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권에서 새로운 뛰어난 감독이 등장하기 힘들어 보였던 1980년대 초반, ‘에밀 쿠스트리차’라는 이름은 산업적으로 이미 붕괴해가던 유고슬라비아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장편 데뷔작인 <돌리벨을 아시나요>는 베니스 황금사자상을, 바로 다음 작품 <아빠는 출장 중>은 칸 황금 종려상을 받으면서, 에밀 쿠스트리차는 단숨에 80년대 영화계의 스타로 등극했다.

그는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도 중간중간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특한 연출 방식을 선보였다. 이러한 스타일을 ‘마술적 리얼리즘’이라 부른다. 중남미 지역 문학에서 등장하여 불안한 사회상을 풀어내던 마술적 리얼리즘의 스타일을 쿠스트리차는 영상 언어의 표현방식으로 변주해 유고슬라비아라는 무대로 옮겨왔다. 그의 영화 중 마술적 리얼리즘의 스타일이 가장 두드러지는 두 작품을 소개한다.

 

<집시의 시간>

<집시의 시간> 이전까지 에밀 쿠스트리차는 자국의 암울한 현실을 이야기하는 예술가였다. 세 번째 작품을 준비하려던 시기, 그는 신문에서 국경을 넘어 서유럽으로 팔려나가는 집시 아이들의 기사를 읽게 된다. 다른 나라로 팔려가 구걸하는 생활을 강요당하는 집시 아이들의 삶은 그가 <집시의 시간>을 연출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에밀 쿠스트리차는 직접 집시 마을에서 생활하고 공부하면서 이 작품을 준비했다. 집시 민족의 문화를 확실히 담아내려 했고, 그 덕에 영화 스스로가 집시 민족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다. 음악을 즐기는 민족을 닮아 영화 속의 음악들은 언제나 영화 속의 인물 중 누군가에 의해 연주된다. 점술과 마술에 능했던 민족을 닮아 환상의 이미지들이 서사 안팎을 채운다. 단 두 명의 연기자를 제외하면 나머지 모든 등장인물은 실제 집시들이며, 본작은 세계 최초로 집시 언어로 촬영된 영화이기도 하다. <집시의 시간>은 이방인이 어설프게 집시 문화를 흉내 내는 영화가 아니다.

이미지 출처 – 링크

집시 어머니의 사생아로 태어난 ‘페란’(다보아 더모빅)은 할머니, 숙부, 여동생과 함께 살고 있다. 그는 여자 친구와 결혼을 원하지만, 여자 친구의 어머니는 지참금을 가져올 때까지는 절대 허락해주지 않겠다고 한다. 여자 친구와 결혼하고 여동생의 다리를 고치기 위해, 페란은 친척 ‘아메드’(보라 토도로빅)를 따라 여동생과 함께 집을 떠난다. 아메드는 페란을 이탈리아로 데려가는데, 로마에서 발견한 아메드의 모습은 부자의 삶이 아니었다. 사실 그는 아이들을 사고팔고 학대하면서 이들을 이용해 돈을 벌고 있었다.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페란은 아메드의 범죄조직에 가담하게 된다.

다른 쿠스트리차의 영화들처럼 <집시의 시간>에서는 현실 속에 환상의 이미지들이 종종 개입한다. 여기서 감독은 환상의 역할과 범주를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환상의 이미지들은 오직 페란과 여동생의 욕망을 비출 때 혹은, 비극적인 장면들의 묘사를 아름다운 모습으로 돌려놓기 위해서만 사용된다. 시각적으로는 아름답지만 결국 환상의 이미지들 서사에 어떤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못한다. 본작의 이야기는 언제나 현실 속에 있다.

<집시의 시간> 트레일러

그러나 에밀 쿠스트리차가 페란의 현실 속에 쥐어준 단 하나의 허구가 있는데, 바로 페란의 염력이다. 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염력은 페란의 삶을 절망 속에서 벗어나게 해 줄 유일한 희망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포크나 숟가락 정도만 간신히 움직일 수 있던 페란의 이 변변찮은 능력은 결국 페란의 삶에 어떤 제대로 된 기회 하나 쥐여주지 못한다. 본작의 비극성이 극대화될 수 있는 건 감독이 환상의 영역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만약 당신이 집시를 자유로운 방랑생활을 하는 자유민들의 모습의 민족들로 생각하고 있었다면, <집시의 시간>은 그 환상을 확실하게 깨부수는 작품이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페란의 삶은 곧 집시인들의 삶이다. 영화 초반부의 순수하고 정직한 청년 페란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변화해가는 모습에서 우리는 사라져 가는 민족의 아픔을 발견할 수 있다.

 

<언더그라운드>

<집시의 시간> 이후, 에밀 쿠스트리차는 어쩌면 세상의 더 많은 이들의 비극을 이야기하는 감독으로 변해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1991년, 그의 조국은 다시 한번 내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쿠스트리차의 카메라는 다시 유고슬라비아를 향할 수밖에 없었다. <언더그라운드>는 그 결과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유고슬라비아는 독일과의 전쟁 중이다. ‘블랙키’(라자르 리스토브스키)와 ‘마르코’(미키 마뇰로비치)는 지하 무기공장을 운영하면서 막대한 부를 거둬들인다. 독일군 장교에게 붙잡힌 블랙키를 구해준 마르코는 블랙키를 지하 공장에 숨겨준다. 그러다 전쟁이 끝나고 티토 정부가 들어서자 마르코는 영웅이 된다. 하지만 마르코는 지하 공장의 사람들에게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수십년 동안 지하 공장의 사람들은 계속 무기를 만들면서 전쟁 지원을 이어간다. 약 40년이 지난 후, 침팬지가 실수로 탱크를 발사하면서 지하공장 사람들은 처음으로 지상 세계를 마주하게 된다. 그들이 마주한 지상 세계는 여전히 전쟁 중이다. 그 전쟁은 독일군이 아닌, 유고슬라비아인들 사이의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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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삶을 조명함을 통해 한 국가의 근현대사를 되짚는다는 점에서 본작은 미국의 <포레스트 검프>나 한국의 <국제시장>과 비슷하다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작품들과 <언더그라운드>의 가장 큰 차이는, 촬영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모습은 현재 진행형의 비극이었다는 점이다. <언더그라운드>는 필연적으로 우울한 작품이다.

하지만 영화 전반의 분위기는 마냥 우울하지만은 않다. 등장인물들은 역사의 중요한 순간들을 모조리 지나가지만, 그 무대는 역사의 중심이 아닌 지하 공장이다. 따라서 본작을 이끌어가는 역할은 국가의 역사와 인물의 개인사 모두의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영화 속 세계는 영화 밖 현실과 마치 평행선을 이루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 관계 덕분에 영화는 밝은 분위기를 이어간다. 그러다 모든 인물이 지하실을 벗어나 현실의 공간으로 왔을 때, 모든 개인사는 실로 비극이 된다. 이를 묘사하는 건 마술적 리얼리즘의 역할이다. 영화는 다시 한번 역사의 무대 옆에 평행선을 긋는다. 이번에 인물들이 설 무대는 역사가 아닌 환상이다. 환상의 공간에 등장인물 모두를 모아놓고, 쿠스트리차는 아주 특이한 방식으로 국가의 화합을 이야기한다.

<언더그라운드> 트레일러

이 특이한 화법 때문에 <언더그라운드>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둘로 나뉜다. 당시 칸 영화제 심사위원들은 만장일치로 이 작품에 황금종려상을 안겨주었고 현재까지도 이 영화를 극찬하는 많은 평론가와 대중들이 있다. 반대로 또 다른 다수의 평론가는 이 영화가 역사의 중요한 순간들에 대해 어떠한 판단도 하지 않고 환상을 덧입히며 피해 간다고 비난했고, 세르비아의 학살을 옹호하고 있다며 혹평을 쏟아냈다. 영화가 역사와 정치를 다루는 태도를 굳이 비호하려 들지는 않겠다. 그러나 <언더그라운드>가 높은 완성도와 탄탄한 이야기를 갖춘 영화임은 부정할 수 없다. 에밀 쿠스트리차 영화 세계의 정점을 경험하고 싶다면, 반드시 <언더그라운드>를 꼭 감상하길 권해본다.

 

Writer

좋아하는 건 오직 영화 뿐이고 특히 68혁명 이전까지의 고다르 영화에 대한 광적인 팬이다. 스스로가 언젠가 대단한 일을 해낼 거라는 착각 속에 살고 있다. 철이 없다.

강정화 브런치