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이 상을 받았어야 했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끝난 직후 열린 파티에서 한 감독에게 자신의 오스카 트로피를 건넸다. 우연히 찍힌 이 장면이 연일 SNS를 도배하면서 ‘셀린 시아마’라는 낯선 감독이 세간의 주목을 받는다. 시아마는 최근 영화계에서 가장 핫한 감독이다. 유수의 영화제에 이름을 올렸고 트위터에는 연일 셀린 시아마를 향한 지지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한국에서도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코로나 시국에도 15만 명에 가까운 관객을 끌어 모았고, 예술 영화로서는 드문 큰 반향을 끌어내며 시아마의 성장 3부작 <톰보이>, <워터 릴리스>, <걸후드>를 연이어 개봉하게 했다. 그는 여성의 정체성과 욕망을 분명한 의식으로 다루는 영화를 만든다. 곤란에 빠진 자에게 과감한 클로즈업과 공격적인 질문을 던지며 기존 체제를 비껴가는 대안을 고민한다. 그렇게 시아마는 여성이 참고 감내하는 방식이 아닌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이야기를 써왔다. 페미니즘과 젠더라는 시대의 고민과 늘 같이하며 예술영화의 최전방에서 분투하고 있다. 오늘은 전 세계가 주목하는 감독 셀린 시아마의 고유한 매혹을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을 소개한다.

 

<워터 릴리스>(2007)

<워터 릴리스>는 아티스틱 스위밍 장면으로 시작한다. 지역 대회에 출전한 15살 ‘플로리안’(아델 에넬)은 멋진 동작으로 단연 돋보이는 연기를 펼친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같은 학교의 ‘마리’(폴린 아콰르)는 첫눈에 플로리안에게 반해버린다. 이후 마리는 무작정 플로리안을 따라다니며 아티스틱 스위밍을 가르쳐 달라고 조른다. 플로리안은 자신이 애인과 데이트하는 동안 망을 봐주는 조건으로 마리의 부탁을 들어준다.

<워터 릴리스>는 섹스에 대한 호기심과 또래 사이의 긴장감,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까지 그 나이 때가 가진 심리를 예민한 감각으로 다룬 작품이다. 무엇보다 밖으로 드러나는 우아한 몸짓과 달리 물속에서는 거칠게 다리를 휘젓는 아티스틱 스위밍의 이미지를 두 주인공의 처지에 빗댄 점이 인상적이다. 늘 열등감에 시달리고 성적 대상으로 치부되는 10대 소녀들은 시선의 감옥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한다. 밖으로 드러난 자신과 속사정이 일치하지 않아 마음이 곪아가던 두 소녀가 가까워지면서 본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이 주된 내용이다. 마리가 플로리안의 쓰레기 속에서 먹다 남은 사과를 베어 무는 장면은 짐작하기 어려운 그들의 관계를 보여주는 인상적인 신이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치장하기 바쁜 흔하디흔한 하이틴 영화와 달리 덜컥거리는 성장 과정을 극심한 고통으로 다루고, 매 장면이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독창적이다. 무엇보다 10대들이 지닌 관능을 다루면서도 그것을 즐기는 방식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단 한 장면도 관습에 매이는 법이 없는 이 영화를 통해 화려하게 데뷔했다.

 

<톰보이>(2011)

낯선 동네로 이사 온 ‘로레’(조 허란)는 여자지만 동네 친구들에게 ‘미카엘’이라는 남자 행세를 한다. 미카엘은 동네에서 축구 시합을 하고 남자 애들 사이에서 몸을 부딪치며 찧고 까분다. 녀석이 들키지는 않을까 불안한 마음이 들지만 뛰어놀 때는 다 잊힌다. 미카엘은 시합만 하면 골을 넣어 남자들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수영장에서는 속옷에 불룩한 뭔가를 넣고 흡족해한다. 동네 친구들 사이에서 리더격이 된 미카엘은 이제 더 수습하기 힘든 거짓말을 쏟아내고, 결국 비밀은 꼬리를 밟혀 만천하에 드러난다.

친구들의 비난과 따돌림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고, 폭력적으로 구는 학교 선생과 부모는 사려 깊지 못한 언행으로 상처를 입힌다.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상황에서 미카엘은 다른 사람을 연기하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간다. 번지르르해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개인을 한없이 냉대하는 학교라는 공간엔 볕 들 날은 오지 않고, 어른들의 무심함에는 상상력의 빈곤이라는 죄악이 깃든다. 미카엘은 커서 어떤 어른이 됐을까? 어떤 직업을 택하고, 어떤 고통을 감수하면서 살고 있을까? 엔딩 크레디트는 놀랍게도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는다. 우리가 극장 밖을 나서면 맛볼 시큰둥한 세상이 있을 뿐이다.

<톰보이>에는 미카엘이 숲속을 걷는 장면이 유독 자주 등장한다. 녹음이 우거진 그곳은 미카엘을 기만하지 않고 온전한 자신으로 숨 쉴 수 있게 길을 터준다. 집은 쳐다보기도 싫고 여전히 어른이 되려면 긴긴 고통을 감내해야 할 터다. 영화는 젠더 패싱이라는 복잡한 문제를 머리를 짧게 자른 아이의 목소리로 쉽고 명료하게 설명해낸다. <톰보이>는 셀린 시아마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다.

 

<걸후드>(2014)

‘마리엠’은 성적이 낮아 고등학교 진학에서 원하는 학교에 가지 못한다. 가정이 어려운 탓에 생계 전선으로 몰릴 처지다. 그저 평범하게만 살아가고 싶을 뿐인데 그런 기회마저 잡기가 쉽지 않다. 그때 ‘레이디’, ‘아이아투’, ‘필리라’는 친구를 만나면서 거리의 삶이 시작된다. 자신이 모르던 유쾌하고 짜릿한 일탈의 도시가 그녀 앞에 놓인다. 춤추고 노래하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아이들은 그저 평범한 것을 넘어 꿈을 이루는 삶에 대해 생각한다. 영화는 쉽게 결론 내리기보다는 그들의 가능성에 포커스를 맞추고, 그들을 가로막는 문제들을 사회와 계급의 문제로 치환해낸다. 셀린 시아마의 다른 작품과 달리 개인보다는 사회 역학에 무게를 둔 작품이다.

셀린 시아마는 <걸후드>에 대해 “오늘날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익숙한 자화상을 그렸다. 이 작품은 내가 쓰고 연출하는 마지막 성장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고, <문라이트>의 배리 젠킨스 감독은 "자신만의 온전한 우주를 만드는 소녀들의 이야기"라고 극찬했다. 영화에서 네 주인공이 리한나의 <다이아몬드>를 부르는 장면은 극장을 떠나도 잊히지 않는다. “우리는 하늘 위 다이아몬드처럼 빛난다”란 가사처럼 현실에 굴하지 않고 꿈을 위해 이겨내겠다는 당찬 기운이 묻어나는 장면이다. 재밌는 점은 셀린 시아마가 이 곡을 사용하기 위해 리한나에게 직접 촬영본을 보내서 허락을 득했다고 한다. 허락을 받지 못했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셀린 시아마 감독의 '성장 3부작' 중 가장 마지막 작품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

화가 ‘마리안느’(노에미 멜랑)는 백작 부인의 의뢰로 결혼을 앞둔 ‘엘로이즈’(아델 에넬)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프랑스 브리타니의 낯선 섬에 도착한다. 마리안느는 자신이 그려지는 걸 싫어하는 엘로이즈를 그려내기 위해 정체를 숨기고 동행한다. 엘로이즈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던 마리안느는 점차 그녀가 지닌 상처에 가닿고, 두 사람은 점차 속사정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 사이로 발전한다. 어느덧 초상화는 완성되어가고, 이별이 가까워 올수록 마음도 세차게 흔들린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다분히 시선에 관한 영화다. 마리안느가 단순히 관찰자에 머물 땐 엘로이즈의 피상적인 면밖에 보지 못하지만, 두 사람이 서로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초상화엔 점점 더 입체적인 생명력이 담긴다. 처음 마리안느가 그린 그림은 라파엘로의 초상화처럼 다분히 기능적인 ‘그랜드 매너’에 가까웠다. 한 남성의 소유물에 불과한 기능적인 답습에 불과했다. 이에 엘로이즈는 자신이 모델이 되어줄 테니 제 본연의 모습을 그려주길 요구한다. 마리안느의 예술가적 기질을 끌어내고, 서로 진정한 교감을 이뤄내기 위해 관습과 편견을 떨쳐내길 부탁한다. 정념이 타오르는 시선과 함께 다시 시작된 작업 과정엔 남성은 사라지고 오로지 두 사람만 남는다. 마침내 억눌려왔던 욕망이 발화하고, 예술만이 도달할 수 있는 어떤 불가해한 경지에 다다른다.

영화의 배경인 18세기 프랑스는 억눌린 여성들의 유배지다. 셀린 시아마는 두 여인의 사연을 통해 오늘날 여성들이 처한 시선의 문제를 끄집어낸다. 늘 욕정의 대상으로만 존재했던 여성들이 남성을 배제한 공간에서 피메일 게이즈(female gaze)의 작동 방식을 실험한다. 피메일 게이즈는 단순히 여성적 시선이 아니다. 이는 성 소수자의 시선을 포함한 제3의 시선, 즉 사회적 약자의 시선을 의미한다. 시아마는 서로를 마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달라질 수 있다는 듯이 두 눈에 불을 켜고 서로에게만 집중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셀린 시아마가 전 세계적인 감독으로 떠오른 화제작이고, 기생충이 그랑프리를 수상한 제72회 칸영화제에서 각본상, 퀴어종려상을 받았다.

 

Writer

영화와 책, 그리고 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쓴다. 지은 책으로는 <우리 각자 1인분의 시간>, <보내지 않을 편지>가 있다. 염세주의자가 되고 싶으나 하루 세끼 먹을 때마다 행복하다.
박민진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