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벤갈리’(Svengali)는 근대 프랑스 만화가 조르쥬 드 모리에(George du Maurier)가 1894년에 출간한 고딕 호러 소설 <Trilby>에 등장하는 악마 같은 캐릭터다. 어린 아일랜드 소녀 ‘트릴비’를 유혹하고 지배하여 유명한 가수로 만들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를 착취한다. 이 작품은 걸작 <오페라의 유령>에 영감을 주기도 했고, 후일 많은 영화들이 매니저 스벤갈리와 가수 트릴비의 착취 관계를 소재로 다룰 만큼 유명한 캐릭터로 발전했다. 근래에는 CBS에서 제작한 영화 <스벤갈리>(1983)에서 명배우 피터 오툴과 당시 신인급이었던 조디 포스터가 각각의 캐릭터를 연기하였다.

<스벤갈리>(1983)의 한 장면. 피터 오툴은 최면으로 조디 포스터가 담배를 끊도록 조종한다

재즈계에서 스벤갈리와 트릴비와 같은 관계로 묘사되는 유명한 사례가 있다. ‘새시’(Sassy)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왕년의 디바 사라 본(Sarah Vaughan)과 그의 첫 남편 조지 트레드웰(George Treadwell)의 관계가 그렇다. 두 사람은 밴드의 동료로 처음 만나 약 10여 년 동안 매니저와 가수 관계로, 그리고 부부 사이로 발전하면서 상업적인 성공과 유명세를 누렸지만, 관계의 끝은 장기간 별거와 이혼 소송으로 막을 내렸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첫 남편이 자신의 성공에 미친 영향에 대해 질문을 받자, 사라 본은 “그가 나의 성공을 위해 한 일은 없어요. 그가 한 일은 모두 자신을 위한 것”이라며 첫 남편에 대한 평가절하와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1942년 아폴로 극장의 노래대회에서 수상한 곡 ‘Body and Soul’

사라 본은 어린 시절부터 교회 성가대에서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했다. 아직 10대 소녀였던 1942년, 뉴욕 할렘의 아폴로극장에서 열린 아마추어 노래대회에서 1등으로 수상하며 재즈 가수로 첫발을 내디뎠다. 얼 하인즈 밴드에 고용되어 월 10달러를 받으며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당시 밴드 동료였던 디지 길레스피, 찰리 파커 등 후일 비밥 대가들의 즉흥 연주를 자신의 목소리로 따라 하며 후일 비밥의 여왕(Queen of Bebop)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45년에는 에스콰이어 신인상을 받으며 승승장구했지만, 그에 걸맞은 충분한 보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제 그는 재즈 밴드에 소속된 여성 가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솔로 활동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디지 길레스피, 찰리 파커 등 유명한 비밥 연주자들과 낸 싱글 ‘Lover Man’(1945)

사라 본이 스물두 살이 되던 1946년, 그는 쇼비즈니스에 정통한 두 사람을 만나게 되면서 솔로 스타로 변신하는 데 성공한다. 로스앤젤레스 기반의 독립 재즈 레이블 뮤지크래프트(Musicraft) 대표 프로듀서 앨버트 막스(Albert Marx)와 계약을 맺고 자신의 이름을 내건 30여 장의 싱글을 음악 차트에 올렸다. 또 다른 사람은 뉴욕의 재즈 클럽 카페 소사이어티(Café Society)의 공연에서 만나게 된 트럼펫 연주자 조지 트레드웰(George Treadwell)이었다. 그는 사라 본에게서 미래를 보았고, 희망 없던 뮤지션 생활을 접고 그의 매니저로 나섰다. 그는 전 재산 8,000달러를 투자하여 사라 본의 헤어 스타일을 세련되게 바꾸고 교정 치료를 받게 했다. 또한, 고급스러운 의상으로 그를 감싸 마치 팝 스타처럼 화려하게 보이게 했다.

사라 본의 첫 히트 싱글 ‘Tenderly’(1947)은 빌보드 27위에 올랐다

사라 본과 조지 트레드웰은 곧 로맨틱한 관계로 발전했고 이듬해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은 수입이 점차 늘자 고향 뉴어크(Newark)에 3층집을 마련하였지만, 결혼 6년 만에 별거에 들어갔다. 하지만 대외적으로 가수와 매니저 관계를 유지하였고, 대형 레이블 머큐리(Mercury)와의 계약으로 사라 본은 재즈 장르에서 벗어나 대형 팝 스타로 전성기를 누리며 끊임없이 음악 차트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사라 본은 남편에게 매니지먼트 일을 일임하고 그가 짜 놓은 스케줄에 따라 쉴 틈 없이 공연하러 다녔지만, 마침내 1958년 이혼 소송을 제기했을 때 부부에게 남은 재산은 16,000달러가 전부였다. 두 사람은 이를 반반으로 나누어 12년 동안의 사랑과 협업 관계에 완전한 종지부를 찍었다.

사라 본의 EmArcy 전성기의 최고 히트곡 ‘Broken Hearted Melody’(1958)는 첫 골드 싱글이 되었다

이혼 소송이 진행되며 두 사람 간의 관계가 바깥으로 알려지자, 조지 트레드웰은 ‘스벤갈리’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 그는 오랫동안 공을 들인 알앤비 그룹 드리프터즈(The Drifters)의 리더가 떠나자 그의 지분을 인수하여 그룹을 소유하고 지배하였다. 그가 사망한 후에도 트레드웰 가족은 미망인과 딸 티나(Tina)를 통해 지금까지 음악계의 영향력을 유지하며 트레드웰 엔터테인먼트를 운영하고 있다. 사라 본은 조지 트레드웰과 헤어진 후 두 번 더 결혼하였지만, 남편과 매니저의 역할을 동시에 해줄 남자는 결국 찾지 못하였다.

사라 본과 조지 트레드웰의 이혼 소송을 보도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