡한 홍콩의 거리로 보냈다면, <익사일>은 이들을 마카오의 넓은 대지로 쫓아냈다. 그럼에도 홍콩의 잔상은 남아있다. 서부의 사나이들처럼 넓은 대지를 떠돌다가도, 이 작품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여러 차례의 총격 액션 장면들은 어김없이 좁디좁은 건물 속에서 펼쳐진다. 좁은 공간 속에서 거의 완벽에 가까운 구도로 서로의 위치를 숨긴 채 한순간 동시에 나타나 총알을 쏟아내는 <익사일>의 액션 장면들은 액션 영화 연출의 정점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인행 : 생존 게임>

뇌에 총상을 입었지만 1mm 오차로 살아남은 강력범죄 용의자 ‘슌’(종한량)이 병원으로 이송된다. 그와 함께 온 형사는 총기 사용 과잉진압의 실수로 책임을 져야만 하는 ‘첸’(고천락)이다. 신경외과 의사 ‘통’(자오웨이)은 예전에 일어난 의료사고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야만 한다. 수술을 미루는 슌은 병원에서의 탈출 계획을 세우고, 슌의 수술이 늦어질수록 통은 불안하기만 하다. 자신의 실수를 숨기고 싶어 하는 첸은 통을 이용해서 슌을 죽이기로 한다.

<대사건>, <흑사회>, <익사일>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이 세 작품은 각각 두기봉 감독의 서로 다른 스타일의 걸작들이다. <삼인행 : 생존 게임>은 이 세 작품 모두와 닮아있다. 죽음에 가까이 선 인물들이 좁디좁은 공간에 모여있다는 점에서 <대사건>과 닮았다. 서로의 죽음을 기다리는 길고도 추악한 대치의 과정은 <흑사회>와 닮았다. 그리고 현실에서 결코 존재하지 않을 억지로 만들어낸 협소한 공간에서 모든 인물이 서로에게 총을 쏘아대는 순간은 <익사일>과 닮았다.

영화 <삼인행 : 생존게임> 예고편

<삼인행 : 생존게임>은 두기봉이 가장 최근에 연출한 액션 영화다. 본 작은 여전히 두기봉의 연출 스타일이 유효함을 증명하고 있다. 그 사실은 중요하다. 두기봉의 누아르는 곧 홍콩의 마지막 누아르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홍콩이 중국으로 완전히 반환될 날이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아직까지 홍콩 영화는 살아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은 두기봉을 비롯한 일곱 명의 홍콩 감독들이 찍은 단편을 모은 <칠중주 : 홍콩 이야기>였다. 이들 감독이 있는 한 홍콩 영화는 그리 쉽게 사라지지만은 않을 것이다.

 

"홍콩 영화는 한물갔다고 많은 사람이 말합니다. 영광의 시절은 이미 끝났다고 말이죠. 심지어 홍콩영화는 죽었다는 말도 하지만 제 생각은 여전히 다릅니다. 어떻게 홍콩영화가 죽을 수 있나요? 단 하나의 영화만 남아도 홍콩 영화는 살아 있는 겁니다." - <두기봉 : 경계를 넘는 감독> 중에서

 

Writer

좋아하는 건 오직 영화 뿐이고 특히 68혁명 이전까지의 고다르 영화에 대한 광적인 팬이다. 스스로가 언젠가 대단한 일을 해낼 거라는 착각 속에 살고 있다. 철이 없다.

강정화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