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기 반젤리스의 스튜디오 작업 모습

리들리 스콧 감독의 클래식 SF 누아르 <블레이드 러너>(1982)는 영화 전체의 음울한 분위기에 어울리는 반젤리스(Vangelis)의 배경 음악이 빛을 발한다. 영화 <불의 전차>(Chariots of Fire, 1981)에서 아카데미 영화 주제가상을 차지하며 영화음악으로 전성기를 맞은 그는, 스튜디오에서 영화 장면들을 보면서 즉흥적으로 미래 지향적인 신시사이저 연주곡을 만들어나갔다. 영화 대부분을 채운 전자 음악들과는 달리, 1930년대 브로드웨이에서 건너온 듯한 랙타임(Ragtime) 스타일의 발라드 ‘One More Kiss, Dear’도 있는데, 영화 개봉 후 12년 만에 발매한 OST 음반에서 이 곡을 들었던 팬들의 궁금증을 자극했다.

<블레이드 러너>에 수록된 발라드 ‘One More Kiss, Dear’

이 곡은 브로드웨이에서 만들어진 곡이 아니라 반젤리스가 영화에 삽입하기 위해 작곡한 오리지널이다. 원래 아프로디테스 차일드(Aphrodite’s Child) 시절부터 함께 활동한 절친이자 <블레이드 러너> 음악을 함께 만들던 데미스 루소스(Demis Roussos)에게 보컬을 의뢰하려고 데모용 테이프를 녹음했는데, 당시 이 곡을 처음 불렀던 사람은 반젤리스의 매니저 역할을 하던 돈 퍼시벌(Don Percival)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뮤지션 생활을 했지만, 음악 홍보나 매니저나 일을 하면서 노래를 한 지는 꽤 오래되었다. 데미스 루소스가 최종 버전으로 녹음했지만, 아무리 들어봐도 데미스 루소스의 떨리는 목소리보다 돈 퍼시벌의 오래된 듯한 창법이 훨씬 로맨틱했다. 결국 고민 끝에 돈 퍼시벌 버전을 영화에 삽입하기로 했다.

그리스 밴드 아프로디테스 차일드(Aphrodite’s Child)의 최대 히트곡 ‘Rain and Tears’(1968)

스타 보컬리스트 데미스 루소스를 제친 돈 퍼시벌은 음악 비즈니스의 막후에서 뮤지션을 발굴하고 홍보를 담당하던 인물이었다. 1930년 영국 웨일스의 중소 도시 스완지(Swansea)에서 태어나, 재즈 밴드에서 가수와 베이스 연주자로 뮤지션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밴드가 핑크 팬더 영화 <A Shot in the Dark>(1964)에 출연하면서 이름이 알렸고, 그 후 신생 음반사였던 필립스(Phillips)에 채용되면서 뮤지션 생활을 접고 A&R(Artist & Repertoire) 담당으로 음악 비즈니스에 투신했다. 당시 슬럼프에 빠졌던 데이비드 보위를 도와 ‘Space Oddity’를 아폴로 11호가 달에 도착하기 5일 전에 발매하면서 그의 재기를 도왔던 일화는 많이 알려졌다. 그 외에도 엘튼 존, 스테이터스 쿠오(Status Quo), 로드 스튜어트 등이 그의 클라이언트였다.

호세 카레라스와 함께 포즈를 취한 돈 퍼시벌(왼쪽)

폴리그램의 전신 포노그램(Phonogram)의 음악, TV, 영화 부문 최고위직에 올랐던 그는, 1980년에 자신의 회사 Don Percival Artistes Promotion을 설립하여 호세 카레라, 루치아노 파바로티 같은 오페라 가수의 매니지먼트 업무를 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클라이언트 중 한 사람이었던 반젤리스를 돕다가 뜻하지 않게 <블레이드 러너>의 OST 음반에 자신의 노래를 삽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특유의 밝은 성격으로 많은 뮤지션과 각별한 친분을 유지했던 그는, 2013년 8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