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기억은 피부에 남는다. 이마와 목 언저리, 몸 곳곳에 사진처럼 찍힌다. 이것은 새긴 줄도 모른 채 간직했던 장면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미지 출처 – ‘focus.mylio’

파도가 밀려오면 지난 계절의 기억을 더듬어본다. 흔들리는 마음을 묶어두려고, 푹 젖어버리기 전에 어디론가 숨어버리려고. 해묵은 기억을 개키는 시간, 번번이 그 끝에서 마주치는 건 언제 쌓아뒀는지 모를 장면들이었다. 오래전 알았던 얼굴들과 이제는 이름을 떠올릴 수 없는 장소들. 그 앞에 서서 어리둥절 생각한다. 이게 왜 이토록 오래 남아 있을까?

이미지 출처 – ‘pinterest’
이미지 출처 – ‘focus.mylio’

프랑스 아티스트 토마스 메일렌더는 피부에 그런 기억을 새긴다. 그의 작업은 한때 누군가의 일부였을 필름에서 오래된 잔상을 불러내는 일. 필름에 자외선 불빛을 비추면 무성영화를 닮은 이미지들이 하나 둘 밖으로 흘러나온다. 메마른 등과 팔다리 위로 내려앉는다. 방금 다린 듯 새빨갛게 익어버린 자국을 걸쳐 입고서.

이미지 출처 – ‘British Journal of Photography’
이미지 출처 – ‘Designboom’

순한 민낯을 감추려 억센 껍질을 둘러쓴 알맹이처럼 이곳엔 온통 슴슴한 장면뿐이다. 이름 모를 얼굴들, 밍숭맹숭 조각난 풍경들. 그마저도 햇빛이 닿으면 울긋불긋 번진 자국이 무색하도록 부서져 내린다.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면 금세 흐릿해지고 이어 붙여도 하나의 생이 되지 못하는 이미지들은 그러나 맥락 없이 낯이 익었다. 언젠가 다른 곳에서 마주친 듯 기시감이 들었다. 흔한 랜드마크 하나 없는데도 묘하게 알 것 같은 장면들, 돌아보니 그 끝자락에는 파도 앞에서 마주쳤던 기억들이 맞닿아 있었다.

이미지 출처 – ‘focus.mylio’
이미지 출처 – ‘focus.mylio’
이미지 출처 – ‘tumblr’

그림자마저 무거워 발걸음마다 서러워지던 날, 예고없이 마주한 기억들은 그렇게 별다를 것 없었다. 틀린 그림 찾기 같은 날들과 벽지 무늬처럼 반복되는 관계, 위로라기엔 무안할 만큼 심심했다. 하지만 다시 보니 모난 곳이 없어 쓰다듬기 좋았고 오래도록 뭉근해서 하릴없이 평온해졌다. 무엇보다 안온함이, 알게 모르게 나누어 받은 마음들이 곳곳에 묻어있었다. 스며들어 몰랐을 뿐 별다를 것 없어 편안했고 익숙해서 기댈 수 있던 날들, 삶이 흔들릴 때 지탱해주는 건 결국 그런 것들이었다. 무심코 지나쳤으나 사실 그 무엇도 사소하지 않았다.

이미지 출처 – ‘pinterest’
이미지 출처 – ‘pinterest’
이미지 출처 – ‘tumblr’

들춰보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곳에 누구나 기억 하나쯤 새겨두고 산다. 특별할 것 없지만 그래서 더 담백한 장면들을, 그러니까 토마스 메일렌더의 작업 같은 풍경들을. 그리고 힘에 부칠 때 한 번씩 들여다보는 것이다. 흔들리는 마음을 묶어두려고, 푹 젖어버리기 전에 어디론가 숨어버리려고. 내 것인지 네 것인지 구분하는 것이 의미 없어진 피부 앞에서 이제 나의 모습을 생각해본다. 어디에 자리잡았든 기왕이면 따스했으면 좋겠다고, 아무도 파도에 휩쓸리거나 젖어버리지 않게 붙들어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곱씹으면서.

 

Writer

언어를 뛰어넘어, 이야기에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마음속에 새로운 씨앗을 심어주고, 새로운 세계로의 통로가 되어주니까. 그래서 그림책에서부터 민담, 괴담, 문학, 영화까지 다양한 형태의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있다. 이렇게 모은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중. 앞으로 직접 이야기를 만들기도 하며 더 풍성하고 가치 있는 세계를 만들어나가기를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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